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변동 배제 특약’ 무효 판결…건설업계 공사비 분쟁 새 분수령 [허란의 판례 읽기]

법원, 건산법 근거로 특약 효력 제한
시공사 “불공정 거래” vs 발주처 “계약 준수해야”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한 주택재개발 신축공사 현장. 사진=연합뉴스



경기 광주의 한 지역주택조합은 최근 시공사인 서희건설로부터 공사비 인상 협상을 시작하자는 공문을 받았다.

서희건설은 공문을 통해 ‘대법원이 물가변동 배제특약(ESC)을 인정하지 않는 도급계약서 약정이 무효라는 고등법원의 판결을 정당하다고 판단했다’는 문구를 포함해 물가상승에 따른 공사비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조합 내부에선 계약서 특약의 법적 효력을 스스로 포기할 순 없다는 의견이 강해 내홍이 일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급등한 공사비 문제로 전국 건설 현장이 몸살을 앓는 상황에서 민간 공사 계약에서 물가상승분을 공사비 증액에 반영하지 않기로 한 ‘물가변동 배제 특약’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은 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건설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동안 법원은 계약준수를 강조하며 이 특약의 유효성을 인정해왔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원자재 가격 상승 부담을 건설사 등 수급인이 모두 떠안는 것은 불공정 거래라고 보는 판결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법원 “물가 배제 특약, 건산법에 위반”

대법원은 올해 4월 ‘건설산업기본법 제22조 5항’을 근거로 물가변동 배제 특약의 효력을 제한할 수 있다고 본 부산고등법원 판결에 대한 상고를 심리불속행 기각하며 2심을 확정했다. 심리불속행 기각은 상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사건을 더 이상 심리하지 않고 기각하는 제도다.

부산의 한 교회가 시공사에 제기한 선급금 반환 청구 항소심에서 2심 재판부는 “수급인(시공사)의 귀책 사유 없이 착공이 8개월 이상 늦춰지는 사이 철근 가격이 두 배가량 상승했는데 이를 도급금액에 전혀 반영할 수 없다면 수급인에게 현저하게 불공정한 경우에 해당한다”며 해당 물가 배제 특약을 건산법 조항에 따라 무효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한 “특약에서 물가상승으로 도급금액을 증액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으나 건설산업기본법 제22조 제5항이 일정한 경우 도급금액 증액 금지 약정을 무효로 정하고 있다”며 “이는 현저히 불공정한 거래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강행규정”이라고 강조했다.

건산법 제22조 제5항에 따르면 ‘계약 내용이 당사자 일방에게 현저하게 불공정한 경우에 특약을 무효’로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1호에서는 계약 체결 이후 설계 변경과 경제 상황 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변경에 대해 상대방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것을 ‘불공정 거래’로 보고 있다.

3호에서는 도급계약의 형태, 건설공사의 내용 등 관련된 모든 사정에 비추어 계약체결 당시 예상하기 어려운 내용에 대해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경우도 불공정하다고 명시했다. 국토교통부 역시 같은 법률에 따라 물가변동 배제 특약이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놨다.

김용우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이번 판례는 도급계약에 첨부된 표준도급계약에 공사대금을 조정하는 일반 규정이 있었다는 점에서 법원이 물가 배제 특약을 전면 무효로 본 것인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일반 규정에 우선하는 특약을 무효로 판단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과거와는 달라진 판결 태도

앞서 대법원은 2017년 국가를 상대로 하는 공공 계약에서 물가배제특약의 유효성을 인정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하는 등 최근까지 법원은 특약의 효력을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민간 계약에서는 계약에 포함된 특약이 더욱 엄격하게 준수돼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러나 위 판결의 사실관계가 건산법 제22조 5항 제1, 3호가 시행되기 이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위 판결만으로 물가 배제 특약의 효력이 인정될 수는 없다는 반론도 존재했다.

법원 판결과 비슷한 효력을 지니는 중재 판정에서도 물가 배제 특약을 무효로 본 결정이 나왔다. 대한상사중재원은 한국중부발전과 한 중공업 기업 간 탈황설비 구매계약 중재 사건에서 이 특약을 무효로 보고 시공사가 청구한 추가 계약금액의 상당 부분을 지급하라고 판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공공기관의 도급계약에서 물가 배제 특약을 무효로 본 기존 판례는 있었지만 설비 구매계약에서도 특약이 무효로 판단돼 주목된다.

이경준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최근 나온 물가 배제 특약 무효 판결은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원자잿값 급등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고려된 것”이라며 “건설산업기본법을 근거로 특약을 제한하려는 소송이 당분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돋보기]
공사비 증액 갈등에 KT·쌍용건설도 소송전

하급심에 계류 중인 공사비 청구 소송 사건에서도 물가 배제 특약과 건설산업기본법 조항이 중요한 판단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GS건설은 서울 북서울자이폴라리스 재개발조합에 공사비 추가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며 광주 광산구 쌍암동 주상복합 발주처인 롯데쇼핑과 현대건설 컨소시엄은 국토교통부 건설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 신청을 냈다.

2023년 11월 준공 완료한 경기 안양 물류센터 재건축 사업에선 LF그룹과 DL건설이 400억원의 추가 공사비를 놓고 갈등 중이다.

KT 경기 판교 사옥 건설 공사비 증액을 두고 다투던 KT와 쌍용건설도 결국 법정행을 선택했다. 쌍용건설이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이유로 171억원의 추가 공사비를 요구하자 KT는 올해 5월 10일 공사비를 모두 지급했다며 ‘채무부존재확인의 소’를 제기했다. 양사는 2023년 10월 국토부 건설분쟁조정위원회 조정을 시도했으나 결국 소송전으로 치달았다.

KT 관계자는 “회사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인 만큼 명확한 해결을 위해 법적 판단을 받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대법원에서 확정된 판례는 계약 체결 후 착공이 지연된 상황에서 물가가 올라 물가변동을 반영하려고 하자 물가 배제 특약이 문제가 된 것이지만 KT 사례는 준공정산이 완료된 상황이라 차이가 있다”고 덧붙였다.

건설업계의 공사비 분쟁은 특약과 건설산업기본법 해석을 둘러싸고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원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KT그룹은 현대건설, 롯데건설, 한신공영 등과도 물가 배제 특약이 담긴 도급계약을 체결한 만큼 이번 쌍용건설과의 소송전이 다른 회사의 특약 유효성을 따지는 중요한 판결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물가 배제 특약의 법적 효력을 제한하는 판례가 나오면서 공사비 협상을 진행 중인 재건축·재개발 조합 내 갈등도 커지고 있다. 공사비 인상에 합의하고 사업 속도를 높이려는 조합 집행부와 이를 조합원 이익을 침해하는 ‘배임’으로 보는 조합원들 간 내홍이 불거지고 있다.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은 공공 공사뿐만 아니라 민간 공사도 계약서상의 불공정 조항을 무효로 본다. 국토부는 올해 4월 지방자치단체뿐만 아니라 민간 발주자에도 공사비 관련 불공정 조항에 관한 유권해석 내용을 전달했으나 상당수 재개발·재건축 조합에서는 조합원 반발로 소송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수주를 위해 물가 배제 특약을 홍보했던 건설사도 설계변경 등의 단서를 달아 공사비 증액을 유도하고 있어 갈등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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