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지수) 종목 100개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시장참여자들의 가치 있는 조언이 시간 낭비가 됐다.”
“밸류업 100이 아니라 그냥 대장주 100을 만들었다.”
한국거래소가 코스피·코스닥 종목 100개로 구성된 ‘밸류업 지수’를 공개하자 국내외 증권가에서 혹평이 쏟아지고 있다.
정부는 이 지수를 활용해 상장지수펀드(ETF) 등 투자 상품을 출시하고 기관투자가 벤치마크 활용을 독려해 증시를 부양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밸류업 지수에 편입된 종목이 정책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밸류업은 17년 동안 한국 증시에 적용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결하고 상장사의 낮은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겠다며 탄생했다.
국내 기업이 스스로 기업가치의 저평가 이유를 분석해 3년 이상 중장기에 걸친 주가 상승 목표를 세우고,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주주친화적인 노력을 통해 적절한 주가를 찾아가면 국가가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내용이다. 밸류업 지수는 이 같은 의지를 보인 기업들을 지수로 묶어 자금을 유입해 증시를 부양하려는 목적이다.
지난 5월 거래소가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기대감이 더 컸다. 공시 가이드라인은 예상보다 체계적이었고 주주환원 기준 역시 재무적 지표와 비재무적 지표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하지만 지난 9월 24일 거래소가 발표한 밸류업 지수는 기업들에 내린 가이드라인보다 평가 기준이 더 엉성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주가 가치가 고평가된 기업들이 대거 포함돼 주가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1. 이미 고평가된 종목…성장성 기대할 수 있을까 iM증권에 따르면 거래소가 발표한 100개 종목 중 PBR 4배 이상인 기업이 17개에 달한다. PBR이 18배에 달하는 한미반도체, 9.8배인 포스코DX 등이 포함됐다.
정부가 발표한 밸류업 지수의 주요 편입요건은 대표성(시가총액), 수익성(당기순이익), 주주환원(배당지급·자사주소각 여부), PBR, ROE 등이었다.
이 중 ‘최근 2년 평균 PBR 상위 50%’라는 기준 때문에 대표 고배당 종목인 KB금융과 하나금융지주는 지수에서 제외됐다. KB금융과 하나증권지주의 PBR은 각각 0.51배, 0.4배다. PBR 1배 미만이면 주가가 재무 상태보다 저평가받고 있다고 본다. 정작 밸류업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배당수익률도 높지만 저평가받고 있는 금융지주는 지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PBR이 어느 정도 높은 기업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고평가될수록 주가 상승 여력은 떨어질 수 있다.
고경범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일반적으로 투자자들이 밸류업을 가치주 관점에서 기대하는 것과 달리 종목 선정 기준에서 이미 고평가된 종목들이 우선순위로 평가됐다”며 “이는 도쿄거래소의 선정 기준을 그대로 답습한 것인데 도쿄거래소는 당시 상장사 절반이 PBR 1배를 하회했기 때문에 이 같은 기준을 둔 것”이라고 말했다.
연기금이나 자산운용사 등 기관이 고평가 종목으로 구성된 지수를 벤치마크로 활용할지 의문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경수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고평가 종목을 매수하는 근거는 미국처럼 해당 국가 및 시장의 중장기 성장성 담보가 핵심”이라며 “밸류업 지수 종목군의 최근 4개 분기 순이익 증가율은 전년 대비 3.7%로 코스피200의 30.6%보다 크게 낮다”고 평가했다.
저성장 시대에 진입한 한국에서 이미 주가가 높다고 평가되는 종목들로 꾸린 지수가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밸류업의 당초 취지에서 크게 벗어나는 대목이다.
이 애널리스트는 “가장 중요한 것은 고PBR 위주의 밸류업 지수를 벤치마크로 추종하는 국내 기관이 있을지 여부”라며 “기존 저평가를 선호하는 기관 입장에서 부담이 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덧붙였다.
외국계 투자은행(IB)들도 잇따라 비판적 보고서를 내놨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이날 기관 고객 대상 투자 노트에서 “종목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며 “밸류업 지수가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거래소가 빨리 깨닫길 바란다”고 썼다. 이어 “밸류업 벤치마크를 뛰어넘는 것은 한국 기관투자가들에게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UBS측은 공식적인 견해가 아닌 직원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입장이다.
홍콩계 투자은행 시엘에스에이(CLSA)도 ‘밸류 다운’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고 “투자자들의 피드백을 반영해 구성 종목을 바꾸지 않는다면 자금 유입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2. 단편적인 주주환원 기준 지수 편입 기준에서 또 다른 문제가 되는 지표는 주주환원이다. 밸류업 지수는 해당 종목이 ‘2년 연속 배당 또는 자사주 소각’을 시행하기만 하면 주주환원으로 판단한다. 배당수익률이나 배당성향은 따지지 않았다.
주식평가이익과 배당 수익을 합해 판단하는 총주주수익률(TSR)은 고려하지 않고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 시행 여부만 판단하는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밸류업’을 판단할 수 있는 핵심 지표가 빠졌다고 지적했다.
지난 5월 거래소가 기업에 교본으로 삼으라고 낸 가이드라인에서는 배당, 자사주 소각뿐만 아니라 TSR 등 다각적인 내용을 주주환원 지표로 제시했다.
이남우 한국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주주환원은 밸류업을 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방법이지 목표가 아니다”며 “기업 성장과 주주환원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을 찾아서 이를 실천하는 과정인데 지수 편입 기준에는 성장성을 측정할 수 있는 핵심 지표가 모두 빠져 논평할 가치가 없을 정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신희철 iM증권 애널리스트 역시 “‘Yes or No’의 이분법적인 주주환원 척도로 인해 주주환원의 질적인 부분은 고려되지 못했다”며 “이번 밸류업 지수에 편입된 개별 종목들을 보면 배당수익률이 2%를 하회하는 종목이 53개로 과반이고 배당성향이 20%를 하회하는 종목 수 비율이 54%로 과반수”라고 분석했다. 배당성향이 10% 미만인 종목도 8개나 포함됐다.
정책의 목적과 달리 지수 편입 기준으로는 주주환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는 기업을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개별 기업 선정 이유에 관한 논란도 있다. 거래소는 PBR 1배 미만, ROE 8% 이상 등의 기준을 뒀던 일본과 달리 PBR과 ROE를 일정한 수치로 평가하지 않고 산업군별 상대적인 평가를 적용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높은 배당률로 ‘밸류업 유망주’로 불렸던 SKT와 KT 등 통신주는 지수에서 탈락했다. 이들은 ‘커뮤니케이션 업종’으로 분류됐는데 ROE 상대평가에서 낙제하며 지수 진입에 실패했다. 해당 업종에 속한 엔씨소프트, JYP엔터테인먼트, 에스엠, 제일기획, SOOP 등 5개 기업의 최근 2년 ROE가 통신주보다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물적분할로 주주들과 갈등을 빚었던 DB하이텍, 소액주주와 경영진 간 갈등이 격화됐던 씨젠은 오히려 지수에 포함됐다.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만 하면 주주와의 이해상충을 겪었음에도 ‘주주환원’ 지표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HMM 인수 때 유상증자를 추진했던 팬오션 역시 밸류업 지수의 취지와 어긋난 종목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두산그룹 지배구조 개편안 발표 당시 주주가치를 침해하는 안을 이사회가 찬성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두산밥캣도 포함됐다. 3. 기업 설득할 ‘당근’ 부족해 밸류업은 기업이 ‘스스로’ 기업의 가치를 올리는 행위다. 오는 11월 출시되는 밸류업 ETF가 흥행하면 기업도 의지를 가지고 주주환원을 확대하는 등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기준으로서는 ‘배당’이나 ‘자사주 소각’ 정도만 시행하면 주주환원을 위한 의무는 다하는 것이다. 밸류업 지수가 ETF가 흥행해도 성과가 크지 않을 수 있는데 성과가 저조하면 프로그램에 참여할 동력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신민섭 DS증권 애널리스트는 “지수 흥행 여부는 기업들의 참여도에 달려 있다”며 “투자자의 참여도를 높일 수 있는 인센티브와 정책적인 지원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남우 회장 역시 “도쿄증권거래소는 CEO부터 임직원 모두가 기업들을 일대일로 만나 설득하는 작업을 거쳤다”며 “기업과 대화하고 기업에 확신을 주는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밸류업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비판이 이어지자 거래소는 각계 의견과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 추이 등을 감안해 내년 6월 정기 변경에 앞서 올해 안에 구성종목을 변경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