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 열풍 뒤,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현주소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입력 2024-06-30 16:38:09
수정 2024-06-30 16:38:09
“어른이 된다는 건 기쁨이 줄어드는 건가봐.”
어른이 되면 현재의 기쁨을 만끽하기보다 아직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며 불안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 슬픈 사실이 최근 나온 한 줄의 애니메이션 대사 안에 고스란히 담겨 화제가 되고 있다.
6월 12일 국내 개봉한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에 나오는 얘기다. ‘인사이드 아웃2’는 라일리라는 13세 소녀의 기쁨, 불안, 당황 등 다양한 감정을 개별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리고 각 감정들이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행동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는 전작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1편의 국내 관객 수는 497만 명을 기록했다. 2편의 화력은 더욱 거세게 나타나고 있다. 해당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훔친 성인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단숨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그리고 개봉 12일 만에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국내에서 개봉된 역대 픽사 애니메이션 중 최고 흥행 속도이다.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외신들은 “올해 개봉작 중 10억 달러 매출을 돌파하는 첫 번째 영화가 될 것”이란 예측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씁쓸해진다. 해외 애니메이션의 연이은 흥행은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 ‘엘리멘탈’이 한국 극장가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모두 해외 애니메이션이었고 한국 콘텐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극장뿐만 아니라 넷플릭스와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기 순위엔 다수의 글로벌 애니메이션이 꾸준히 올라오지만 그중 한국 애니메이션은 발견하기 어렵다. 글로벌 작품들이 ‘애니메이션=어린이 콘텐츠’라는 인식의 벽을 깨고 흥행 질주를 벌이는 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그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놓여 있다. 저출산 시대, 영유아 콘텐츠에 갇히다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은 과거 ‘만화영화’라고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았었다. 그림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만화나 웹툰과 달리 애니메이션에선 그림이 생생하게 움직인다. 이런 역동성 덕분에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키우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문화 산업 전체로 봤을 때도 애니메이션은 중요한 산업에 해당한다. 해당 애니메이션만을 방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캐릭터·굿즈 등 다양한 사업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덤의 지속력 또한 다른 장르에 비해 강하다. 어릴 때 애니메이션을 즐겨봤던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해당 작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종종 감상하는 경향을 보인다.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의 전성기는 1980년대 말~1990년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국내 대표작들이 이때 잇달아 나왔다. ‘둘리’(1987), ‘떠돌이 까치’(1987), ‘달려라 하니’(1988)부터 ‘날아라 슈퍼보드’(1990), ‘두치와 뿌꾸’(1996)까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작품들이 나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해외 애니메이션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부침을 겪게 됐다. 게다가 어린이들이 TV나 극장에서 만화를 보는 것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게임 등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며 수요가 점차 줄어들게 됐다.
물론 어려운 상황에서도 애니메이션 업계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성과를 꾸준히 내기도 했다. ‘뽀롱뽀롱 뽀로로’(2003), ‘꼬마버스 타요’(2010), ‘신비아파트’(2014)는 동심을 사로잡으며 열풍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이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고도 험하다. 가장 큰 문제점은 ‘확장성’ 부족이다. 한국 시장에선 영유아 대상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없다. 갈수록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만큼 영유아에만 집중하게 되면 산업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 같은 문제를 업계에서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인사이드 아웃’, ‘스즈메의 문단속’과 같은 성인 대상의 애니메이션 제작은 활발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성인 관객과 국내 애니메이션 사이엔 큰 거리감이 생겼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3 애니메이션 산업 백서’에 따르면 국산 애니메이션을 관람하지 않은 이유를 조사한 결과 ‘외국산보다 재미없어서’가 45.9%, ‘대부분 유아용 애니메이션이라서’가 45.4%로 나타났다. 물론 ‘마당을 나온 암탉’(2011)부터 ‘태일이’(2021),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2023) 등 의미 있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대중적으로 널리 확산되진 못했다.
이는 한국 웹툰 시장이 성인을 대상으로 해 폭발적 성장을 이뤄낸 것과도 대비된다. 그 규모의 차이는 숫자로도 확인할 수 있다. 웹툰 중심의 한국 만화 시장의 규모는 2022년 기준 2조6240억원으로 애니메이션 시장(9210억원)의 2.84배에 달한다.
웹툰과 달리 플랫폼 변화에도 적극 대응하지 못했다. 해외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플랫폼 OTT에 편승해 국내외 시청자들에게 대규모로 공급되고 있다. 디즈니플러스를 통해선 디즈니와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극장에서도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귀멸의 칼날’ 시리즈, 지브리 애니메이션 등 일본 작품 역시 다수의 OTT에서 공급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은 OTT라는 커다란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올라타지 못한 채 잊혀져 가고 있다. ‘어른아이’를 위한 애니+새로운 투자 전략 절실
과연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인사이드 아웃’의 성공 비결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의 1편은 어린 소녀 라일리의 머릿속을 기쁨·슬픔·버럭·소심·까칠이라는 다섯 감정의 캐릭터로 표현했다. 2편에선 라일리가 13세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느끼는 낯선 감정들을 캐릭터로 추가해 확장을 이뤄냈다. 불안·당황·따분·부럽이라는 캐릭터로, 그중에서도 불안이를 대표적인 감정 캐릭터로 내세웠다. 기쁨이가 앞장서 활동하던 소녀의 머릿속을 불안이가 지배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은 사람의 감정을 단순하게만 바라보지 않는다. 소녀에게 불안은 꼭 나쁘게만 작용하지 않는다. 불안이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기 때문에 여러 변수와 최악의 상황들을 모두 가정한다. 그리고 이에 맞춰 다양한 전략과 계획을 세워 라일리를 돕는다. 하지만 지나치게 불안이 커지면서 현재의 기쁨은 저 뒤로 밀려나게 된다.
이뿐만 아니다. ‘인사이드 아웃’은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되새기며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만 하는 것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라는 점,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과 기억이 결합해 나라는 사람을 만들고 완성시킨다는 메시지까지 안겨준다. 그렇게 이 작품은 성인 관객들의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할 투자 전략 또한 필요하다. 특히 국내 업체들은 대부분 영세하다 보니 시장의 규모를 키울 수 있는 묘안이 절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애니메이션 산업이 발달한 일본에서 1990년대부터 적용하고 있는 ‘제작위원회’ 시스템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 위원회는 여러 애니메이션 관련 업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되면 각각 제작비를 나눠 투자한다. 수십, 수백억원에 달하는 제작비 부담을 십시일반 분담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익이 나면 그 수익 역시 투자 비중에 맞춰 나눈다. 이 과정을 통해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어 국내외에 유통시키고 그 성과를 골고루 나눠 갖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국에도 이 같은 투자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하나의 든든한 성장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어른이 되면 달라진 몸에 맞춰 마음의 크기도 자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몸만 커졌을 뿐 마음은 여전히 공고히 자라지 못한 ‘어른아이’일지 모른다. 그 대표적 특징은 기쁨보다 불안을 품고 산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취업 걱정을, 취업을 하고 나면 결혼과 노후 준비를 생각하며 늘 알게 모르게 불안을 느끼는 성인이 대부분이다. 이 어른아이들의 지치고 고된 마음을 애니메이션만큼 잘 달래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앞으론 한국 애니메이션도 어른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