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 엇갈린 판단에 줄소송…노사 갈등 증폭 [민경진의 판례 읽기]

2022년 대법 첫 ‘무효 판결’ 이후 1년 새 소송 2배 증가
실효성 논란도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외벽 모니터의 고령자 계속 고용장려금 광고. 사진=연합뉴스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임금을 감액하는 임금피크제 관련 법정 분쟁이 급증하고 있다. 대법원이 2년 전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만으로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판단을 내리자 제도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임금 차액을 돌려달라는 근로자의 소송이 줄을 잇고 있어서다.

법원이 사건마다 엇갈린 판단을 내리면서 임금피크제를 두고 기업과 근로자들의 혼란이 증폭되고 있다. 고령자 고용 안정을 위해 도입된 임금피크제가 노사 갈등의 원인으로 고착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1년 새 두 배 늘어난 임금피크제 소송

대법원 판결문 열람시스템에 따르면 2023년 임금피크제 관련 소송은 선고일자 기준 213건으로 전년(111건) 대비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1심 사건은 같은 기간 80건에서 187건으로 크게 늘었다. 새롭게 법원에 접수된 사건이 특히 많이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전체 사건도 이미 89건에 달해 연간 기준으로 2022년 수준을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은 2022년 5월 정부 산하 연구원 근로자가 “임금피크제로 받지 못한 임금 차액을 돌려달라”며 낸 소송에서 임금피크제에 대한 첫 무효 판결을 내렸다.

당시 대법원은 △도입 목적의 타당성 △대상 근로자의 불이익 정도 △임금 삭감에 대한 조치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 사용 목적 등에 따라 합리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고령자고용법상 연령 차별에 해당한다는 판례를 내놓았다. 그러자 다른 노동조합과 퇴직 근로자도 잇따라 임금피크제 무효를 주장하며 소송에 나섰다.

노동 전문 변호사들은 “소송의 90%는 회사 측이 승소하고 있다”며 무분별한 소송은 실익이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는 연장 자체로 보상 성격이 있기 때문에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법원에서 연령 차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회사가 승소한 하급심 판례는 꾸준히 쌓이고 있다.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5단독은 최근 삼표시멘트에서 퇴직한 근로자 13명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임금 소송에서 회사 측 손을 들어줬다.

삼표시멘트는 정년을 60세로 연장하고 57세 이상 근로자의 기본급을 30% 감액하는 임금피크제를 시행했다. 이를 두고 원고 측은 “연령을 이유로 차별한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천지법 제11민사부도 최근 인천광역시의료원에서 퇴직한 근로자 5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및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이 사건에서도 법원은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인한 근로자들의 불이익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또 의료원이 단체협약을 통해 도입한 ‘공로 연수제도’로 임금피크제로 발생하는 불이익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고 봤다.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대법원 판례도 추가되면서 임금피크제에 대한 법리적 불확실성도 점차 해소되고 있다.

대법원 2부는 지난 7월 인천교통공사에서 근무한 근로자 21명이 공사를 상대로 낸 임금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1심에선 공사가 승소했지만 2심에서 판결이 뒤집힌 사건이다.

대법원은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을 위해 마련된 공로 연수제도를 통해 정년퇴직 직전 6개월 또는 1년 동안 근로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급여 일부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며 회사의 임금 삭감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인정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사진=연합뉴스


과도한 임금 삭감·절차적 문제에 무효 판단

다만 정년연장형이더라도 임금 삭감 폭이 지나치게 클 경우 임금피크제 효력을 인정하지 않은 하급심 판례도 나오고 있어 기업들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운용하는 하나증권은 올해 5월 근로자가 제기한 임금피크제 관련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최근 쟁점이 비슷한 다른 소송에선 연장 근무에 대한 보상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5월 KB신용정보의 전현직 직원 4명이 제기한 임금 및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에 대해 고령자고용법상 연령차별 금지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무효로 판단했다.

이 사건 재판부도 임금 총액 삭감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고 봤다. 부산지법 제6민사부도 지난 5월 부산시설공단 재직자와 퇴직자 43명이 제기한 임금피크제 소송에서 근로자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임금피크제 시행 전후로 담당 업무, 업무량 등에 대한 조정이 전혀 없는 점을 지적했다.

대부분 기업에서 취업규칙을 통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만큼 임금피크제가 취업규칙의 불이익한 변경에 해당하는지도 쟁점이 되고 있다. 지난해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를 받지 않은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은 무효라는 새로운 판례를 선언하면서 이런 쟁점의 소송도 늘어나는 추세다.

한 노동 전문 변호사는 “단체협약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사안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안에서 취업규칙을 통한 임금피크제 도입이 이뤄졌다”며 “이에 따라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인지 여부를 가장 먼저 다투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대구지법 제14민사부는 지난해 4월 퇴직 근로자 5명이 대구경북능금농업협동조합에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에서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할 때 갖춰야 할 절차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며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최진수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근로자 측에서 재판 과정에서 절차적 하자를 부각하는 사례가 많다”며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대한 근로자 과반수 동의 절차 등 세부적인 사항이 쟁점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돋보기]
“노사 갈등 새 불씨 될라” 우려도

임금피크제는 2013년 법률 개정으로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면서 수반된 조치다. 임금피크제의 유형은 정년을 보장하되 정년 이전 일정 시점부터 임금을 조정하는 ‘정년보장형’과 정년을 연장하는 조건으로 정년 이전부터 임금을 조정하는 ‘정년연장형’, 정년 퇴직자를 계약직으로 재고용하되 정년 이전부터 임금을 조정하는 ‘고용연장형’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면 고령 근로자의 고용 안정을 강화하고 기업의 인건비 부담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시행 초기부터 당초 취지와 달리 노사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노동조합들도 매년 단체협약을 앞두고 임금피크제 폐지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임금피크제 폐지를 고려하는 기업도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300명 이상 사업체 가운데 임금피크제를 운용하는 사업체 비율은 2019년 54.1%에서 2022년 51%로, 100명 이상 사업체는 같은 기간 41.8%에서 39%로 줄었다.

최근 정부의 국민연금 의무가입 상한 연령 상향 검토 등으로 정년 연장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임금피크제 실효성에 대한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정부는 최근 국민연금개혁 추진 계획을 밝히면서 의무가입 연령을 현행 59세에서 64세로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지금도 본인이 원한다면 64세까지 국민연금을 납부할 수 있지만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직장 가입자의 경우 사업주가 절반을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의무가입 연령을 올린다면 기업의 정년도 높여야 하고 현행 임금피크제 또한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임금피크제의 실효성이 없을 경우 결과적으로 이를 사용하는 사업장도 점차 사라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사·정 공감대 속에 추진된 임금피크제가 경직된 노동법제도와 법원 판결로 그 취지가 몰각되고 오히려 노사 갈등의 원인으로 전락하고 있다”며 “평균수명 증가와 급격한 고령화를 고려해 현실에 맞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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