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속도·규제·난민’, 유럽 쇠퇴의 키워드 [유럽의 쇠퇴, 한국의 미래②]

[커버스토리 : 유럽의 쇠퇴, 한국의 미래]


그러니까 모든 위기의 시작은 고령화다. 한국에선 가까운 나라 일본의 사례에 귀기울이지만 유럽은 일본과 쌍벽을 이루는 고령화 사회다.

‘늙은’ 유럽은 수년간의 지속된 경제 침체와 생산성 저하의 늪에 빠져들었다. 수십 년간 곪아 있던 병약한 유럽에 카운터 펀치를 날린 건 2020년대 전대미문의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이었다. ① 취업자와 은퇴자 비율, 3대 1에서 2대 1로
39세와 44세.

미국과 유럽의 평균 중위 연령이다. 중위 연령이 높을수록 노동 가능 인구의 비율은 감소하기 때문에 이는 곧 미국과 유럽의 경쟁력을 보여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생산성 증가와 인구 증가에 힘입어 강력한 성장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성장엔진은 꺼진 지 오래다. 유럽연합(EU)의 노동생산성은 1945년 미국의 22% 수준에서 1995년 95%까지 상승했지만 그 이후로는 미국보다 더 큰 폭으로 둔화되어 다시 미국의 80% 이하로 떨어졌다.

유럽은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인구의 순증이 국내총생산(GDP) 성장을 뒷받침하지 않는 시기에 진입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40년까지 EU 노동인구는 매년 약 200만 명씩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취업자와 은퇴자 비율은 3대 1에서 2대 1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아기울음 소리는 듣기 어려워진 지 오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2021년 영국과 프랑스의 합계출산율은 각각 1.53명과 1.80명이다.

OECD 38개 회원국 중 한국 다음으로 출산율이 낮은 이탈리아는 작년 상반기 신생아 수가 전년 동기 대비 3500명 감소하면서 출산율이 2022년 1.24명에서 2023년 1.22명으로 내려앉았다. 이탈리아의 연간 신생아 수는 2009년부터 14년째 감소세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작년 9월 저출산 예산으로 10억 유로(약 1조4000억원)를 책정하고 저출산을 국가의 존속을 위협하는 시급한 국정 과제로 삼았다. 이 나라의 성장은 2018년 이후 정체됐다.

‘저출산 고령화’ 경로를 유럽 정부가 틀지 못한다면 유럽의 성장은 정체될 것이 틀림없다. 날고 기어도 본전이다. 2015년 이후 평균 노동 생산성 증가율인 0.7%를 유지한다면, 2050년까지 GDP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분석했다.

② 영국 경제학자 “가난 받아들여야”“유럽 사회를 보면 ‘뚱뚱하고, 멍청하고, 행복하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네덜란드 ASML의 CEO를 역임한 피터 베닝크의 지적은 일본과 유럽의 고령화를 비교할 때에도 의미가 있다. 고령화 비율은 일본이 더 높다. OECD 국가의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은 평균 17.1%로, 일본은 28.4%로 1위다. 프랑스는 20.2%로 8위, 스웨덴은 19.9%로 10위, 영국은 18.5%로 21위이다. 4개국 중 노인인구 비율은 일본이 가장 높고 영국이 가장 낮다. 한국의 노인인구 비율은 14.9%로 29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정부 지출은 유럽이 압도적이다. OECD 공공사회복지지출(SOCX)의 GDP 대비 비율은 평균 20.0%인데 4개국 중 프랑스가 31.0%로 1위다. 스웨덴은 25.5%로 8위, 일본은 22.3%로 13위, 영국은 20.6%로 17위에 있다.(한국의 SOCX 비율은 12.2%로 35위를 기록 중이다. 노인인구 비율보다 SOCX 비율의 순위가 낮다.)

유럽의 세금은 다른 부유한 나라에 비해서도 높은 편이다. GDP의 약 40~45%에 해당하는 반면 미국은 27%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성장이 이어지지 않는 한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중위 연령이 높아질수록 의료서비스, 연금제도 등 공공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다. 고령인구가 많아질수록 이를 지원하기 위한 재정 부담이 늘어나며 이는 젊은 세대가 감당해야 할 부담으로 이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성장에 고금리는 유럽 경제에 치명타를 입혔다. 영국 중앙은행의 수석 경제학자 휴 필은 지난해 4월 영국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더 가난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 모두 더 나쁜 처지에 있다”고 말하며 임금 인상으로 가격 상승을 상쇄하려고 하면 인플레이션이 더 심해질 뿐이라고 말했다.

노동자의 선망인 짧은 근로시간도 지금에 와서는 유럽 생산성을 저해하는 문제가 됐다. 2022년 OECD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1822시간으로 OECD 회원국 평균(1719시간)보다 길었다.

반면 영국은 1516시간, 프랑스는 1427시간, 독일은 1295시간으로 OECD 37개국 중 가장 낮았다. 기계화나 자동화가 진행된 사회에서는 근로시간과 생산성이 반비례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기계화나 자동화 수준이 엇비슷하거나 보다 더 발전된 미국과 유럽의 비교에서는 짧은 근로시간과 생산량 차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질 것이란 의견이 많다.

노르웨이의 기금 책임자인 니콜라이 탕겐은 지난 4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그저 더 열심히 일할 뿐인 반면 유럽인들은 야심이 덜하고 위험을 더 회피한다”고 말했다. 다수의 비판에 직면했지만 에릭 슈밋 전 구글 CEO도 최근 한 강연에서 “성공하는 스타트업들은 지옥처럼(like hell) 일을 한다”며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분이 졸업하고 스타트업을 만든다면 직원들이 일주일에 하루만 출근하고 재택 근무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유럽의 정체된 GDP 성장과 맞물려 결국 공공 부채 수준을 지속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 수 있다”며 “유럽의 다양한 목표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③ 놀부가 된 미국, 흥부가 된 유럽규제 환경도 미국과 유럽의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 친환경에 더 앞장서는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는 기후 위기에 의구심을 표하며 친환경 정책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그는 선거유세 과정에서도 전기자동차를 공격하며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표적 기후 관련 정책을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EU는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최소 55%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구속력 있는 법률을 도입한 반면 미국은 2005년 대비 50~52% 감축이라는 비구속적인 목표를 설정했고 중국은 2030년 말까지 탄소 배출이 정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선택은 전체 사회나 집단의 이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국가의 이기심으로 당장은 더 큰 수익을 얻을 것이다. 그야말로 유럽 사회가 빠진 ‘죄수의 딜레마’다.

기술 부문에서도 유럽의 규제 장벽은 미국, 중국보다 높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EU에는 약 100개의 기술 관련 법률이 있으며 모든 회원국에서 디지털 네트워크와 관련해 270개 이상의 규제 기관이 활동하고 있다.

예컨대 AI 법안은 특정 수준 이상의 컴퓨팅 파워를 초과하는 일반 목적의 AI 모델에 추가 규제 요구 사항을 부과하는데 일부 최첨단 모델은 이미 임계값을 초과하고 있다. 미국, 중국에 비해 EU 기업을 불리하게 만드는 대표적 이유다.
④유럽에서 또 일어난 전쟁도 타격고령화 복지 부담이 후천적인 원인이라면 지정학적 문제는 유럽이 미국과 비교해 후퇴할 수밖에 없는 선천적 위기를 낳았다. 최근 유럽은 두 개의 주요 전쟁이 주변 지역에서 벌어지면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전쟁들은 각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의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으로, 지리적으로 유럽과 가까운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은 유럽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에 중요한 에너지 공급원이며 이 전쟁은 에너지 가격의 급등과 함께 공급망 붕괴를 초래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와 석유 공급이 중단되거나 제한되면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에너지 위기에 직면했고 이는 에너지 비용의 급격한 상승으로 이어져 유럽의 산업 생산성이 하락하고 소비자물가가 크게 오르는 데 일조했다. 한편으론 농산물의 주요 생산국인 우크라이나에서 곡물 수출이 차단되면서 식량 안보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이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유럽 경제에 심각한 불안정을 가져온 것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난민 문제도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난민 유입은 유럽 국가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며 사회적 및 정치적 불안정을 촉진시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유럽으로 피란을 떠났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전체 난민의 52%가 시리아, 우크라이나, 아프카니스탄 3개국에서 나왔다. 주요 수용 국가는 튀르키예, 이란, 콜롬비아, 독일 등이다.

EU의 과도한 환경 규제 등에 반발해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농민들의 규탄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벨기에 왈론지역의 젊은농민연맹(FJA)이 2024년 1월 28일 나무르주 인근 고속도로를 막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난민을 받아들이는 비율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난민을 돕는 자금 대부분이 유럽 곳간에서 나왔다. 유엔난민기구의 자금은 대부분 자발적 기여로 이루어지고 75%는 정부 및 EU로부터 왔다. 3%만이 다른 정부다. 막대한 비용지출에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는 사회적 서비스와 공공 자원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의료, 교육, 주택 등의 분야에서의 수요 급증은 예산 부담을 가중시키며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 내부에서 난민 수용 문제가 단순한 인도적 지원을 넘어 유럽의 사회 기반시설과 경제적 안정성에 대한 도전 과제가 되고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한국과 유럽, 가까운 미래
‘PIGS’라는 오명 속에서도 이탈리아는 여전히 G7에 속한 경제 강국이다. 이탈리아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한국보다 높으며 한국보다 성숙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때 한국에서는 1인당 GNI가 이탈리아를 넘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특히 2018년에 한국이 ‘3만 달러 시대’에 도달하면서 기대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실제로 2020년에는 한국의 GNI가 일시적으로 이탈리아를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코로나19 쇼크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었고 2021년 이후 이탈리아는 1인당 GNI가 한국보다 1020달러 더 높은 수준으로 회복됐다.

이탈리아의 경제는 한국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과 같다. 이탈리아는 한국보다 GNI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이후 경제성장이 정체 상태에 빠졌다. 두 나라는 모두 수년간 ‘4만 달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으며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구조적 저성장이 공통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고령화 수준은 유럽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유럽의 중위 연령이 43~44세인 반면 이탈리아는 46.8세로 고령화가 심각하다.

한국 경제도 이와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01~2005년 5.0~5.2%에서 2019~2020년에는 2.5~2.6%로 떨어졌고 2021~2022년에는 2% 수준으로 하락했다. 잠재성장률이란 국가가 자본, 노동력, 자원을 최대로 활용해 물가상승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성장률을 뜻한다. 세계 최악의 저출산과 고령화는 한국 경제의 성장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이다.

이탈리아와 유럽의 현재 상황은 한국의 미래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저출산과 고령화라는 구조적 문제에 더해 낮은 대학 진학률, 지정학적 위험, 저성장에 빠진 기업, 그리고 미국·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것 또한 공통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각국의 석학들은 경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유럽에서는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의 ‘드라기 보고서’가, 한국에서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이 주목받고 있다. 드라기 보고서는 유럽연합(EU)의 경제 구조적 문제를 정밀하게 분석하며 혁신과 개혁 없이는 더 이상 유럽의 미래가 없다고 경고한다. 이창용 총재 역시 한국 경제의 심각성을 경고하며 “수십 년간 우리는 가계부채 증가, 반복되는 부동산 문제, 미진한 연금 및 노동개혁 문제를 안고 있다”며 “이제는 구조적 개혁을 추진할 시간이 없다”고 강력하게 지적했다.

유럽과 한국은 서로 다른 대륙에 위치하지만 인구 구조의 변화와 경제성장 둔화라는 공통적인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라는 도전 과제 앞에서 이제 한국은 어떠한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