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소문 없이 유진그룹 승계 트랙 레코드 쌓는 ‘은둔의 후계자’

[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여의도 유진그룹 사옥. 사진=유진그룹



유진그룹이 3세 경영 초석을 다지기 위한 작업에 한창이다. 지난해 2월 그룹 정기인사에서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의 장남인 유석훈 유진기업 사장이 그룹경영혁신부문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3세 경영을 본격화했다.

유 회장의 1남 2녀 중 장남인 유 사장은 사실상 승계 1순위로 꼽힌다. 그가 이끄는 유진기업은 레미콘·건자재 업계 1위로 유진그룹의 지주사다.

그룹의 정점인 유진기업 지분 3.06%를 갖고 있는데 유경선 회장(11.54%), 유 회장의 동생인 유창수 유진투자증권 대표이사 부회장(6.85), 유순태 유진홈센터 대표이사(4.38%)에 이어 네 번째로 많다.

오너일가가 100% 지분을 보유했고 유 사장이 최대주주(45%)인 우진레미콘이 유진기업 지분 0.21%를 갖고 있다. 오너 3세 중에선 가장 많은 지주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 사진=유진그룹


유진家 3세 유석훈, YTN 인수로 존재감

기업 인지도와 규모에 비해 유 사장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많지 않다. 그동안 언론 노출을 하지 않아 ‘은둔의 경영자’로 꼽히며 공개된 프로필 사진조차 없다. 1982년생인 유 사장은 청운중, 경복고, 연세대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학석사(MBA)를 마쳤다. 유진자산운용과 글로벌 컨설팅업체 AT커니에서 경력을 쌓았다.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장선익 동국제강 전무와 동갑내기로 청운중, 연세대 동기다. 장선익 전무와는 중·고등학교, 대학을 함께 나왔다. 동갑내기들이 그간 언론의 주목을 받아온 것과 달리 유 사장은 상대적으로 조용히 후계자 수업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내에서는 차근차근 승계용 트랙 레코드를 쌓아가고 있다는 평가다. 2014년 유진기업 부장으로 입사하며 경영수업을 시작했고 2015년 사내 등기임원에 선임됐다. 2021년 말 상무에서 재경본부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전무를 거치지 않은 초고속 승진이었다. YTN 인수전을 주도하며 미디어 분야로 사업 다각화를 이뤄낸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부사장 승진 1년 만에 사장이 됐다.

YTN 인수는 단순히 미디어 분야 진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YTN이 남산서울타워, 상암동 YTN뉴스퀘어 사옥을 통해 부동산 임대사업을 영위하는 만큼 안정적인 임대 수익도 얻을 수 있다. 2022년 기준 YTN의 부동산 임대사업 매출액은 198억원이다. 부동산 자산 가치까지 포함하면 3199억원을 들여 YTN 지분 30.95%를 취득한 유진그룹 입장에선 남는 장사를 한 셈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서울 상암동 YTN 사옥. 사진=뉴스1


건빵 팔아 방송까지…재계 60위권 노려

유진그룹은 지주사이자 레미콘 1위인 유진기업과 핵심 계열사 동양 등을 통해 레미콘, 건자재 분야를 주력으로 금융, 물류·IT까지 50여 개 계열사를 보유한 자산 6조2000억원 규모의 재계 72위 대기업집단이다. YTN 인수로 자산총액이 늘면서 내년에는 재계 60위권으로 점프할 것으로 보인다.

유진그룹은 1954년 창업자인 유재필 명예회장이 설립한 대흥제과에서 출발했다. 군 납품용 건빵을 만들다가 1980년대 건설자재 산업이 활성화되자 유진종합개발을 설립해 레미콘 사업에 발을 뻗었다.

유경선 회장은 인수합병(M&A)으로 사세를 키워 ‘M&A의 귀재’로 불린다. 1985년 유진종합개발 대표에 올라 레미콘사업을 업계 1위에 올렸다. 2004년 회장에 오른 이후 고려시멘트, 한국자산평가, 로젠택배, 하이마트, 동양 등을 공격적으로 인수해 그룹을 한때 재계 30위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건자재·유통 부문에는 유진기업, 동양, 유진AMC, 유진한일합섬 등을, 금융 부문에는 유진투자증권, 유진자산운용, 유진투자선물, 유진프라이빗에쿼티 등을, 물류·IT 부문에는 유진로지스틱스, 유진IT서비스 등을, 레저·엔터테인먼트 부문에는 푸른솔GC포천, 푸른솔GC장성, 유진엠 등을 계열사로 갖고 있다.

지난해 10월 보도전문채널 YTN 인수로 미디어 사업에 진출하며 재계의 이목을 끌었다. 엄밀히 말하면 미디어 사업은 재진출이다. 1997년 부천지역 종합유선방송사 드림씨티방송을 설립, 은평방송을 인수하면서 케이블TV 사업과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했으나 2006년 대우건설 인수를 시도하면서 드림씨티방송을 CJ그룹에 매각했다. 이번 YTN 인수로 20여 년 만에 다시 방송 분야에 재진출했다.


그래픽=정다운 기자


대 이은 ‘공격 M&A’로 신성장동력 발굴…대관식은 아직

유경선 회장의 공격적 M&A는 사업 다각화로 새로운 성장판을 열어 외형을 키워온 그룹의 성장방식이었지만 실패 사례도 적지 않다. 2006년 대우건설 인수 시도, 2015년 서울 시내면세점 입찰 참여, 2020년 두산인프라코어 인수 실패 등이 대표적이다.

2006년 대우건설 인수에 뛰어들어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인수전을 벌인 끝에 실패했지만 오히려 공격 경영스타일로 재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대우건설을 6조4000억원에 인수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무리한 M&A로 승자의 저주에 빠져 2009년 재매각한 바 있다.

2015년에는 서울 시내면세점 사업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시내면세점 신규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하며 면세점 사업 진출이 좌절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면세점 사업 진출을 하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당시 면세점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릴 만큼 국내 대기업들이 탐내던 사업이었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면세점의 큰손이었던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한한령으로 발길을 끊은 데 이어 코로나19까지 덮치면서 애물단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M&A에는 성공했지만 법적 공방 등 곤욕을 치른 사례도 있다. 유진그룹이 2004년 고려시멘트를 인수하자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평이 나왔다. 2008년 1조9500억원에 인수한 하이마트는M&A 시장에서 유진그룹의 이름을 각인시킨 빅딜이었지만 결국 그룹을 유동성 위기에 빠지게 했고 2012년 하이마트를 롯데쇼핑에 다시 매각했다.

당시 하이마트 인수 과정에서 선종구 전 하이마트 회장 측과 경영권 분쟁이 발생했는데 오랫동안 법적 공방에 시달려야 했다.


서울 여의도 유진그룹 사옥. 사진=유진그룹



2020년 두산인프라코어(현 HD현대인프라코어) 인수전은 HD현대중공업에 고배를 마셨다.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전은 글로벌 시장 진출을 목표로 유 사장이 인수 실무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HD현대에선 정기선 부회장이 진두지휘해 재계에서 오너 3세 간 맞대결로 주목받기도 했다.

재계에선 유 사장이 지주사 지분을 확대해 실질적인 그룹 지배력을 높이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 유 사장은 아버지의 성공 방식을 이어받아 M&A와 투자 등으로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유 사장은 그동안 신사업 진출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2014년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을 위한 유진에너팜을 설립했고, 로봇사업을 위해 자회사 유진로지스틱스를 통해 TXR로보틱스를 사들이기도 했다.

지난해 나눔로또를 통해 벤처캐피털(VC) 스프링벤처스를 설립, AI 영상검색 스타트업 트웰브랩스 등 유망 신생기업에 투자했고 2022년 미국 로봇가구 스타트업의 시리즈 B 투자에 참여하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현재 주력인 건자재 사업은 전방산업인 건설경기와 원자재 가격의 영향을 크게 받아 수익성의 변동성이 큰 만큼 안정적인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사업 포트폴리오 마련이 급선무”라며 “신사업 투자는 당장 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어서 안정적인 수익 모델 구축을 통한 경영 능력 입증이 승계 시점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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