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돌풍’이 만든 한국 정치 콘텐츠 시장의 전환점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드라마 돌풍 포스터 / 자료=넷플릭스


“미래를 약속하는 자들을 믿지 마라. 어떤 미래가 오든 자신이 주인이 되려 하는 자들이다.” 새롭고 밝은 미래를 열겠다던 정치인들의 숱한 약속. 하지만 국민과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따로 있었던 것일까. 한국 정치사를 통틀어 봤을 때 그 약속을 믿고 지지했던 국민들에게 정작 돌아온 것은 희망보다 실망, 기쁨보다는 고통인 경우가 많았다. 이 대사는 지난 6월 28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돌풍’에 나왔다. 대사엔 그동안 국민들이 느껴온 정치에 대한 염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 국내 콘텐츠 시장에서 정치 드라마의 인기와 영향력은 다소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정치 드라마 ‘돌풍’은 그 전환점이 되고 있다. 이 드라마는 공개 직후부터 한국 넷플릭스 시리즈 부문 1위에 올랐다. ‘돌풍’은 정의를 구현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통령 시해까지 시도하는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 분), 한때는 정의로웠지만 가족의 부정부패를 계기로 타락한 정치인이 된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 분) 사이의 팽팽한 대결을 그렸다. 현실정치 속 첨예한 이해관계를 다뤄 관련된 다양한 논란도 불거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오랜만에 국내 시장에서 화제가 되는 정치 드라마가 나왔다는 점, 정치 콘텐츠 활성화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정적이다. 현실정치 이야기에 ‘다크 히어로’를 더하다
해외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정치 드라마는 꾸준히 제작되어 왔다. 1980~90년대엔 1981년 ‘제1공화국’을 시작으로 ‘제2공화국’, ‘제3공화국’ 등으로 이어진 ‘공화국 시리즈’가 있었다. 2000년대 이후엔 ‘시티홀’(2009), ‘대물’(2010), ‘프레지던트’(2010), ‘어셈블리(2015), ‘보좌관’(2019) 등이 나왔다.

하지만 한국 정치 드라마는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진 못했다. 미국의 ‘웨스트윙’, ‘하우스 오브 카드’, ‘지정생존자’, 일본의 ‘체인지’ 등이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과 대비된다. 한국 정치 드라마엔 일정한 패턴이 반복됐는데 이 방식은 국민들이 가진 정치에 대한 생각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기존 작품 대부분은 이상적인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을 그렸다. 그리고 그가 고난을 극복해 나가며 자신이 꿈꾸던 새로운 미래를 펼쳐 보이는 과정을 담았다. 물론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오늘날 현실정치는 이런 인물들 대신 정쟁만이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이런 정치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 같은 패턴이 반복된 배경엔 한국 사회 특유의 분위기가 작용했다. 한국은 분단의 역사로 인해 진영 간 갈등이 심하다. 지역·세대·성별의 대립도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지나치게 첨예하고 뜨거운 정치적 논쟁이 오가는 분위기에서 드라마를 통해 현재의 정치 문제를 광범위하고 심도 있게 다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제작진 입장에서 각종 논란과 정치적 공격을 감수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것이다.

반면 ‘돌풍’은 이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오늘날 한국의 현실정치를 정면으로 다룬다.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다양한 모습, 정경유착, 남북한 문제, 각 진영 간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면서도 판타지적 요소를 활용하여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기존 정치 드라마와 달리 이 작품에선 절대적인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인 박동호는 정의 구현이라는 거대하고 이상적인 목표를 갖고 있지만 대통령을 시해하고, 당대회 선거인단을 조작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악행을 저질러서라도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은 후 이를 모두 껴안고 자폭하려는 것이다. 즉 박동호는 영웅에 해당하긴 하지만 선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다크 히어로’이다.

시청자들은 현실정치 이야기를 통해 공감을 하면서도 다크 히어로 설정 안에서 새로운 쾌감을 느끼게 된다. 박동호의 친구이자 국회의원이었지만 누명을 쓰고 자살을 한 서기태는 “네 꿈은 뭐야”라는 박동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돌풍. 다시 시작하고 싶다. 숨 막히는 오늘의 세상 다 쓸어버리고.” 그리고 훗날 박동호는 서기태의 꿈을 대신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다크 히어로가 되어 돌풍을 만들어낸다. 시청자들은 그런 박동호에 감정을 투영하고, 정치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나아가 이 작품 대사엔 곳곳에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정치 혐오와 염증도 녹아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만 이 나라에 빛은 없다. 어둠이 더 큰 어둠을 상대하고 있을 뿐”,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 아니야. 더 큰 거짓말이지” 등 박동호의 냉소적인 대사는 오늘날 국민들이 정치와 정치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일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돌풍’을 보다 보면 통쾌함과 동시에 씁쓸함이 느껴진다. ‘돌풍’에선 정치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권력 다툼, 극단적인 사건과 갈등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면 궁극엔 ‘국민들이 원하고 꿈꾸는 이상적인 정치, 그리고 정치인은 없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남게 된다. 그 차갑고 안타까운 현실까지 작품 안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한국판 ‘웨스트윙’ 탄생을 기다리며
앞으로 정치 드라마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정치 콘텐츠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새로운 플랫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발전하면서 정치 콘텐츠가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넷플릭스의 ‘돌풍’뿐 아니라, 웨이브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등 정치 드라마가 나왔으며 쿠팡플레이의 예능 ‘SNL’의 코너 ‘주기자가 간다’ 등에서 정치 풍자가 이뤄지기도 했다.

과거엔 TV 지상파 채널을 통해서만 방영이 되다보니 정치적 표현에 한계가 있었다. 다양한 심의 규정과 정치적 논란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다 보니 정치 드라마의 대안으로 사극이 부각되는 측면도 있었다. 현실정치를 다루는 부담을 피해 조선시대 등 오랜 역사 속 인물이 고난을 극복하고 영광을 누리는 것을 재현하는 데 그친 것이다. 하지만 OTT에선 보다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지면서 정치 콘텐츠도 이전보다 강력한 날개를 달게 됐다.

그럼에도 한국 정치 드라마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콘텐츠 시장의 중심에 서고, 발전을 거듭하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돌풍’이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긴 했지만 분노와 갈등을 심화하고 분출하는 방식으로 드라마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특별한 정책적 고민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에서도 ‘웨스트윙’처럼 장대한 서사와 호흡으로 거대 담론을 다루는 작품이 탄생해야 한다. ‘웨스트윙’은 미국 제43대 대통령 ‘조사이어 에드워드 제드 바틀렛’(마틴 쉰 분) 재임기를 그린 작품으로 1999~2006년에 걸쳐 시즌7까지 방영됐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를 관통하는 것은 물론 복잡한 국제정치 문제까지 정교하고 섬세하게 담아냈다. 아쉽게도 ‘웨스트윙’처럼 정책적 고민을 풀어내고 다각도로 정치 역학을 담아낸 작품을 한국 시장에선 아직 찾아볼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본래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국가 없이도 살 수 있는 자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거나 아니면 인간 이하의 존재이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기대가 매번 실망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정치와 결코 멀어질 수 없다. 정치는 개개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국가의 존속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정치 드라마를 비롯한 정치 콘텐츠 또한 계속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 국민들이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한국 정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한국판 ‘웨스트윙’이 언젠가 탄생하길 기대한다.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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