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겨울론' 뒤집었다…풍향계 마이크론이 보여준 '반도체 봄'
입력 2024-09-27 05:27:07
수정 2024-09-27 05:27:07
SK하이닉스, 5세대 HBM 양산 시작하며 기술격차 키워
마이크론은 내년 초 양산 예정
모건스탠리의 ‘반도체 겨울’ 보고서 이후 주가가 급락한 국내 반도체 업계에 희소식이 들렸다. ‘메모리 반도체 풍향계’로 불리는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시장 기대를 뛰어넘는 4분기(회계연도) 실적을 발표했다.
발표가 나온 건 한국 시간으로 지난 9월 26일 새벽 5시 30분이었다. 이전까지 마이크론에 대한 국내외 증권가 전망은 부정적이었다.
마이크론은 예상을 뛰어넘고 올해와 내년에 제조될 고대역폭메모리(HBM) 물량이 이미 ‘솔드아웃(매진)’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반도체 겨울론을 순식간에 뒤집은 발표였다. 국내 증시가 열리자 삼성전자는 4%, SK하이닉스는 9% 뛰며 마이크론의 발표에 부응했다.
세계 메모리반도체 3위 기업 마이크론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보다 먼저 실적을 발표하기 때문에 이들의 실적과 투자 규모, 시장 전망이 한국 반도체 기업에도 영향을 준다.
HBM 공급 과잉이 우려된다던 ‘반도체 겨울론’과 달리 메모리 풍향계는 봄을 가리키자 마이크론 주가는 장 마감 후 13% 급등했다. 시장에서는 HBM ‘공급 과잉’ 대신 ‘공급 부족’을 대비하라는 리포트가 나왔다. 모건스탠리의 겨울론에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만한 대목이다. 공급 과잉으로 겨울? AI 수요 짱짱했다이날 마이크론은 2024 회계연도 4분기(~8월 29일) 매출이 77억5000만 달러(약 10조3400억원)로 전년 대비 93%, 직전 분기 대비 14% 증가했다고 밝혔다.
영업이익은 17억4500만 달러(약 2조3300억원)로 직전 분기보다 85% 늘었다. 지난해 4분기와 비교하면 적자에서 큰 폭 흑자전환했다. 주당순이익은 1.18달러로 시장 예상치 범위를 넘어섰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용 칩 판매가 마이크론의 실적을 이끌었다. 4분기 AI 수요와 데이터센터용 수요가 급증하면서 데이터센터용 SSD 매출은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D램과 낸드플래시 제품의 가격 상승도 호실적의 원인이었다. 마이크론의 생산능력(캐파)이 HBM으로 분산되면서 주력하던 메모리 제품의 공급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이들 가격이 상승했다.
회사는 다음 분기 매출 예상치로 증시 전문가들이 내다본 83억 달러를 넘어서는 85억~89억 달러를 제시했다. HBM 공급 과잉 우려에도 선을 그었다. 마이크론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메모리 3강 구도를 이루고 있다. AI용 메모리로 수요가 급증한 첨단 HBM을 생산할 수 있는 기업도 이 3곳뿐이다. HBM은 일반 D램에 비해 가격이 4∼5배 높은 고부가 제품이기 때문에 팔면 팔수록 더 많이 수익을 낼 수 있다.
마이크론은 HBM에 대한 수요가 이어지면서 2025년 물량 공급가가 대부분 정해졌고 이미 매진됐다고 전했다.
HBM 시장은 5배 넘게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마이크론은 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 세계 시장 규모는 2023년 40억 달러(약 5조원)에서 2025년 250억 달러(약 33조원)를 초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실적발표 후 콘퍼런스콜에서 산자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 “2024년 업계의 D램과 낸드 생산 용량이 2022년보다 낮은 데다 업체들이 HBM 생산을 늘리려 기존 D램 용량을 줄였기에 D램 수급 환경은 건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 우려한 D램 공급 과잉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같은 날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는 ‘AI 반도체 공급 부족을 대비하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날 공개한 ‘2024 기술 리포트’에서 “AI 데이터센터용 칩은 2026년까지 수요가 30% 이상 증가하고 AI 기반 기기가 잇따라 출시되면서 스마트폰과 PC 업그레이드 구매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SK하이닉스, HBM3E 12단 양산 시작
마이크론이 ‘반도체 훈풍’을 예고하자 한국 기업 주가도 뛰었다. 같은 날 SK하이닉스는 장 개장 직후 8% 뛰었다. 이후 회사는 바로 HBM3E(5세대 HBM) 12단 제품을 세계 최초로 양산하기 시작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마이크론과의 기술격차를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이날 마이크론은 자사의 HBM3E 12단은 2025년 초부터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며 수율을 끌어올리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했다.
SK하이닉스는 마이크론 실적발표 날에 맞춰 “12단 신제품도 가장 먼저 양산에 성공해 AI 메모리 시장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이어가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반도체 겨울론으로 꺾였던 주가에 힘을 실었다.
SK하이닉스는 양산 제품을 연내 고객사에 공급할 예정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1위인 TSMC와의 동맹도 강화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어 HBM3E 공급을 시작하지 못했다.
이정배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사장)은 최근 임직원들과의 타운홀미팅에서 "절박함을 가지고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며 "경쟁력 회복을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도출됐고, 이젠 실행력이 필요하다"고 AI 반도체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반도체 업계는 차세대 고객 맞춤형(customized) HBM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HBM4 12단을 내년 하반기 양산하고, 2026년에 6세대인 HBM4 16단의 수요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삼성전자도 HBM4를 내년 개발을 완료한 이후 출하를 목표로 하고 있다.
마이크론이 예상을 뛰어넘는 실적을 내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3분기 실적 발표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실적이 발표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향후 주가 방향이 엇갈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SK하이닉스는 HBM 우위를 점한 만큼 내년까지 큰 우려가 없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삼성전자의 경우 당장 10월 둘째주로 예정된 3분기 잠정실적 발표가 고비가 될 전망이다. 증권가에선 최근 삼성전자에 대한 실적 전망치를 대폭 하향 조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삼성전자 3분기 예상 영업이익은 8월 13조6606억원(최소 11조7180억원, 최대 15조2000억원)이었지만 9월 들어선 11조2313억원(최소 9조7000억원, 최대 14조7900억원)으로 17.78%나 하락했다. 연간 영업이익 전망치 컨센서스도 8월 45조3213억원에서 9월 40조8225억원으로 9.93% 하향 조정됐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센터장은 "냉정하게 보면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뺀 메모리 수요는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며 "메모리 비트그로스(bit growth·비트 단위로 환산한 생산량 증가율)가 마이너스에 그칠 가능성까지 고려될 정도"다 라고 분석했다. 유진투자증권은 삼성전자의 올해와 내년 영업이익 추정치를 37.9조원, 48.2조원으로 기존 대비 15%, 25% 낮추고 목표가도 9만1000원으로 17% 하향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