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한 기술”…한국 기업 발목 잡는 ‘은밀한’ 거래[비즈니스 포커스]

[비즈니스 포커스]

최근 가전업계에선 LG전자의 신제품 로봇청소기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가격은 200만원대, 고급형이라 기대를 모았지만 알고 보니 중국과의 합작품. 그마저도 로봇청소기 시장의 최상위 포식자라 불리는 중국 기업들의 주요 제품보다 뛰어난 점을 찾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왔다.

‘백색가전은 LG’라는 자부심이 무색하게 이미 로봇청소기 시장의 선두는 중국에 뺏긴 지 오래다. LG도 삼성도 이 시장에선 2인자에 불과하다. LG·삼성 대표들이 “우리가 늦었다”고 자인할 정도다.

10년 전만 해도 중국은 이 시장에서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중국의 빠른 성장을 가능케 한 계기 중 하나로 2013년 ‘산업스파이’ 사건이 꼽힌다. 한 건의 기술유출이 한국 기업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산업스파이는 지금도 각계 분야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최근 고려아연과 영풍의 경영권 분쟁에서도 기술유출은 핵심 쟁점 중 하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치명적인 공격 ‘기술유출’이 국가경쟁력을 위협하고 있다. ‘1등 중국’ 로봇청소기 산업의 비밀은지난 9월 27일 삼성전자의 산업스파이가 구속기소됐다. 사유는 산업기술보호법 위반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등 혐의.

삼성전자 상무와 D램 메모리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했던 이들은 지난 2019년 중국 지방정부로부터 4000억원 상당의 투자금을 받고 중국 현지에서 반도체 기업 청두가오전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설립 후 1년 반 만에 D램 개발에 성공했고 중국에서 두 번째로 D램 시범 웨이퍼 생산에 성공했다. D램 반도체 공정기술은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도 개발에 4~5년이 걸리는 기술로 삼성전자도 개발비 4조원을 투입했을 정도로 인적자원과 비용이 투입된 핵심기술이었다.

검찰은 이들이 기술을 팔아넘긴 대가로 860억원 상당의 청두가오전 지분을 받고 보수 명목으로 18억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첨단기술 유출의 피해는 막대했다. 검찰은 이들의 기술유출로 삼성전자에 최소 수십조원에 이르는 피해를 줬을 것으로 추산했다.

기술유출 사건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1∼6월) 동안 해외로 유출된 기술과 관련된 범죄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0% 증가했다. 2021년 9건이었던 기술유출 사건은 2022년 12건, 그리고 2023년에는 22건으로 늘었다. 2024년 상반기에만 이미 12건이 적발됐으며 올해도 그 규모는 작년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주목할 점은 유출된 기술 중 상당수가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 국가 핵심기술이라는 것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상반기 유출된 기술 12건 중 4건은 반도체, 3건은 디스플레이, 2건은 배터리 관련 기술로 파악됐다. 10건은 중국 기업에, 나머지 2건은 미국과 이란에 팔렸다.

중국은 유입된 기술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이는 곧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잠식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로봇청소기 시장이다. 지난 9월 6일 열린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 IFA 2024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CEO들은 이례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는 “시간을 놓쳐 후발주자가 됐다”고 했으며 조주완 LG전자 대표이사는 “우리가 늦었다”고 말했다. 로봇청소기 얘기다.

이들이 반성할 정도로 로봇청소기 시장에서 국내 기업의 입지는 좁다. 중국 기업이 과거 샤오미처럼 ‘가성비’로 승부를 낸 것도 아니다. 로봇청소기 시장에서 로보락, 에코백스, 나르왈 등 중국 제품들은 수백만원대 프리미엄급 제품으로 경쟁 중이다. 한국은 중국 로봇청소기 제조사들의 주요 무대다. 2020년 한국에 법인을 설립한 로보락은 2022년 국내 시장점유율 1위로 올라섰고 지난해 상반기(1∼6월)엔 약 7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판매가격이 180만원 전후인 최고가 제품은 홈쇼핑 방송에서 5분 만에 매진될 정도로 인기다.

한국 기업들은 이 시장에 중국보다 먼저 진출했다. LG전자는 2003년, 삼성전자는 2006년에 로봇청소기를 처음 출시했다. LG전자는 1988년부터 로봇청소기 연구를 시작해 1992년 국내 최초로 한국전자전에 시제품을 출품했으며 2003년 국내 업체로는 처음으로 로봇청소기 제품인 ‘로보킹’을 내놨다. 당시 60억원 이상의 개발비용과 30여 명의 연구인력을 투입해 상용화에 성공했다. 2001년 스웨덴의 일렉트로룩스가 세계 최초 상용화에 성공한 뒤 2년 만이었다.

중국의 로봇청소기 시장은 뒤늦게 개화했다. 중국 내수시장의 1인자이자 개척자로 평가받는 에코백스는 2009년에서야 로봇청소기 ‘디봇’을 선보였으며 로보락의 전신인 ‘샤오미 1세대’ 로봇청소기는 2016년에 출시됐다.

그러나 한국 안방을 점령한 건 첨단기술로 무장한 후발주자 중국 제조사였다. 여기엔 2013년 발생한 기술유출 사건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2013년 LG전자 전직 연구원은 중국 가전 회사에 로봇청소기 핵심기술을 고액 연봉과 승용차, 주택, 항공권 등을 받고 팔아넘겼다. LG전자가 10여 년 동안 550억원을 투자한 핵심기술을 중국에 넘긴 것이다. 당시 LG전자 관계자는 “향후 어떤 기술로 발전될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핵심기술이 사용된 제품이라고 보고 있다”고 분노했다. 그로부터 11년 후 LG전자가 야심 차게 선보인 200만원대 플래그십 신제품은 국내 자체 생산이 아닌 중국 기업과의 합작개발생산(JDM) 방식으로 생산됐다. 국가 근간마저 흔드는 기술유출최근 재계를 뒤흔든 고려아연과 영풍·MBK의 경영권 분쟁에도 기술유출은 화두다. 지난 9월 24일 기자회견을 연 이제중 고려아연 부회장은 “MBK파트너스 같은 투기세력이 고려아연을 차지한다면 핵심 기술은 순식간에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고 대한민국의 산업경쟁력은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풍 측은 ‘고려아연을 중국에 매각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나 매각 외에도 핵심기술 판매·공유 등을 통해 고려아연의 핵심 자산을 빼가거나 수익화할 방안이 많다는 점을 MBK가 잘 알고 있다고 고려아연 측은 지적한다.

고려아연이 생산하는 아연, 연, 반도체 소재 등은 국가 산업의 핵심 자원이므로 이들 기술이 유출될 경우 국가 경쟁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우려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고려아연의 일부 고객사들은 사모펀드로 고려아연 경영권이 넘어가면 국내 최고의 기술이 해외로 유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MBK 측은 ‘억측’이란 입장이다.

기술유출의 배후에는 다양한 원인과 동기가 존재한다. 첫째는 금전적 유혹과 개인적 이익을 좇는 내부자의 배신,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산업스파이 활동 등이다.

기술유출은 현대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위협이다. 중국이 근 10년 동안 놀라운 속도로 기술 경쟁력을 강화한 배경에는 한국으로부터 유출된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앞으로 최첨단 기술이 더 중요해진 AI 시대를 맞아 기술 탈취 시도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2018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의 대중 제재에 맞서 기술 자립을 강조한 ‘차보쯔(卡脖子·자체 핵심 기술 부족으로 외부 의존) 기술’이 산업스파이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차보쯔 기술은 총 35개로 반도체, 바이오, 우주항공, 로봇 등이다.

피해를 막기 위해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은 자국의 첨단기술을 보호하고 경쟁국의 산업정보를 수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가정보원의 주요 업무 중 하나도 산업스파이로부터 첨단기술을 지키는 산업보안이다. 국정원은 사안에 따라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을 지원하고 보호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솜방망이 처벌에 산업기술을 유출하는 행위는 매년 줄어들지 않고 수법은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지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산업기술 유출 사건에서 실형이 선고된 비율은 단 10%다. 정부는 지난 7월 1일부터 영업비밀 유출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 최대형량을 해외유출은 9년에서 12년으로, 국내유출은 6년에서 7년 6개월로 늘렸다. 또 8월 21일부터 영업비밀 침해 때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를 손해액의 3배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5배까지로 확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선진국에 비하면 약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미국의 경우 ‘경제스파이법’을 통해 특정 요건에 해당하는 기술유출을 간첩 행위로 간주해 중형에 처한다. 피해액에 따라 최고 36등급까지 상향할 수 있고 이 경우 188개월(15년 8개월)에서 최대 405개월(33년 9개월)의 징역형을 내릴 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과 최대 경쟁관계에 있는 대만은 군사·정치영역이 아닌 경제·산업분야 기술유출도 간첩행위에 포함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국가 핵심기술을 중국, 홍콩, 마카오 등 해외에 유출하면 5~12년의 유기징역과 500만~1억 대만달러(약 42억원)의 벌금에 처해진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이재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세계 각국과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산업기술 해외 유출로 인한 피해액이 2020년 이후 약 23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강력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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