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셜플랜’ 규모의 2배…유럽 경쟁력 미래 담은 ‘드라기 보고서’ [유럽의 쇠퇴, 한국의 미래]

[커버스토리]


9월 9일 유럽에 문제의 보고서가 발표됐다. 일명 ‘드라기 보고서’. 경제학자이자 은행가인 마리오 드라기는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로서 유로존을 구했다고 찬사를 받은 인물이다.

약 1년 전 그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로부터 ‘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작성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EU의 경쟁력과 번영을 유지할 수 있는 해법을 드라기의 시각으로 찾아달라는 임무였다.

오랜 시간 비공개로 작성된 이 보고서는 지난 9일에야 공표됐다. 약 400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청정기술, 반도체, 국방 분야에 이르기까지 10개의 주요 경제 부문에서 EU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와 정책적 해법을 담았다.

드라기는 “EU의 글로벌 경쟁력이 ‘실존적 위험’에 직면했다”며 “시급히 산업전략을 선회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미국,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연간 7500억∼8000억 유로(1114조∼1188조원)의 신규 투자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EU 국내총생산(GDP)의 4.4∼4.7%에 달하는 규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유럽 재건 원조 계획인 ‘마셜플랜’ 규모가 GDP의 1∼2%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배가 넘는 비율의 공격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제언한 것이다.

이날 제안 중 일부는 오는 11월 이후 출범하는 ‘폰데어라이엔 2기’(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재선) 정책 수립 시 어느 정도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당수가 27개국의 만장일치 합의가 필요한 데다 일부 사안의 경우 EU 내 회원국 간 입장차가 크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논란의 드라기 보고서를 소개한다. 1. EU GPD의 약 5% 투자해야 드라기는 유럽의 경제 재건을 위해 전후 재건 사업에 맞먹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EU 집행위원회의 최신 추정치에 따르면 매년 최소 7500억 유로에서 8000억 유로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며 이는 2023년 EU GDP의 4.4%에서 4.7%에 해당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약 22% 수준의 투자 비율을 27%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이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후 유럽에서 본 적 없는 수준이다.

드라기는 이를 통해 유럽이 현재의 낮은 생산성과 저성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경제 문제를 넘어 유럽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론적 도전’이란 주장이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이렇게 GDP의 약 5%에 해당하는 지속적인 EU 투자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한 결과 15년 내에 생산량을 약 6% 증가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인플레이션 압박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압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화될 것이란 분석도 덧붙였다.

문제는 이러한 투자가 꽤 도전적이란 데 있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생산적 투자의 약 80%는 민간 부문에서 이루어졌으며 나머지 20%는 공공 부문이 차지했다. 시장 자금만으로 GDP의 약 4%에 해당하는 민간 투자를 실현하려면 직접적인 정부 투자 외에도 민간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재정적 인센티브가 필요할 전망이다. 이미 반대의견도 나왔다. 독일 재무장관 크리스티안 린트너는 독일이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2. 첨단기술 규제완화 해야보고서는 유럽이 규제완화 등을 통해 첨단기술 분야를 키워야 한다고 봤다. 유럽의 성장 잠재력 부족이 기술 기반 혁신 벤처, 특히 딥테크 기업에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드라기는 “디지털 기업들은 이질적인 요구 사항, 규제 기관의 난립, 그리고 개별 EU 국가 당국이 EU 법률을 강화하는 ‘골드 플레이트’ 현상 때문에 EU 전역에서 자회사를 운영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고 주장했다. 골드 플레이트란 국가가 EU에서 도입한 규제나 법률을 자국에서 더 엄격하게 적용하거나 강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현재 EU에는 약 100개의 기술 관련 법률과 모든 회원국에서 활동하는 270개 이상의 디지털 네트워크 규제 기관이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AI 스타트업 자금의 61%는 미국 기업에, 17%는 중국 기업에 유입되며 유럽 기업에는 단 6%만이 유입된다. 양자 컴퓨팅의 경우 유럽 기업이 전 세계 민간 자금의 5%를 유치한 반면에 미국 기업은 50%를 유치했다. 이 결과 “지난 50년간 시가총액이 1000억 유로(약 148조원) 이상인 유럽 기업은 나오지 않았으나 시가총액 1조 유로(약 1480조원) 이상 미국 기업은 6개가 나왔다”는 게 보고서 내용이다. 3. 탈탄소화 선도해야 ‘탈탄소화’가 피할 수 없는 목표라면 EU에서 강력한 기준을 만들고 선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냈다. 드라기는 “EU의 탈탄소화 목표는 경쟁국들보다 더 야심차다”며 “이러한 차이는 EU 기업들이 직면하고 있는 단기적인 투자 요구를 경쟁사들이 겪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격차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EU는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최소 55%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구속력 있는 법률을 도입했다. 반면 미국은 2005년 대비 50~52% 감축이라는 비구속적인 목표를 설정했고 중국은 2030년 말까지 탄소 배출이 정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신에 탈탄소화는 유럽이 에너지 가격을 낮추고 청정기술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으며, 동시에 에너지 안보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특정 EU 지역은 비용 경쟁력이 높은 재생 가능 에너지원에 대한 높은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남유럽의 태양광 및 북부와 동남부의 풍력이 그 예다.

유럽의 재생 가능 에너지 배치는 이미 증가하고 있으며 2023년 기준 EU의 최종 에너지 소비 중 약 22%가 재생 가능 에너지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중국의 14%, 미국의 9%에 비해 높은 수치다. 그는 “비록 유럽이 디지털 혁신에서는 약세를 보이지만 청정기술 혁신에서는 선도적인 위치에 있다”며 “이는 기회로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고서에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EU로 수출하는 역외 기업에 부과하는 탄소 배출 세금)를 역내 기업 보호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기준을 따르지 않는 역외 기업에 불이익이 돌아가도록 만들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4. 핵심 기술에 대한 대외 의존도 줄여야핵심 기술에 대한 대외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드라기는 특히 “외부 압력에 덜 취약해짐으로써 EU는 더 많은 의사결정 자율성을 얻게 될 것”이라며 “독립성과 비용 사이의 잠재적인 상충을 피하려면 유럽의 협력이 필수적이다”라고 썼다.

예컨대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하는 데도 수천억 유로의 새로운 지출이 필요하다. 드라기는 이러한 투자는 유럽이 가장 효율적인 공급자들로부터 구매하지 않게 되어 단기적으로는 경제 비용 압력을 증가시킬 수 있으나 투자의 ‘옵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기적 전망이다.

방위와 우주 분야도 마찬가지다. 드라기는 “유럽 방위산업이 새로운 수요를 충족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면 모든 회원국은 더 안전해질 것”이라며 유럽 방위산업 및 우주항공에 대한 투자 규모 확대를 강조했다.

특히 보고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년 2월)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조달이 이어지고 자체 방위력 강화에도 주력하는 상황인 만큼 해당 분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선 무기 구매에서 유럽의 대외 의존도가 지나치다고 봤다. 2022년 6월~2023년 6월 EU가 무기를 사는 데 지출한 비용은 약 750억 유로(약 111조원)인데 이 중 약 78%가 EU 밖에서 쓰였다. 특히 63%가 미국으로 흘러갔다. 보고서는 “유럽에 비슷한 제품이 있는데도 외부에서 구매가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고 짚었다.

무기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도 미흡하다고 진단했다. 전체 방위비에서 연구개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기준 약 4.5%다. 미국(약 16%)의 3분의 1 수준이다. 보고서는 “(2022년 6월~2023년 6월) 무기 주문 중 15%는 미국이 아닌 비(非)EU 국가에서 발생했다”는 내용도 담았다. 비EU 국가는 한국도 포함된다.
드라기 보고서의 서문
“유럽은 21세기 초부터 경제성장 둔화에 대해 우려를 가져왔다. 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이 도입되었으나 추세는 변화하지 않았다. 특히 생산성 성장 둔화가 주된 원인으로, 미국과 EU 간 GDP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2000년 이후 미국에서는 1인당 실질 가처분소득이 유럽의 약 두 배에 달하는 속도로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성장 둔화는 큰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유럽의 수출업자들은 특히 아시아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했으며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증가로 노동력이 경제성장에 기여했다. 2008~2012년 경제 위기 이후 유럽의 실업률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며 사회복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

또한 EU는 글로벌 무역의 확대와 미국의 안보 지원 덕분에 국방 예산을 다른 우선순위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급격한 세계 무역 성장 시대가 지나고 EU 기업들은 해외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감소하며 해외 경쟁이 심화됐다. 게다가 러시아로부터 에너지 공급이 끊기고 지구적 정치적 안정성이 약화되고 있다.

기술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유럽은 인터넷 혁명과 그로 인한 생산성 향상의 혜택을 놓쳤다. 특히 신흥 기술 분야에서 뒤처지고 있으며 세계 상위 50개 기술 기업 중 유럽 기업은 단 4개에 불과다. 동시에 유럽의 성장 필요성은 증가하고 있다.

2040년까지 매년 약 200만 명의 노동인구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유럽은 생산성에 더 의존해야 한다. 2015년 이후의 평균 생산성 성장률을 유지하더라도 EU는 2050년까지 GDP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그칠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화, 탈탄소화, 국방력 강화에 필요한 새로운 투자를 감당하려면 더 높은 성장률이 필요하다.

유럽의 경제를 디지털화하고 탈탄소화하며 국방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GDP의 약 5%에 해당하는 추가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1948~51년 마셜플랜의 추가 투자와 비교할 때 매우 큰 규모다. 유럽이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면 기술, 기후 책임, 독립적인 국제적 역할 중 일부 또는 전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것이다.

이것은 ‘존재론적 도전’이다. EU의 기본 가치는 번영, 평등, 자유, 평화, 민주주의이다. 만약 유럽이 이러한 기본 권리를 국민에게 제공할 수 없다면 유럽의 존재 이유는 사라질 것이다. 이 도전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성을 높여 성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유럽은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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