'이건희 신경영' 31주년·...“가보지 않은 길 가자” 외친 이재용
입력 2024-06-06 18:42:26
수정 2024-06-06 18:46:10
이재용, 2주간 미국 빅테크 만난다
30여개 미팅 소화 예정
1993년 6월 7일. 이날은 삼성이 세계 일류기업으로 도약한 운명의 시간이었다. 삼성의 내로라하는 핵심 임원 200여 명이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명령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집결했다. ‘신(新)경영’의 닻이 오른 순간이었다. 이 회장의 지시로 허겁지겁 짐을 꾸린 임원들은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켐핀스키 호텔은 독일은 물론 유럽 내에서도 최고급 시설로 이름을 날리던 특급 호텔이었다. 하지만 호텔 회의장에 모인 임원들을 반긴 것은 럭셔리한 연회 대신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던 이 회장의 목소리였다.
신경영은 그렇게 이 회장의 작심과 함께 시작됐다. 장장 68일간 200여 명의 임원진 전원이 유럽, 미국, 일본의 세계 일류 현장을 찾아 다녔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공장이라고 불리던 벤츠와 폭스바겐, 에어버스를 조립하는 파리공항의 조립 현장, 세계 제일의 백화점 등 세계 일류라면 업종을 가리지 않았다.
저녁에 돌아와선 각자 보고 들은 것에 대해 회의를 열었다. 회의라기보다 ‘뼈저린 반성’에 가까웠다. 그동안 임원들은 회사의 업무에서 완전히 제외됐다. 전화도 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 1등’이라는 우물 안 개구리식 사고로는 더 이상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회장의 결론이었다. 양이 아닌 질로 승부하라는 슬로건이 공염불에 그치자 극단의 선택에 나서게 된 것이 바로 신경영이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두 건의 보고서였다. 1980년 이 회장이 직접 각고의 노력으로 영입한 후쿠다 다미오, 기보 마사오 고문이 작성한 보고서였다. 두 사람은 각각 디자인과 기술 고문을 맡아 삼성에 일본의 기술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회장은 6월 7일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날 두 고문과 밤새도록 삼성의 앞날에 대해 토론했다. 그때 기보 고문이 올린 보고서가 바로 그 유명한 ‘K보고서’다. 보고서의 내용은 이랬다.
“일본인들은 연구·개발자들이 부품이나 측정기, 각종 도구를 사용하고 나면 원래 위치로 다시 가져다 놓는다. 다음 사람이 금방 찾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연구 데이터도 잘 정리해 나중에 다시 활용한다. 중복이나 누락 없이 원활한 연구·개발이 가능한 이유다. 그런데 삼성은 13년 동안 정리 정돈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금까지 안 된다. 내가 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이젠 회장이 조직 문화를 바꿀 때다.”
그렇게 생존을 위협하는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이 신경영, 즉 ‘양에서 질로의 변화’였다. 세계 일류가 무엇인지 몸으로 깨닫게 해주기 위해 200명이 넘는 임원들을 68일간이나 세계로 끌고 다닌 것이다. 세계 기업사에서 리더들의 마인드를 바꾸기 위한 이런 집중적인 교육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이재용, 2주간 미국 빅테크 만난다…30차례 미팅 소화 예정
‘신경영 선언’ 31주년을 맞은 시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이건희 선대 회장이 전 세계를 돌았던 것처럼 2주간 미국 동서부를 훑으며 미팅과 현장점검 등 30여건의 공식 일정을 수행원 없이 소화한다.
삼성의 반도체 부문은 지난해 15조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역대급’ 위기에 직면해 있다. AI칩의 핵심 메모리 반도체로 떠오른 HBM 부문에선 SK하이닉스에 밀렸고 파운드리와 시스템반도체 사업은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올해 들어 반도체 시장이 회복세에 접어들었지만 최근 원포인트 인사로 반도체(DS) 부문장을 교체하며 쇄신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번 출장은 이 회장이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난관을 극복하고 새 기회를 모색하려는 행보라는 해석이 나온다. 밖에서는 반도체 시장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고 안으로는 노사 갈등으로 경영 환경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삼성다운 리더십과 혁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2주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할 계획이다. IT, 인공지능(AI), 반도체, 로봇 등의 미국 내 주요 기업 수장과 30여 건의 연쇄 미팅을 할 예정이다. 지난달 31일 출국한 이 회장은 현지에서 임직원들을 만나 “모두가 하는 사업은 누구보다 잘 해내고, 아무도 못하는 사업은 누구보다 먼저 해내자”고 독려했다.
이 회장은 지난 4일 미국 뉴욕에서 대형 이동통신사 버라이즌의 한스 베스트베리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AI를 활용한 기술 및 서비스 방안, 차세대 통신 기술 전망, 기술혁신을 통한 고객 가치 제고 전략 등 사업 전반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또 버라이즌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안드로이드 에코시스템 확대, 올해 하반기 갤럭시 신제품 판매 방안, 갤럭시 신제품 공동 프로모션, 버라이즌 매장 내에서의 갤럭시 신모델 AI 기능 체험 방안 등도 논의했다.
이날 미팅에는 노태문 MX사업부장, 김우준 네트워크사업부장, 최경식 북미총괄 사장 등 삼성전자 주요 경영진도 함께했다.
이 회장이 이번 출장에서 주요 면담 상대로 택한 버라이즌은 글로벌 통신 사업자 중 삼성전자의 최대 거래 업체다. 두 회사는 스마트폰뿐 아니라 네트워크 장비에서도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버라이즌은 2020년 7조9000억원 규모의 '5G를 포함한 네트워크 장비 장기공급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 통신장비 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수출 계약으로, 삼성전자는 해당 수주를 계기로 미국 5G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이 같은 대형 거래가 이뤄진 데에는 이 회장과 베스트베리 CEO의 각별한 인연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과 베스트베리 CEO는 2010년 스페인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에 각각 삼성전자 부사장과 스웨덴 통신 기업 에릭슨 회장 자격으로 나란히 참석했다.
이때 만남을 시작으로 10년 이상 두터운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
이 회장은 이번 출장길에서도 북미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 AI 기업 리더들과 만남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엔비디아, AMD 등 AI 반도체 기업이나 빅테크 기업들과 협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