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된 혁신의 상징과 사라진 신예, 나몰라라 정부까지…환장의 삼박자 [위기의 판교①]

[커버스토리 : IT 산업의 위기, 위기의 판교]


네카라쿠배당토직야.

주술같은 이 용어는 지금 세계를 주름잡은 ‘M7’처럼 2021~2022년 한국에서 가장 핫했던 기업들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과거 삼성, 현대차에 대한 관심이 새 시대의 주역들로 옮겨가면서, 많은 기업들이 이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주제도 다양했다. 차별화된 기업문화, 대기업 못지않은 복지혜택과 억대 연봉, 인재 모시기 경쟁까지…. 코로나19와 함께 찾아온 비대면 시대, 정보기술(IT) 기업의 몸값은 급등했고 투자는 이어졌다. 개발자는 귀하신 몸이 됐고, 연봉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IT 기업이 밀집한 판교 일대는 인재와 자본이 밀려들었다. 2000년대부터 지켜온 ‘IT 강국’의 이름값답게 한국의 미래도 IT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다.

그러나 2, 3년의 시간과 함께 화려한 시절도 막을 내리고 있다. 다음은 판교에서 일하는 젊은 직장인의 이야기다.

“시장 상황이 안 좋은 건 알았지만 티몬·위메프가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줄은 정말 몰랐어요. 문제는 티메프뿐만이 아니란 거예요. 시장 자체가 위기예요. IT 채용문 닫힌 지는 꽤 됐어요. 티메프 사태가 터지고 나니까 이 여파가 IT업계 전반의 도미노 위기로 흐르진 않을까 늘 노심초사해요.”(판교 커머스업체 개발자 A 씨)

“동기들을 만나면 서로 ‘살아남자’란 이야기를 하곤 해요. 며칠 전엔 ㄱ사 재무회계 팀원들이 줄줄이 퇴사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주니어급까지 권고사직하고 자금 부서는 팀이 날아갔다는 거예요. IT 보릿고개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막막해요.”(판교 IT업체 회계팀 B 씨)

최근 IT업계 분위기는 삭막하다. 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 당근, 토스, 직방, 야놀자 등 초대형 테크기업부터 판교를 무대로 하는 게임업체들까지. 한국 경제의 미래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성장 기업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는 IT업계, 나아가 한국 경제의 불확실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고성장 플랫폼 비즈니스의 위기“기존 강자들은 혁신을 통해 성장을 지속하고 새로운 기업들은 더 새로운 아이디어로 강자들을 위협한다. 강자들은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더 빠르게 세상에 없던 영역으로 진출해 또 다른 시장을 창출한다.”

산업계에서 이런 걸 선순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봤을때 2024년 한국 IT산업에서 선순환은 실종됐다고 표현할 수 있다.

혁신의 상징이었던 기존 강자들은 진화의 방향을 혁신과 동떨어진 기존 대기업으로 잡은 듯한 모습이며, 이들을 위협할 작지만 강한 새로운 기업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스타 기업의 탄생을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할 정부는 지원 예산마저 줄이며 스타트업 생태계를 통째로 흔들고 있다.

기존 강자들의 상황부터 살펴보자. 한때 한국의 혁신을 담당했던 인터넷 대표기업 네이버·카카오는 올해 들어서만 주가가 각각 29.78%, 32.23% 하락했다.

‘성장의 폭주기관차’였던 카카오는 지난 2022년부터 경영진의 스톡옵션 주식 단체 매각 등 도덕적 해이로 브레이크가 걸리더니 지난 8월 8일엔 ‘SM엔터테인먼트(SM) 시세조종’ 혐의를 받는 창업주 김범수 경영쇄신위원장이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김 위원장의 구속은 향후 한국 IT산업의 역사에서 중요한 장면으로 기록될 확률이 높다. 그 내용이 ‘혁신의 몰락’일지 ‘타살된 혁신’일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SM엔터테인먼트 시세 조종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아 온 김범수 카카오 경영쇄신위원장이 22일 오후 서울 양천구 남부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2024.7.22 임형택기자

창업주의 충격 소식이 전해진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8월 14일엔 간편결제서비스 자회사인 카카오페이에서 악재가 터졌다. 카카오페이가 중국기업 알리페이에 지난 6년여 동안 4000만 명이 넘는 이용자의 개인신용정보 542억 건을 고객 동의 없이 넘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알리페이는 카카오페이의 2대주주다.

또 다른 IT 공룡 네이버에서도 새로운 서비스가 나온 지는 오래됐다. 그래서 찾은 출구인 글로벌 비즈니스 성장 또한 가로막혀 있다.

네이버의 핵심 자회사인 라인은 일본과 ‘데이터 지정학’ 갈등을 빚고 있다. 언제 일본이 경영권을 빼앗아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또 하나의 성장축인 네이버웹툰은 2분기 ‘어닝쇼크’를 기록하며 실적 기지개를 켠 모회사 주가까지 끌어내렸다.

6월 27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서 네이버 웹툰엔터테인먼트의 나스닥 상장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팬 사인회에서 김준구 웹툰엔터테인먼트 대표, 김규삼, 조석, 손제호 등 네이버 웹툰 작가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네이버웹툰 제공.

지난 7월 네이버웹툰이 나스닥 시장에 상장하며 글로벌 비즈니스 확대에 나섰으나 2분기에만 7660만 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하며 주가는 공모가(21달러) 대비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네이버는 2분기 시장 평균 전망치를 웃도는 실적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네이버웹툰의 어닝쇼크에 주가가 하락했다.

일각에선 최근 주가 약세에 대해 웹툰엔터를 시작으로 네이버파이낸셜도 상장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 경우 이른바 ‘쪼개기 상장’으로 주주이익을 해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유통업계의 공룡이 된 쿠팡은 미국 시장 상장에 성공한데 이어 2022년 8년 만에 흑자를 기록하며 성공스토리를 쓰고 있다. 소셜커머스로 출발선이 같았던 티몬 위메프와 달리 쿠팡은 유통업계에서 향후 존재감을 더 키울 전망이다. 철저한 서비스 마인드로 무장한 덕분에 고객들의 평가는 여전히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객 외에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평가는 약간 다르다. 이 문제가 쿠팡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 블랙리스트 논란, 공정거래위원회 제재 등 암초가 그것들이다.

특히 ‘쿠팡 랭킹순’ 검색 순위를 조작해 소비자의 자체 브랜드(PB) 상품 구매를 유도한 행위로 공정위가 부과한 과징금 1628억원은 국내 유통업계에 부과된 과징금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쿠팡은 지난 2분기(4~6월) 처음으로 분기 매출 10조원대를 기록했지만 역대 최대 규모의 과징금이 선반영되면서 2년 만에 적자전환했다. 2022년 3분기(7~9월·7742만 달러) 처음 흑자를 낸 후 8개 분기 만의 적자다.

다른 플랫폼 기업들의 상황도 썩 좋지 않다. 국내 배달 앱 시장의 절대강자로 군림하는 배달의민족은 경쟁사와의 출혈경쟁에도 유일하게 흑자를 내며 성장 중이지만 최근 중개수수료를 인상해 모회사인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의 배만 불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때 대표적인 유니콘 기업으로 주목받았던 부동산 플랫폼 직방은 무리한 인수합병(M&A)과 부동산 경기 악화 등의 영향으로 3년째 적자를 면치 못하면서 투자금 회수 우려를 키우고 있다.

토스(비바리퍼플리카)와 야놀자 등은 상장을 앞두고 있지만 최근 티메프 정산 지연 사태로 ‘플랫폼 비즈니스’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기업가치가 급감하는 등 IPO 계획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으로 알려졌다. 비상장주식을 거래하는 증권플러스 비상장에 따르면 비바리퍼플리카, 야놀자의 장외 몸값은 지난 7월 석 달 전인 4월과 비교해 8.0%, 11.5% 하락했다. 같은 기간 중고거래 플랫폼인 당근도 19.5% 빠졌다.

업계에선 2010년대 경제성장의 동력이었던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이 한계에 부딪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계획된 적자’ 모델을 말한다. 대규모 마케팅으로 이용자를 확보한 이후 이들을 통해 서서히 수익을 늘려가는 아마존의 성공 모델이다. 하지만 이 방식이 더 이상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있다. 아마존은 돈을 벌기까지 9년이 걸렸다. 하지만 아마존 성장기보다 훨씬 변화가 빨라진 현재 시장에서 이렇게 장기간 기다려줄 투자자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일까. 플랫폼 스타트업에 대한 국내 투자는 줄고 있다. 민간 비영리업체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발표한 ‘플랫폼 스타트업 투자 동향’에 따르면 플랫폼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2021년 3분기 전체 스타트업 투자 금액의 55.7%에 달했으나 작년 4분기 8.9%까지 떨어졌다. 반토막도 아닌 4분의 1토막이다.

플랫폼 비즈니스를 지탱하는 건 결국 첫 흑자를 낼 때까지의 버팀목인 투자자금이기에 플랫폼 스타트업 시장에서 신예 유니콘을 만나기는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 티메프 사태로 플랫폼 비즈니스에 대한 규제 움직임이 확대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8월 14일 국민의힘 세미나에 참석해 “플랫폼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독과점 고착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며 플랫폼 규제 논의에 힘을 실었다.

증권가 전망도 불투명하다. 임희석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하반기에도 인터넷 업종은 지지부진할 전망”이라며 “전반적인 사업부의 낮아진 성장률이 단기간에 회복되기란 어려운 상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허리띠 졸라맨 판교의 기둥일부 게임업체들은 2분기 준수한 실적을 발표했다. 크래프톤처럼 주가가 올 들어 상승반전에 성공한 회사도 있다. 하지만 상당수 업체는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다. 많은 게임업체들이 실적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며 생존 게임이 시작됐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올초부터 8월 14일까지(YTD) 게임주 주가를 살펴보면 크래프톤(71.23%)과 펄어비스(17.03%), 넷마블(8.78%)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주가 하락세를 보였다.

특히 게임업계 맏형 격인 엔씨소프트는 이 기간 21.87% 하락하며 게임주의 하락을 주도했다. 최대 캐시카우인 ‘리니지M·리니지2M·리니지W’ 등 모바일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의 매출이 줄어 어려움을 겪은 탓이다. 2분기 실적도 우울하다. 이 회사 매출은 16.2% 감소한 3689억원, 영업이익은 74.9% 줄어든 88억원을 기록했다.

지난 7월 상장 후 엔씨소프트를 밀어내고 시가총액 3위에 자리한 시프트업은 주가가 한 달 새 12.89% 빠졌다. 카카오게임즈 역시 신작 흥행에 실패하면서 새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주가도 연초부터 지금까지 31.14% 하락하며 게임주 시가총액 톱5 중 하락폭이 가장 컸다. 2분기 영업이익도 지난해 2분기보다 89.4% 줄어들며 반등 기회를 잡지 못했다.

기타 게임주의 실적은 더 형편없다. 같은 기간 위메이드(-47.45%), 네오위즈(-24.39%), 컴투스(–23.65%) 주가가 두 자릿수 하락을 면치 못했다.

이러한 주가 변동은 게임산업 전반에 걸친 어려움을 반영한다. 2021년부터 짧은 영상의 숏폼 콘텐츠 이용 시간이 게임 이용 시간을 추월하면서 게임업계가 직격타를 맞았다. 여기에 MMORPG 장르의 비중이 높은 한국과 달리 중국 게임 제작사들이 가볍게 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을 선보이면서 국내 게임사의 위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환경적 변화 외에도 확률형 아이템으로 게임 이용자에게 과도한 과금을 유도한 것은 게임사가 자초한 위기이기도 하다.

한국 게임업계를 지탱했던 한 축인 PC방도 제2의 위기를 맞았다. PC에서 모바일 시대 전환이 1차 위기였다면 2020년 코로나 이후 대면산업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PC방의 1만 시대가 끝났다. 2019년 12월 1만102개에서 2024년 4월 현재 PC방의 수는 7584개로 지속 하향세다.

상황이 이러한데 넥슨을 시작으로 게임업계 전반을 휩쓴 ‘집게 손’(남성 혐오를 뜻한다고 알려진 손가락 모양) 논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넥슨의 경우 2분기 실적과 주가 모두 선방했지만 남성과 여성 이용자 모두에게서 각기 다른 이유로 이미지 회복이 쉽지 않다.
사진=챗GPT

게임업계는 전방위적 악재를 구조조정과 신작, 해외진출 등으로 풀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구조조정은 당장의 비상구다.

연초부터 엔씨소프트는 자회사인 엔트리브소프트를 폐업하기로 했고 ‘소울워커’를 개발한 라이언게임즈는 개발자 60여 명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했다. 라인게임즈는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출시 한 달 만에 개발팀을 해체했다.

해고와 폐업은 상반기가 지난 지금 더 본격화됐다. 보릿고개를 넘는 엔씨소프트는 8월 14일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엔씨큐에이·엔씨아이디에스 등 2개 분사 법인의 설립 안건을 가결했다. 오는 10월 1일 출범하는데 본사에서 신설 법인으로 이동하는 직원만 360여 명이다. 이번 분사는 본사 고정비 감축과 인력 효율화를 목적으로 이뤄졌다. 이 회사는 올초에만 임원 20%를 줄였고 권고사직 등을 통해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다. 작년 말 기준 5023명인 본사 인력을 연내 4000명대 중반까지 줄인다는 계획이다.

구조조정은 인건비 부담이 준다는 점에서 주가엔 호재로 작용한다. 증권가에서 게임주를 하반기 선호주로 꼽는 이유도 그래서다.

그러나 서슬 퍼런 칼바람에 직원들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엔씨소프트가 신설회사를 폐업하거나 매각에 나서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엔씨 측은 “(그러한 경우) 본사로 재고용할 것을 약속한다”고 못 박았지만 구두 약속인 만큼 이를 명문화해 달라는 노조 측의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구조조정이 반드시 기업 경쟁력 향상으로 나타나리란 보장도 없다. 인재가 곧 IT업계의 핵심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핵심 경쟁력 탈출 러시, IT의 미래는 지난해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오는 2027년까지 국내 AI 분야 연구개발 인력 수요는 6만6100명이다. 그러나 공급 가능한 예상 인력은 5만3300명으로 1만2800명이 부족할 전망이다. 같은 기간 클라우드 분야 역시 6만2600명이 필요하지만 공급은 4만3800명에 그쳐 1만8800명이 부족할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AI 인재난은 전 세계가 겪는 문제다.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는 “현재 AI업계에서 벌어지는 인재 전쟁이 자신이 경험한 것 중 가장 치열하다”고 표현할 정도다.

한국의 인재난은 유독 심각하다. 스탠퍼드 인간중심 인공지능연구소(HAI)가 매년 공개하는 연례보고서 ‘AI인덱스 2024’에 따르면 전 세계 채용 플랫폼인 링크드인에 등록된 1만 명당 AI 인재 이동 지표는 -0.3을 기록했다. AI 인재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해외로 빠져나갔다는 의미다. 2020년 0.3이었던 이 지표는 2021년과 2022년 낮아졌고 지난해에는 큰 폭의 마이너스를 나타냈다. 인재 이동 지표는 룩셈부르크(3.67)와 아랍에미리트(1.48) 순으로 높고 미국은 0.40이다.

이는 예견된 미래였다. 미국 경제 주간지 포브스는 지난 2018년 9월 ‘한국이 AI 부문의 리더가 될 수 있는가’란 제하의 기획기사를 통해 “한국은 인재가 부족해 중국을 따라가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SPRi) 또한 2022년까지 4차 산업혁명을 이끌 개발자 3만1833명이 부족할 것이란 내용의 보고서를 2018년에 내놓았다. 6년 전 미래를 예견했으나 대처하지 못한 셈이다.

새로운 기술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정부와 투자자들의 움직임도 활발하지 않다.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2020 국가 AI 이니셔티브 법’을 제정하고 상원은 반도체와 AI 등의 기술개발 및 생산에 2500억 달러 집중 지원 내용을 담은 ‘혁신 경쟁법’을 통과시키며 지원에 나서고 있다.

한국에서는 카톡도 라인도 글로벌 비즈니스의 한계에 봉착했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카톡과 라인을 넘어설 제2, 제3의 유니콘이 하루가 멀다고 생겨난다. 채팅앱 시장만 봐도 이런데 AI 시장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AI 기술의 기반이 되는 ‘파운데이션 모델’은 지난해 미국이 109개로 가장 많이 개발했고 중국과 영국이 각각 20개와 8개로 뒤를 이었다. 아랍에미리트도 4개를 개발했다. 이들 중 스탠퍼드 연구소가 주목할 만한 AI 모델로 선정한 108개 중에는 미국이 61개, 중국 15개, 프랑스 8개였지만 한국은 ‘제로(0)’였다.

우수인재와 기술을 뒷받침하는 건 자금. AI에 대한 민간 투자 규모는 미국(672억 달러)이 1위를 기록했고 중국(72억6000만 달러)이 뒤를 이었으나 한국(13억9000만 달러)은 조사 대상 중 9번째였다. 이도 국가 규모에 비하면 많은 게 아니냐 반문할 수 있지만 규모가 점점 줄고 있다는 게 문제다. 한국은 2022년에는 31억 달러로 6번째였는데 1년 새 투자액이 절반 이상 줄어들면서 3계단 뒤로 밀렸다. 그사이 미국은 22% 증가했다.

한국의 투자는 여전히 겨울이다. 작년 정부는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삭감하며 인재들의 사기를 꺾어버렸다.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아보겠다는 연구자들의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IT 산업 발달의 토대가 되는 기초과학 인재들이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은 한국 IT 업계에 큰 좌절감을 안겼다. 케이 조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교수는 지난해 7월 열린 ‘제1회 세계한인과학기술인대회’에 연사로 참석해 정부와 과학기술계에 “한국 과학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젊은 인재의 유출을 막는 일이 급선무”라고 일침을 놨다.

정부가 부랴부랴 다시 예산을 투입한다고 했지만 한 번의 헛발이 업계에 준 타격은 상당하다. 기초과학 연구원들 사이에선 “복구하는 데 수십여 년이 걸릴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한국의 창업 생태계도 비틀거리고 있다. 스타트업 정보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투자 유치 이력이 있는 스타트업 6191곳의 올 상반기 전체 고용 인원은 18만482명으로 지난해 말 대비 1.2% 줄었다. 이들 기업의 올 상반기 입사자는 4만5348명, 퇴사자는 4만5452명으로 104명이 순유출되는 ‘데드크로스’ 현상이 발생했다.

더브이씨가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한 2016년 이후 스타트업들의 퇴사자 수가 입사자 수보다 많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더브이씨는 “최근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침체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한 스타트업들이 신규 채용 규모를 대폭 줄이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원사격에 나서도 모자랄 마당에 정부는 지원금 삭감에 나섰다. 정부의 대표 창업지원사업인 팁스(TIPS)의 공식 운영기관인 엔젤투자협회는 최근 팁스 지원금 지급이 연말까지 중단된다고 관련 스타트업들에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업은 민간 투자사가 초기 기술기업에 선투자하면 정부 자금을 매칭(최대 5억원)하는 것으로 지난해 시작해 내년(2025년) 종료되는 599개 과제가 대상이다.

플랫폼 자율규제로는 독과점의 폐해를 막을 수 없다며 국회에서 추진 중인 ‘온라인플랫폼법’(이하 온플법)도 업계의 성장을 옥죄는 규제로 꼽힌다. 온플법이란 플랫폼 사업자가 중개 서비스의 거래 조건 등을 담은 계약서를 입점 업체에 제공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구매 강제 등을 불공정거래 행위로 규정해 제재하는 안이다.

업계는 강하게 반발한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성명서를 내고 “온플법이 법제화될 경우 국내 플랫폼 기업의 혁신 시도는 위축될뿐더러 국내 스타트업은 유니콘 기업으로의 성장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지금 정부와 국회는 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논의할 시기가 아니라 국내 기업이 글로벌 빅테크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지원 방안을 강구 할 때”라고 주장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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