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춤해진 성장세’...위기 극복 외치는 2024 CEO ‘경영 키워드’[2024 100대 CEO]
입력 2024-06-24 09:02:02
수정 2024-06-24 09:17:14
[커버스토리 : 2024 100대 CEO-CEO 경영 키워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최고경영자(CEO)는 누구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한경비즈니스는 매년 종합신용정보 회사인 NICE평가정보와 공동으로 ‘한경비즈니스 100대 CEO’를 선정하고 있다. 이름을 올린 100명의 CEO는 한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자 성장을 이끄는 주역들이다.
올해 100대 CEO들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대내외적으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산업흐름도 예측이 어려울 만큼 급변하고 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회사를 어떻게든 성장시켜야 하는 게 이들의 의무이자 역할이다. 새로운 전략과 혁신을 위치며 ‘위기 극복’에 나선 100명의 CEO를 소개한다. 이와 함께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이들이 꺼내든 2024 경영 키워드를 짚어봤다.
마이크로소프트(MS)를 ‘첨단 소프트웨어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아무리 첨단이라고 해도 MS는 방대한 사업영역을 갖고 있어서인지 직원은 20만 명이 넘는다. 애플도 제조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직원 수는 16만 명을 상회한다. 이런 MS와 애플을 제치고 세계 시가총액 1위에 오른 엔비디아의 직원수는 2만2000명에 불과하다.
엔비디아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이 됐다는 것은 단지 인공지능(AI)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됐다는 것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공장 없이 설계만 하는 팹리스 기업, 그리고 다양한 서비스와 제품을 다른 기업과 연결시켜주는 플랫폼 기업을 중심으로 국제 분업 체제가 재편된다는 점도 중요한 포인트다. 엔비디아가 갖고 있는 개발자들의 플랫폼 KUDA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다.
과거 국제분업체제의 정점에는 제조업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 서 있었다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는 설계능력을 갖춘 플랫폼 기업이 서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제조업 강국의 위기다. 대표적 국가 독일은 글로벌 분석가들의 관심 대상에서 멀어진 듯 보인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토지, 노동, 자본, 기술 등 요소를 집중 투입하는 제조업 생산성을 기반으로 한 추격자 전략을 써온 한국 기업도 주춤하고 있다.
이 같은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와 함께 한국 사회의 구조변화는 더 고차원적인 해법을 기업들에 요구하고 있다. 저성장 고착화는 새로운 시장을 발견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저출생은 앞으로 젊은 인재를 찾는 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국내외 정치적 변수도 기업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11월 예정돼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는 그 결과에 따라 대기업들이 글로벌 투자전략을 완전히 새롭게 짜야 할 수도 있는 메가톤급 변수가 되고 있다. 끝나지 않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으로 이미 피해를 보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 어떠한 충격을 더 견뎌내야 할지는 예측조차 힘들다.
국내 정치 상황도 마찬가지다. 야당이 절대 다수를 장악한 국회, 이런 야당을 끌어들이는 협치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만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낮은 지지율의 대통령실, 그리고 무력한 여당 등 기업들이 기댈 곳은 거의 없다.
이런 변화는 지난해 한국 기업들의 실적에 악영향을 미쳤다. 삼성전자, SK 등 수많은 대기업들의 매출이 전년 대비 감소했다. 큰 폭으로 매출이 떨어지며 100대 기업 명단에서 이름이 사라진 기업들도 있다.
한국의 수출을 책임지는 ‘버팀목’이자 ‘대들보’ 역할을 해온 기업들이 흔들리자 ‘한국 경제 시스템 위기설’도 고개를 들고 있다.
재계에서는 과거 1998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당시가 떠오를 정도로 경영이 어렵다는 얘기가 들린다. 숱한 어려움을 극복해낸 경험이 있는 한국 기업들이지만 이번에 엄습한 위기의 파고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는 설명이다. 과거에는 위기란 공감대가 있었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정서적 합의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마저 없다는 게 더 큰 위기인지도 모른다.
2024년 한경비즈니스가 선정한 100인 CEO들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의 어깨에 한국 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위기 극복’과 ‘새로운 미래 개척’이라는 과제를 함께 지고 있는 CEO들. 대한민국 대표 CEO 100인이 내세운 ‘경영 키워드’를 통해 한국 경제의 미래를 살펴봤다.
경영 키워드 1
제로 베이스 경영으로 ‘새 혁신’“1등을 하면 누군가 추격해 오고 있기 때문에 위기이고 1등을 못하면 생존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위기다.”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한 말이다. 그는 항상 위기를 강조했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때도 “작은 구멍에도 댐이 무너질 수 있다. 세계의 모든 기업이 삼성전자를 경계하고 추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 땀이 난다”는 말도 했다.
이런 위기에 대처하는 이건희 회장의 선택은 10년 후 먹거리 준비와 이를 실행할 사람이었다. 항상 “10년 후 무엇을 먹고살지 고민한다”는 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이를 위해 사람을 준비하라고 했다.
“한 명의 천재가 1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왔다. 천재를 삼성에 데리고 오라”며 경영진을 압박했다. 또 “자신의 후임을 준비하지 않는 경영자는 미래가 없는 경영자”라며 인재를 양성하라고 했다.
이제 이건희 회장은 삼성에 없다. 이재용 회장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 뉴 삼성의 틀을 잡아가고 있다. 올해 삼성의 기조는 전열 재정비다. 그동안 온갖 재판으로 제대로 경영을 챙기지 못한 이재용 회장이 본격적인 뉴 삼성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워밍업이다.
현재 삼성의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 삼성이 보여준 숫자와 전문가들의 우려는 ‘역대급’이라고 할 만하다. ‘캐시카우’였던 반도체 사업의 기술적 주도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15조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이 회장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2주간 미국 전역을 누비며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등 현지 빅테크 수장들과 만나며 삼성의 미래를 점검했다.
이 회장은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며 “삼성의 강점을 살려 삼성답게 미래를 개척하자”고 짧은 소감을 전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조만간 이 회장이 아버지의 바통을 이어받아 ‘제2의 신경영’을 선언할 것이라는 예상도 제기된다. 삼성이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혁신이 필요한 시점인 만큼 이 회장이 직접 나서 새로운 미래전략을 제시할 때가 왔다는 이유에서다.
이 회장의 ‘뉴 삼성’을 현실화할 삼성 CEO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대세가 된 ‘인공지능(AI)’ 역량 강화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AI 기능을 대폭 강화한 가전제품은 물론 ‘AI스마트폰’을 선보였다. 이 중에서도 갤럭시 ‘AI스마트폰’은 모처럼 시장에서 ‘삼성다웠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AI 기술을 세계 최초로 스마트폰에 접목해 글로벌 시장에서 높은 판매율을 기록하는 등 호평을 받고 있다.
최주선 사장이 이끄는 삼성디스플레이도 올해 업계 최초로 차량용 원형 OLED를 시장에 처음 선보였다. 정교한 레이저 가공 기술 등이 반영된 원형 OLED를 앞세워 BMW 미니(MINI) 등 파격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자동차 제조사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앞으로 이 시장을 새로운 먹거리로 만들겠다는 각오다.
주력 계열사들이 부진한 실적을 기록한 롯데도 제로 베이스 관점에서 혁신을 이뤄내자고 선포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기존 틀을 깨고 원점부터 시작하라”는 특명을 내리고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과거 롯데의 주력사업은 유통과 화학이었다. 바이오, 헬스케어 등을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주목하고 있는 신 회장은 경쟁력 없는 사업 부문은 과감히 정리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임직원들에게 전달하며 롯데그룹 재건에 집중하고 있다.
경영 키워드 2
선택과 집중…미래를 선점하라CEO의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다. 뜰 사업과 저물 사업을 경쟁자들보다 먼저 알아채고 과감히 투자하거나 때로는 발을 뺄 줄도 아는 능력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 20년 전만 해도 게임용 GPU를 공급하는 작은 회사에 불과했던 엔비디아가 시총 1위 기업이 된 것도 젠슨 황 CEO의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AI에 대한 확신을 갖고 뚝심 있게 기술개발을 밀어붙인 끝에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이 됐다.
국내를 대표하는 CEO들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유망산업에 과감하게 베팅하며 새롭게 뜨는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현대차그룹이 대표적이다. 현대차는 더 이상 자동차 제조사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모빌리티 기업’으로의 대전환을 알리며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현대차그룹은 목표 달성을 위해 향후 10년간 전기차 전환을 비롯해 소프트 웨어 중심 자동차(SDV), 로보틱스, 첨단항공모빌리티(AAM) 등 미래 사업 구축을 위해 110조원을 투자하기로 한 상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자동차의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경쟁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엔진 자동차, 하이브리드차, 전기차 등 과거와 현재의 자동차 라인업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은 지난해 좋은 실적을 올리는 힘이 됐다. 완전자율주행 기술과 로보틱스, 항공모빌리티 투자는 미래용이다.
장재훈 현대차 사장은 정의선 회장이 제시한 미래 비전들을 서서히 조직에 입혀나가며 현대차의 체질개선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지난해 어려움 속에도 역대급 실적을 거둔 LG전자도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조주완 사장의 주도 아래 미래 준비가 한창이다. 대표적인 게 전기차 충전사업이다. 미래 먹거리로 점찍고 글로벌 기업과 협업하는 등 외연확장에 나서고 있다. 북미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장해 다양한 국가로 사업을 확대한다. 이외에도 AI, 로봇 등에 손을 뻗으며 2030년 매출 100조원 달성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김승연 회장이 이끄는 한화는 우주경제 시대에 앞장서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우주 발사체에서부터 관측·통신위성, 탐사 등 전반을 다루는 ‘우주 밸류체인’을 구축했다.
신재생에너지도 한화의 미래를 책임질 산업이다. 이구영 한화솔루션 큐셀 부문(이하 한화큐셀) 대표가 이끌고 있는 한화큐셀은 미국 조지아주에 약 3조4000억원 규모의 태양광 밸류체인 생산 시설 ‘솔라 허브’를 구축 중이다. 올해 말 솔라 허브가 완공되면 한화큐셀은 8.4GW의 모듈 생산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북미 기준으로 실리콘 셀 기반 모듈을 제조하는 기업 가운데 최대 제조기업이 된다. 경영 키워드 3
기업을 알아야 경영도 잘해…내부 인사의 약진
‘유명 컨설팅업체 출신’, ‘글로벌 기업에서 스카우트’. 한때 대기업들 사이에서 이같이 화려한 이력을 가진 CEO들을 모셔오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그만큼 평사원으로 시작해 CEO까지 오르는 경우는 찾기 힘들었다. 간혹 이런 인사가 나오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해당 CEO 앞에는 ‘샐러리맨 신화’라는 수식어가 붙고는 했다.
최근에는 달라진 기류가 감지된다. 회사를 잘 아는 내부 인사들을 새롭게 CEO로 내세우는 기업이 많아진 것이다. 올해도 수많은 샐러리맨 출신 CEO가 새롭게 탄생했다.
내부 인사를 CEO로 세웠을 때의 강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회사 시스템에 빠삭하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침착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둘째, 적응 시간이 빠르다. 이들은 오랜 기간 회사에 몸담아온 경험을 살려 내부의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올해부터 포스코그룹을 이끌게 된 장인화 회장이 대표 격이다. 장 회장은 30년 넘게 포스코에만 몸담아온 정통 ‘포스코맨’이다. 1988년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에 입사한 뒤 포스코 신사업실장, 철강마케팅솔루션실장, 기술투자본부장, 기술연구원장 및 철강생산본부장 등 그룹 내 주요 요직을 모두 거쳤다.
그룹의 핵심 사업과 개선점에 대한 확실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미래 비전을 명확하게 실현해낼 수 있는 적임자로 꼽히며 포스코그룹을 이끌게 됐다.
오종훈 SK에너지 사장도 있다. 1992년 SK이노베이션의 전신인 유공에 입사한 그 역시 30년 넘는 세월 동안 SK그룹에만 몸담으며 한 우물을 팠다. 오랜 에너지 마케팅 경험과 기업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SK에너지의 경쟁력을 더욱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신영수 CJ대한통운 대표도 빼놓을 수 없다. CJ제일제당·CJ오쇼핑 인사팀장, CJ인재원 부원장 등을 역임한 그는 CJ에서만 30년 동안 활약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올해부터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CJ대한통운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이외에도 박종문 삼성증권 사장, 구본욱 KB손해보험 사장 등이 평사원에서 올해 CEO가 된 대표 인물들이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
최고의 활약을 펼친 최고경영자(CEO)는 누구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한경비즈니스는 매년 종합신용정보 회사인 NICE평가정보와 공동으로 ‘한경비즈니스 100대 CEO’를 선정하고 있다. 이름을 올린 100명의 CEO는 한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자 성장을 이끄는 주역들이다.
올해 100대 CEO들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대내외적으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산업흐름도 예측이 어려울 만큼 급변하고 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회사를 어떻게든 성장시켜야 하는 게 이들의 의무이자 역할이다. 새로운 전략과 혁신을 위치며 ‘위기 극복’에 나선 100명의 CEO를 소개한다. 이와 함께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이들이 꺼내든 2024 경영 키워드를 짚어봤다.
마이크로소프트(MS)를 ‘첨단 소프트웨어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아무리 첨단이라고 해도 MS는 방대한 사업영역을 갖고 있어서인지 직원은 20만 명이 넘는다. 애플도 제조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직원 수는 16만 명을 상회한다. 이런 MS와 애플을 제치고 세계 시가총액 1위에 오른 엔비디아의 직원수는 2만2000명에 불과하다.
엔비디아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이 됐다는 것은 단지 인공지능(AI)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됐다는 것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공장 없이 설계만 하는 팹리스 기업, 그리고 다양한 서비스와 제품을 다른 기업과 연결시켜주는 플랫폼 기업을 중심으로 국제 분업 체제가 재편된다는 점도 중요한 포인트다. 엔비디아가 갖고 있는 개발자들의 플랫폼 KUDA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다.
과거 국제분업체제의 정점에는 제조업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 서 있었다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는 설계능력을 갖춘 플랫폼 기업이 서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제조업 강국의 위기다. 대표적 국가 독일은 글로벌 분석가들의 관심 대상에서 멀어진 듯 보인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토지, 노동, 자본, 기술 등 요소를 집중 투입하는 제조업 생산성을 기반으로 한 추격자 전략을 써온 한국 기업도 주춤하고 있다.
이 같은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와 함께 한국 사회의 구조변화는 더 고차원적인 해법을 기업들에 요구하고 있다. 저성장 고착화는 새로운 시장을 발견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저출생은 앞으로 젊은 인재를 찾는 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국내외 정치적 변수도 기업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11월 예정돼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는 그 결과에 따라 대기업들이 글로벌 투자전략을 완전히 새롭게 짜야 할 수도 있는 메가톤급 변수가 되고 있다. 끝나지 않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으로 이미 피해를 보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 어떠한 충격을 더 견뎌내야 할지는 예측조차 힘들다.
국내 정치 상황도 마찬가지다. 야당이 절대 다수를 장악한 국회, 이런 야당을 끌어들이는 협치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만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낮은 지지율의 대통령실, 그리고 무력한 여당 등 기업들이 기댈 곳은 거의 없다.
이런 변화는 지난해 한국 기업들의 실적에 악영향을 미쳤다. 삼성전자, SK 등 수많은 대기업들의 매출이 전년 대비 감소했다. 큰 폭으로 매출이 떨어지며 100대 기업 명단에서 이름이 사라진 기업들도 있다.
한국의 수출을 책임지는 ‘버팀목’이자 ‘대들보’ 역할을 해온 기업들이 흔들리자 ‘한국 경제 시스템 위기설’도 고개를 들고 있다.
재계에서는 과거 1998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당시가 떠오를 정도로 경영이 어렵다는 얘기가 들린다. 숱한 어려움을 극복해낸 경험이 있는 한국 기업들이지만 이번에 엄습한 위기의 파고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는 설명이다. 과거에는 위기란 공감대가 있었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정서적 합의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마저 없다는 게 더 큰 위기인지도 모른다.
2024년 한경비즈니스가 선정한 100인 CEO들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의 어깨에 한국 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위기 극복’과 ‘새로운 미래 개척’이라는 과제를 함께 지고 있는 CEO들. 대한민국 대표 CEO 100인이 내세운 ‘경영 키워드’를 통해 한국 경제의 미래를 살펴봤다.
경영 키워드 1
제로 베이스 경영으로 ‘새 혁신’“1등을 하면 누군가 추격해 오고 있기 때문에 위기이고 1등을 못하면 생존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위기다.”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한 말이다. 그는 항상 위기를 강조했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때도 “작은 구멍에도 댐이 무너질 수 있다. 세계의 모든 기업이 삼성전자를 경계하고 추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 땀이 난다”는 말도 했다.
이런 위기에 대처하는 이건희 회장의 선택은 10년 후 먹거리 준비와 이를 실행할 사람이었다. 항상 “10년 후 무엇을 먹고살지 고민한다”는 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이를 위해 사람을 준비하라고 했다.
“한 명의 천재가 1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왔다. 천재를 삼성에 데리고 오라”며 경영진을 압박했다. 또 “자신의 후임을 준비하지 않는 경영자는 미래가 없는 경영자”라며 인재를 양성하라고 했다.
이제 이건희 회장은 삼성에 없다. 이재용 회장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 뉴 삼성의 틀을 잡아가고 있다. 올해 삼성의 기조는 전열 재정비다. 그동안 온갖 재판으로 제대로 경영을 챙기지 못한 이재용 회장이 본격적인 뉴 삼성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워밍업이다.
현재 삼성의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 삼성이 보여준 숫자와 전문가들의 우려는 ‘역대급’이라고 할 만하다. ‘캐시카우’였던 반도체 사업의 기술적 주도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15조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이 회장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2주간 미국 전역을 누비며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등 현지 빅테크 수장들과 만나며 삼성의 미래를 점검했다.
이 회장은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며 “삼성의 강점을 살려 삼성답게 미래를 개척하자”고 짧은 소감을 전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조만간 이 회장이 아버지의 바통을 이어받아 ‘제2의 신경영’을 선언할 것이라는 예상도 제기된다. 삼성이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혁신이 필요한 시점인 만큼 이 회장이 직접 나서 새로운 미래전략을 제시할 때가 왔다는 이유에서다.
이 회장의 ‘뉴 삼성’을 현실화할 삼성 CEO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대세가 된 ‘인공지능(AI)’ 역량 강화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AI 기능을 대폭 강화한 가전제품은 물론 ‘AI스마트폰’을 선보였다. 이 중에서도 갤럭시 ‘AI스마트폰’은 모처럼 시장에서 ‘삼성다웠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AI 기술을 세계 최초로 스마트폰에 접목해 글로벌 시장에서 높은 판매율을 기록하는 등 호평을 받고 있다.
최주선 사장이 이끄는 삼성디스플레이도 올해 업계 최초로 차량용 원형 OLED를 시장에 처음 선보였다. 정교한 레이저 가공 기술 등이 반영된 원형 OLED를 앞세워 BMW 미니(MINI) 등 파격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자동차 제조사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앞으로 이 시장을 새로운 먹거리로 만들겠다는 각오다.
주력 계열사들이 부진한 실적을 기록한 롯데도 제로 베이스 관점에서 혁신을 이뤄내자고 선포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기존 틀을 깨고 원점부터 시작하라”는 특명을 내리고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과거 롯데의 주력사업은 유통과 화학이었다. 바이오, 헬스케어 등을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주목하고 있는 신 회장은 경쟁력 없는 사업 부문은 과감히 정리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임직원들에게 전달하며 롯데그룹 재건에 집중하고 있다.
경영 키워드 2
선택과 집중…미래를 선점하라CEO의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다. 뜰 사업과 저물 사업을 경쟁자들보다 먼저 알아채고 과감히 투자하거나 때로는 발을 뺄 줄도 아는 능력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 20년 전만 해도 게임용 GPU를 공급하는 작은 회사에 불과했던 엔비디아가 시총 1위 기업이 된 것도 젠슨 황 CEO의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AI에 대한 확신을 갖고 뚝심 있게 기술개발을 밀어붙인 끝에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이 됐다.
국내를 대표하는 CEO들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유망산업에 과감하게 베팅하며 새롭게 뜨는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현대차그룹이 대표적이다. 현대차는 더 이상 자동차 제조사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모빌리티 기업’으로의 대전환을 알리며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현대차그룹은 목표 달성을 위해 향후 10년간 전기차 전환을 비롯해 소프트 웨어 중심 자동차(SDV), 로보틱스, 첨단항공모빌리티(AAM) 등 미래 사업 구축을 위해 110조원을 투자하기로 한 상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자동차의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경쟁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엔진 자동차, 하이브리드차, 전기차 등 과거와 현재의 자동차 라인업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은 지난해 좋은 실적을 올리는 힘이 됐다. 완전자율주행 기술과 로보틱스, 항공모빌리티 투자는 미래용이다.
장재훈 현대차 사장은 정의선 회장이 제시한 미래 비전들을 서서히 조직에 입혀나가며 현대차의 체질개선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지난해 어려움 속에도 역대급 실적을 거둔 LG전자도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조주완 사장의 주도 아래 미래 준비가 한창이다. 대표적인 게 전기차 충전사업이다. 미래 먹거리로 점찍고 글로벌 기업과 협업하는 등 외연확장에 나서고 있다. 북미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장해 다양한 국가로 사업을 확대한다. 이외에도 AI, 로봇 등에 손을 뻗으며 2030년 매출 100조원 달성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김승연 회장이 이끄는 한화는 우주경제 시대에 앞장서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우주 발사체에서부터 관측·통신위성, 탐사 등 전반을 다루는 ‘우주 밸류체인’을 구축했다.
신재생에너지도 한화의 미래를 책임질 산업이다. 이구영 한화솔루션 큐셀 부문(이하 한화큐셀) 대표가 이끌고 있는 한화큐셀은 미국 조지아주에 약 3조4000억원 규모의 태양광 밸류체인 생산 시설 ‘솔라 허브’를 구축 중이다. 올해 말 솔라 허브가 완공되면 한화큐셀은 8.4GW의 모듈 생산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북미 기준으로 실리콘 셀 기반 모듈을 제조하는 기업 가운데 최대 제조기업이 된다. 경영 키워드 3
기업을 알아야 경영도 잘해…내부 인사의 약진
‘유명 컨설팅업체 출신’, ‘글로벌 기업에서 스카우트’. 한때 대기업들 사이에서 이같이 화려한 이력을 가진 CEO들을 모셔오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그만큼 평사원으로 시작해 CEO까지 오르는 경우는 찾기 힘들었다. 간혹 이런 인사가 나오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해당 CEO 앞에는 ‘샐러리맨 신화’라는 수식어가 붙고는 했다.
최근에는 달라진 기류가 감지된다. 회사를 잘 아는 내부 인사들을 새롭게 CEO로 내세우는 기업이 많아진 것이다. 올해도 수많은 샐러리맨 출신 CEO가 새롭게 탄생했다.
내부 인사를 CEO로 세웠을 때의 강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회사 시스템에 빠삭하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침착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둘째, 적응 시간이 빠르다. 이들은 오랜 기간 회사에 몸담아온 경험을 살려 내부의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올해부터 포스코그룹을 이끌게 된 장인화 회장이 대표 격이다. 장 회장은 30년 넘게 포스코에만 몸담아온 정통 ‘포스코맨’이다. 1988년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에 입사한 뒤 포스코 신사업실장, 철강마케팅솔루션실장, 기술투자본부장, 기술연구원장 및 철강생산본부장 등 그룹 내 주요 요직을 모두 거쳤다.
그룹의 핵심 사업과 개선점에 대한 확실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미래 비전을 명확하게 실현해낼 수 있는 적임자로 꼽히며 포스코그룹을 이끌게 됐다.
오종훈 SK에너지 사장도 있다. 1992년 SK이노베이션의 전신인 유공에 입사한 그 역시 30년 넘는 세월 동안 SK그룹에만 몸담으며 한 우물을 팠다. 오랜 에너지 마케팅 경험과 기업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SK에너지의 경쟁력을 더욱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신영수 CJ대한통운 대표도 빼놓을 수 없다. CJ제일제당·CJ오쇼핑 인사팀장, CJ인재원 부원장 등을 역임한 그는 CJ에서만 30년 동안 활약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올해부터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CJ대한통운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이외에도 박종문 삼성증권 사장, 구본욱 KB손해보험 사장 등이 평사원에서 올해 CEO가 된 대표 인물들이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