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글씨 하나로 공무원이 된 이 남자의 직업 '필경사의 세계' [강홍민의 굿잡]

인사혁신처 4대 ‘필경사’ 김동훈 주무관

인사혁신처 4대 ‘필경사’ 김동훈 주무관.


‘붓으로 밭을 간다’는 뜻의 필경사. 컴퓨터가 발전하기 전에는 각 부처기관을 비롯해 관공서 등 글을 쓰는 필경사가 많았지만 지금은 귀하디귀한 직업으로 변모했다.

2009년부터 15년 째 임용과 승진, 퇴직 등 공직자들의 임명장을 작성해 온 인사혁신처의 4대 필경사 김동훈 주무관을 만났다. 그를 통해 필경사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필경사’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가요.
“필경사는 ‘붓으로 밭을 간다’는 뜻으로, 주로 붓으로 글을 쓰는 직업을 두루 칭하는 명칭입니다. 제가 인사혁신처에서 맡고 있는 임명장 작성 업무의 정확한 명칭은 ‘인사기록 전문경력관’입니다. 주 업무는 대통령 명의 임명장 작성 및 교부, 국새 및 대통령 직인 날인, 대통령 친수, 국무총리 전수 임명장 수여식 행사 준비 및 진행, 임명장 작성기록대장관리시스템의 현황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정도 하셨어요.
“2009년 12월에 인사혁신처로 임용됐으니 올해로 14년 7개월째입니다.(웃음) 제가 4대 필경사입니다.”

필경사가 흔치 않은 직업이라 지원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대학에서 서예를 전공하고 중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무렵 우연히 만난 선배로부터 필경사 모집을 듣게 됐어요. 알아보니 공무원에 흔치 않은 직업이라 왠지 멋있어 보여 지원했는데, 운 좋게 합격했죠.”

임명장은 1년에 몇 장정도 적나요.
“2009년 입사하고 이듬해 1년 간은 약 2700장 정도 적었어요. 최근 들어선 연 5000장 정도 작성하고 있어요.”

갈수록 느는군요.
“그렇죠. 아무래도 정부부처나 산하기관들이 늘어나고 신규 임용이나 퇴직하는 분들도 임명장을 받다보니 매년 늘어나고 있어요.”



필경사는 인사혁신처에만 있나요.
“아닙니다. 행정안전부에 표창장과 훈장을 쓰는 필경사도 있습니다. 저희도 이번에 신입을 채용해 저 포함 두 명으로 늘었어요.(웃음)”

필경사가 쓰는 임명장의 기준이 있나요.
“보통 5급 공무원부터 대상자예요. 그리고 임용이나 위촉, 전역 등 정부에서 하는 인사에 관련된 임명장은 모두 해당됩니다.”

듣기론 2005년 즈음 직접 쓰는 임명장이 아니라 프린트로 바뀐 적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당시 대통령명의가 아닌 장관 명의로 프린트를 해준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 MB정부 때 공무원들의 사기진작 차원에서 대통령명의로, 5급부터 필경사가 쓰는 걸로 바뀌었죠.”

아무래도 직접 쓴 임명장을 받으면 느낌이 다르겠죠.
“그렇지 않을까요.(웃음) 일단 손글씨가 따뜻하고 감성적이잖아요. 정성스레 쓴 손글씨와 국새, 대통령 직인까지 들어가니 받는 분들이 공무원으로서의 자긍심이 생긴다고 들었어요.”



임명장 의뢰부터 작성법도 있을 것 같아요.
“각 부처기관에서 공문으로 임명장을 요청하는데요. 요청받은 내용을 정리해서 날짜를 체크하고, 급한 건부터 먼저 작성을 해둡니다. 그리고 작성 전에 직제부터 소속기관, 이름, 내용 등을 확인하는 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저희는 법령에 나와 있는 부처(기관)만 작성을 하거든요. 또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실수가 나올 수 있어 기관과 내용 검토는 필숩니다.”

혹 내용이 다르게 온 적도 있나요.
“간혹 있어요. 각 기관마다 담당자들이 다르고 또 바뀌다 보니 웬만하면 안 믿어요. 그래서 직접 확인을 해야 하죠.”

작성 시 어떤 준비물이 필요한가요.
“임명장 용지와 붓, 벼루, 먹, 먹물만 있으면 됩니다. 보통 먹을 갈 땐 10~15분 정도 갈아야 뭉치지 않고 잘 써지기 때문에 미리 갈아두는 편이예요. 쓸 때는 들어갈 내용의 (글)자수를 보고 크기를 조절해 씁니다.”

실제 쓸 때는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겠는데요.
“그렇죠. 서예를 할 때도 호흡이 중요하거든요. 임명장도 마찬가지예요. 먹물을 묻히고 쓰기 직전 호흡을 멈춰 다 쓴 다음 다시 호흡을 하는 방식이에요. 군대에서 총을 쏠 때 호흡을 멈추는 것처럼 말이죠.”

호흡이 길어야 좋겠군요.
“아무래도요. 이 일을 오래하다 보니 호흡이 길어진 것 같기도 해요. 숨 참기는 자신 있습니다.(웃음)”

바쁜 시기가 있을 것 같아요. 언제인가요.
“6월 말부터 8월 초까지, 그리고 11월부터 연말까지가 임용·퇴직·승진 시즌이라 가장 바쁩니다. 지금이 딱 그 시기죠. 7~8월이 휴가기간인데 전 한 번도 이 시기에 휴가를 가 본적이 없어요.(웃음)”

그 시기 땐 컨디션 관리를 잘해야겠네요.
“체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하루에 수십 장을 같은 자세로 몇날며칠을 적다보면 체력소진이 생각보다 빨리 오거든요. 그리고 몇 해 전에는 거북목으로 디스크 치료를 받기도 했어요. 의사선생님이 약을 오래 먹는 것보다 운동을 하는 게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하시기에 그때부터 틈날 때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필경사를 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요.
“기본적으로 서예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글서예 궁서체와 반흘림체의 기본적인 자형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두 글자체를 조합해 어울리게 작성할 수 있어야 하죠. 임명장의 특성상 일반적인 서예작품처럼 큰 붓이 아닌 작은 붓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세필을 익숙하게 다루는 능력도 필수예요. 또 전통적인 서예작품의 세로쓰기와 달리 임명장은 가로 쓰기를 하거든요. 세로로 쓰는 한글서예는 상하 글자체의 조화와 흐름을 중요시 하는 반면, 임명장 서체는 가로로 한글 서예를 작성하기 때문에 자간, 장평 등을 원하는 대로 조절하고 어울리게 작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론 엉덩이 힘이 중요한 것 같아요. 오래 앉아서 글을 쓰는 직업이라 엉덩이가 가벼우면 못하죠.(웃음)”

인사혁신처 필경사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나요.
“인사혁신처 필경사는 공개경쟁채용시험으로 선발하고 있는데요. 국내에 서예 관련 자격증은 아직 없기 때문에 서예 관련 학위나 경력 등을 보유하고 있는 분들이 지원할 수 있어요. 절차는 서류전형, 역량평가, 면접을 거쳐 선발하게 됩니다. 참고로 역량평가 땐 종이만 제공을 해줍니다. 그래서 붓이나 벼루는 직접 들고 와야 해요.(웃음)”

최근에 신입 필경사를 채용했어요. 경쟁률은 어느 정도였나요.
“한 50대 1정도인걸로 알고 있어요.”



왠지 필경사는 고가의 붓이나 벼루를 쓸 것 같은데, 어떤가요.
“붓은 소모품이라 한 50장에서 100장 정도 쓰면 바꿔주는 편이에요. 벼루도 그리 비싸진 않아요. 한 4~5만 원 정도. 그 대신 먹은 좋은 걸 써야 해요. 보통 한지가 날씨에 따라 습기를 머금는 정도가 달라져서 잘 갈리는 좋은 먹을 쓰고 있어요.”

기억에 남는 임명장이 있나요.
“이 일을 하면서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분들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그래서 화재현장에서 안타깝게 순직하신 소방관들의 뉴스를 접하면 그 분의 직급을 먼저 확인합니다. 직급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혹여나 추서(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이들에게 내리는 훈장)를 준비해야 할 수 있으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거죠.”

이야기를 들어보니, 직업적 보람도 클 것 같네요.
“보통 임명장은 집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을 해두잖아요. 그걸 보고 가족들은 기뻐하실 테고요. 그걸 생각하면 기분이 참 좋아진답니다.”

직업병이 있다면.
“직업병이라고 해도 될 진 모르겠지만 항상 정해진 임명장 용지에 부서명과 직급 등을 작성하다 보니 노트필기나, 메모를 할 때도 미리 들어갈 글자 수를 정한 뒤 일정한 간격으로 글자를 쓰는 버릇이 있어요. 그리고 1줄 안에 최대한 글자를 맞춰 넣어 작성하려는 버릇도요. 메모지에 일상적인 메모를 해놓고 줄 간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씩 다시 작성한 적도 있습니다.”

향후 필경사의 직업적 미래는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보시나요.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에는 인공지능 기술이 더욱 다양한 업무에 사용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그렇지만 전통방식의 붓글씨나 임명장에 찍는 대한민국 국새 등의 가치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에 있어 더욱 귀해지지 않을까요. 한 자 한 자 정성으로 작성한 임명장을 수여 받은 공무원들이 명예와 자긍심을 가지고 대한민국 발전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직자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지금과 같이 손으로 직접 작성한 임명장은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당일 김동훈 주무관이 직접 적은 '강홍민의 굿잡'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사진=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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