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짓기는 하는데…‘중진국 함정’에 발목 잡힌 K-건설[한국 15대 산업 경쟁력 리포트-건설]

초고층 건물 현장의 타워크레인 모습. 사진=삼성물산

1인당 국민소득(GNI) 4만 달러를 바라보는 지금, 한국은 ‘중진국 함정’을 잘 극복한 동아시아 선진국으로 꼽힌다.

1970년대부터 외화를 벌어오며 나라 발전에 기여한 산업의 중추, 건설업만큼은 예외이다. 아래로는 중국 등 신흥국에 따라잡히며 고전하는 동시에 미국이나 서유럽 등 선진국 프로젝트를 따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내 대형 건설사들은 수십 년간 중동 및 아시아 지역에서 건축·토목·플랜트 분야의 트랙레코드를 성실하게 쌓아왔다. 건설업 역사에 길이 남을 ‘부르즈 칼리파’(두바이, 삼성물산), ‘마리나베이 샌즈’(싱가포르, 쌍용건설) 등 초고층 랜드마크와 대형 교량도 K-건설의 업적이다.

문제는 수익성이다. 금융위기 이후 건설업계는 해외 프로젝트에서 언제나 손실 위험에 직면해야 했다. 단순도급과 가격경쟁으로 공사를 따오는 것은 한계에 다다랐다. 지금도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프로젝트는 ‘앞에서 남고 뒤로 밑지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지정학 리스크와 경기 불황에 따라 발주도 많지 않지만 손실 리스크 탓에 적극적인 수주도 어려운 실정이다. 미국 건설전문 매체 ENR이 발표한 2024년 국제 건설사 순위(매출 기준) 중 상위 10대 기업에 속한 국내 건설사는 없었다.

근 20여 년간 빠르게 변화한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에 비해 건설업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전의 방식으로는 이익을 남기기 어려운 상황에서 건설사들은 손해를 감수하고 저가수주를 지속할지,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전환할지 갈림길에 서 있다. 수익 내기 힘든 단순 도급

국내 건설업계에 근본적인 변화의 바람이 찾아온 것은 2013~2014년 전후부터였다. 그동안 IMF 외환위기 등 부동산 경기에 따른 부침은 컸지만 이때부터 내부에선 기존의 해외 수주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중동 플랜트 붐 당시 수주했던 프로젝트가 대규모 손실을 내면서 자금난에 처하게 된 탓이다. 오일머니의 상징이자 ‘슈퍼갑’으로 통했던 사우디아라비아 공기업 아람코 발주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였다.

중동 발주처 특유의 ‘공사비 후려치기’뿐 아니라 까다로운 요구사항도 발목을 잡았다. 이 문제로 해외 플랜트가 주력인 삼성E&A(옛 삼성엔지니어링)을 필두로 GS건설, DL이앤씨(옛 대림산업), SK에코플랜트(옛 SK건설) 등 대형 건설사 대부분이 고생해야 했다.

자국에서 시공 경험을 쌓은 중국 업체들이 점차 치고 올라오며 공사비 경쟁에 불을 붙인 영향도 있다. 중국 건설사들은 어느새 부가가치가 높은 초고층 시공 역량도 보유하게 됐다. 대규모 도시개발을 통해 노하우를 쌓았기 때문이다. 2008년 병따개 모양 랜드마크로 유명한 상하이세계금융센터(SWFC)를 완공한 중국건축공정총공사(CSCEC) 등이 세계시장에서 초고층 마천루 시공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최원철 한양대 부동산융합대학원 특임교수는 “우리나라에 있는 초고층 빌딩이라고 해봐야 롯데월드타워뿐”이라며 “중국에는 전국에 롯데타워 수준의 초고층 건물이 10개 정도 있고 중국 건설사들이 그 건물들을 짓는 과정에서 시공 역량을 보유하게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체개발·ICT로 진화 가능할까

이 같은 상황에서 시공 자체보다 설계·엔지니어링과 관리 역량 확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미국과 유럽 수주가 어려운 이유도 단순 시공만으로는 까다로운 선진국 감리 수준을 맞추면서 수익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내 건설사의 해외 수주액이 지속 감소하는 가운데 중동·아시아 비중이 여전히 높은 이유다. 그나마 최근 수주액이 증가한 북미 지역 프로젝트는 그룹사의 현지 생산시설 공사가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선진국이 수십~수백 년간 축적한 기술력을 몇 년 안에 갖추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3차원 도면과 복합관리 기능을 갖춘 빌딩정보모델링(BIM) 등 스마트 건설기술이 도입되며 시공 효율을 높이고 격차를 줄일 기회가 생기고 있다. 최원철 교수는 “로봇이나 UAM 같이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ICT가 국내 건설 현장에도 점차 도입되고 있다”며 “한국이 ICT에 강점이 있는 만큼 신기술을 활용한다면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연구개발(R&D) 예산은 박하게 책정됐다. 전자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10대 건설사(2024년 시공능력평가 기준) 중 R&D 예산이 매출의 1%를 넘긴 곳은 삼성물산과 현대건설뿐이며 DL이앤씨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다른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자체 투자개발사업이다. 공사비만 받는 것보다 보유 지분만큼 수익을 나누는 방식이다. 최근 몇 년 새 건설사들은 ‘디벨로퍼’로서 생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는 손실 위험이 큰 부동산 개발보다는 민관합작투자사업(PPP) 등 해외 인프라 투자가 주된 관심의 대상이다. DL이앤씨와 SK에코플랜트가 2017년 수주해 2022년 완공, 운영까지 맡고 있는 세계 최장 현수교 ‘터키 차나칼레 대교’ 프로젝트가 대표적 성공사례다. 다만 더 본격적인 해외 개발사업 진출을 위해선 부동산 리츠나 펀드 등 선진적인 금융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한다. 장기적 관점 필요해
그러나 근시안적인 판단은 여전히 건설업을 흔들고 있다. ‘중동 플랜트 사태’가 발생한 당시부터 실적이 필요한 일부 임원이 “일단 따고 보자”는 식의 저가 수주를 밀어 붙인 것이 원인으로 지적됐다. 이후 대형 건설사들은 비교적 빠르게 실적을 내기 쉽고 수익이 안정적인 주택사업을 대폭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와 영업이익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한 업계 전문가는 “모 건설사는 해외 프로젝트마다 1000억원, 국내 현장은 100억원 씩 적자”라고 말했다.

원전산업 역시 일관된 지원 없이 정권에 따른 부침을 심하게 겪고 있다. 원천기술(원자로)은 본래 미국 것이었지만 UAE 바카라 원전 성공사례에서 보듯 국내 기업들의 원전시설 설계 및 시공능력은 두루 입증된 상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임기 때 탈원전 기조로 위축됐던 원전산업은 정권이 바뀐 뒤 갑자기 국가정책사업으로 홍보가 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번 국정감사에서는 올해 한국수력원자력 팀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화제가 됐던 체코 원전 프로젝트가 ‘성과 부풀리기’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안도걸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총 23조6000억원으로 홍보된 사업규모는 체코 현지기업 지분과 금융 조달 비용, 웨스팅하우스에 지불해야 할 로열티 비용까지 빼면 약 6조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2005년부터 세 차례나 시장에 나왔던 원전전문기업 웨스팅하우스 인수에 실패한 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지적이다. 한수원은 웨스팅하우스와 계약을 통해 기술이전을 받았다는 입장이지만 웨스팅하우스는 한국이 원전을 수주할 때마다 특허권 침해를 주장하면서 로열티를 요구하고 있다. 이 문제는 해외 원전 수주경쟁에서 매번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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