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로 6000억원 버는 도시…러닝 열풍에 지역 경제도 들썩[러닝의 경제학①]
입력 2024-11-04 07:40:01
수정 2024-11-04 07:40:01
내년 런던 마라톤 지원자 84만명
러닝 붐,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져
뉴욕마라톤 경제효과 5900억원 달해
한국, 글로벌 마라톤 없고 선착순 시스템 부작용도
아마추어 러너들에게는 꿈의 메달이 있다. 세계 6대 메이저 마라톤(보스턴·런던·베를린·시카고·뉴욕·도쿄)을 완주하면 수여하는 ‘6스타 완주자 메달’이다. 6개의 완주 메달을 목에 걸면 얻을 수 있는 ‘러너들의 드래곤볼’이다.
직장인 문진수(36) 씨 역시 6스타 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 도쿄, 베를린 마라톤을 완주했다.
문 씨는 “러닝은 노력하는 만큼 성취가 보이는 정직한 운동”이라며 “욜로를 지나 ‘갓생’(성장을 지향하고 남들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사는 게 유행이 된 젊은 세대에게 러닝은 가장 적합한 운동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문 씨처럼 해외 마라톤 대회 참가를 원하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러닝 전문’ 여행사까지 생겨났다. 러닝 전문 여행사는 각국 마라톤 대회 주최사의 공식 파트너사다.
대회 티켓을 미리 확보한 뒤 트레이닝, 숙박, 대회 등 마라톤 일정을 함께하고 남은 시간은 자유롭게 관광할 수 있는 상품이 대부분이다. 한국에서 정점을 찍고 있는 러닝 열풍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난해 설립된 러닝 전문 여행사 ‘클투’ 역시 해외 마라톤이 주력 상품이다. 클투는 지금까지 호놀룰루·파리·피렌체·시드니 마라톤 등 10개의 해외 런투어를 기획했고 약 400명의 러너가 참가했다. 이들의 목표는 기록이 아닌 완주. 해외 마라톤 여행 상품에는 전문 코치가 투입되고 러닝 트레이닝, 현지 페이서 역할을 하며 러닝 교육을 책임진다.
문현우 클투 대표는 “신청자 중 한국에서 풀코스를 뛰어본 적 없는 초보 러너가 절반 이상”이라며 “해외 마라톤 주최사의 공식 파트너사가 되기 위해서는 매출이나 규모보다 ‘러닝에 대한 이해도’를 피력해야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러닝 붐'에 피켓팅 된 마라톤 대회
‘러닝 붐’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내년 열리는 런던 마라톤에는 84만 명 넘는 지원자가 참가 신청하며 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 이들 중 5만여 명만 추첨을 통해 참가 기회를 얻는다.
6대 메이저 마라톤에 속하지 않는 방콕 마라톤조차 기존 마감일보다 두 달이나 앞선 지난 9월에 신청을 마감했다. 예상보다 너무 많은 지원자가 몰린 탓이다.
시드니 마라톤 역시 올해 사상 최대 참가자 수를 경신했다. 호놀룰루 마라톤은 해외 여행을 꺼리는 일본인들이 전세기를 띄워 참가할 정도로 국제적인 행사다.
러닝 붐은 고스란히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진다. 지난해 보스턴 마라톤으로 창출된 경제효과는 2억 달러(약 2700억원)로 알려졌다. 올해 TCS 런던 마라톤이 집계한 모금액은 7350만 파운드(약 1314억원)였다.
호텔이나 대형 레스토랑, 관광 명소뿐만 아니라 지역 소상공인들 역시 마라톤의 수혜를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스터카드가 2023년 뉴욕 마라톤의 경제효과를 분석한 결과 마라톤 당일 경로를 따라 관중들이 지나가는 주자를 응원하면서 소규모 지역 사업체의 매출이 최대 40%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 마라톤이 도시에 끼치는 경제적 효과는 4억2700만 달러(약 5900억원)로 집계됐다.
5만 명 넘는 러너의 대회 참가비뿐만 아니라 이들을 후원하는 기업,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중이 부가가치를 창출한 결과다.
한국에서도 러너들이 몰리며 지역 마라톤 대회가 호황기를 맞았다. 지난 10월 27일 강원도 춘천시에서 열린 춘천마라톤은 참가 신청이 1시간 만에 마감됐다.
대회 전후로 주요 관광지와 식당, 숙소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현대카드에 따르면 마라톤 대회가 속한 주말(10월 26~27일) 동안 춘천시 카드 결제액은 요식업(25.5%), 숙박업(61.8%), 유통업(6.2%)에서 고루 증가했다. 2주 전 주말과 비교한 결과다.
해외는 지역 축제, 한국은 민원 파티…이유는?전 세대에 걸친 러닝 열풍과 마라톤으로 인한 지역경제 효과는 국내와 해외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달리기 문화와 마라톤 대회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차이가 있다.
매년 12월 하와이 신문은 3만여 명의 이름과 숫자로 빼곡하게 채워진다. 호놀룰루 마라톤 참가자들의 이름과 완주 기록이다. 단 한명의 완주자도 빼놓지 않고 신문에 기록할 정도로 호놀룰루를 대표하는 행사다.
보스턴 마라톤은 보스턴 대학생들이 응원차 선수들에게 가볍게 뽀뽀를 해주는 ‘키스존’ 구간이 있다. 해외에서는 마라톤 대회가 전 지역민이 환영하는 축제처럼 이뤄지는 것이다. 전 세계인이 마라톤에 참여하기 위해 도시를 방문하고 동네 주민들은 이들을 위해 쿠키와 음료 등을 준비한다. 직접 뛰지는 않더라도 마라톤을 관람하는 관중들도 열렬히 응원한다.
기업들도 앞장서 마라톤 후원에 나선다. 보스턴 마라톤을 비롯해 세계 6대 메이저 마라톤은 2015년부터 미국 대형 헬스케어 기업 애보트가 후원하고 있다. 세계 메이저 마라톤 연합체의 공식 이름도 ‘애보트 월드 마라톤 메이저(Abbott WMM)’다. 이 기관이 메이저 마라톤이 열리는 도시를 선정하고 6스타 메달 기록과 수여자를 관리한다.
각 도시를 대표하는 후원사도 있다. 마라톤의 역사가 시작된 보스턴은 뱅크오브아메리카와 아디다스가, 뉴욕·런던·암스테르담 마라톤은 인도의 기술 회사인 타타컨설턴시서비스(TCS)가 후원한다. 베를린 마라톤은 공식 명이 ‘BMW 베를린 마라톤’인 만큼 독일 자동차 기업 BMW가 후원한다.
세계 주요 마라톤이 그 도시의 축제이자 국제적인 이벤트가 됐지만 한국 마라톤은 여전히 국내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지역에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오래된 역사에도 마라톤 주최 측이 지역 주민들의 환영을 이끌어내지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이다. 그래서 외형은 지역 축제처럼 보이지만 한국에서는 마라톤 대회를 한 번 개최하면 이후 두 달간은 주최 측에 항의 전화가 빗발친다.
올해 마라톤을 개최한 한 지자체 관계자는 “거리 통제로 인한 민원이 가장 많다”며 “마라톤은 지역경제를 살리고 지역의 아름다운 경관을 알릴 수 있는 행사지만 ‘나와 관련없다’고 느끼는 지역민들이 불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글로벌화·선착순 시스템 개선이 숙제"세계인이 참가하는 글로벌 마라톤이 없는 것 또한 한국 러닝 문화의 약점이다. 특히 ‘선착순 마감’ 시스템이 외국인들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해외 마라톤 대회는 10대부터 80대까지 각 연령대별로 참가 인원 비율을 따로 정해놓고 있다. 또 대부분 선착순 마감이 아닌 ‘추첨제’로 참가자를 선정해 다양한 연령과 다양한 국적의 참여가 가능하다. 반면 한국은 주요 대회가 선착순으로 마감된다.
러닝 열풍이 뜨거운 만큼 아마추어가 뛰기 힘든 풀코스(42.195km) 마라톤조차 당일 마감될 정도다. 기존에 취미로 마라톤을 즐기던 중년층이나 외국은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문현우 대표는 “한국은 러닝 인구가 급증하지만 그에 비해 인프라나 사람들의 인식은 이를 따라잡지 못해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것 같다”며 “마라톤이 끼치는 경제적, 사회적 효과가 큰 만큼 인프라를 재정비하고 브랜딩을 강화해 모두에게 환영받는 축제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