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총리’ 이시바…요동치는 일본 금융시장[글로벌 현장]

10월 27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이 약진하면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오른쪽)와 노다 요시히코 입헌민주당 대표가 총리직을 놓고 대결을 펼치게 됐다. 사진=연합뉴스


일본은행이 지난 10월 기준금리를 2회 연속 동결했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향후 금리인상 시점에 대해 “예단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이르면 12월 추가 금리인상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집권 자민당과 연립 여당 공명당이 10월 27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총선)에서 15년 만에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함에 따라 정계가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됐다. 정세가 불투명해지면서 당분간 시장 변동성이 커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르면 12월 금리인상
일본은행은 10월 31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0.25%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7월 금리를 연 0~0.1%에서 연 0.25%로 인상한 뒤 9월에 이어 10월까지 두 차례 연속 동결했다. 10월 27일 총선에서 자민·공명 연립 여당이 패하며 정세가 불안해진 데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불확실성이 커지자 금리인상을 보류했다는 분석이다.

일본은행은 경제와 물가가 전망에 부합하면 금리를 인상할 방침이다. 우에다 총재는 9월 회의부터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표현을 고수했는데 10월 31일 기자회견에선 “(시간적 여유라는 표현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 오늘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이르면 12월 추가 금리인상을 단행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관측이 나왔다.

엔저도 금리인상 재료로 작용할 수 있다. 엔·달러 환율은 최근 달러당 153엔을 넘나들며 3개월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앞서 정권 운영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리기 어렵게 됐다는 관측이 확산함에 따라 엔화가 약세를 보였다. 우에다 총재는 엔화 약세와 관련해 “과거보다 물가에 영향을 미치기 쉬워졌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총선에서 크게 약진하며 ‘킹메이커’로 떠오른 국민민주당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자민당이 차기 총리 지명 및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중도보수 성향의 제3야당인 국민민주당과 협력에 나서면서다.

국민민주당은 그동안 일본은행의 금리인상에 거리를 두는 비둘기파 태도를 보여왔다. 다마키 유이치로 국민민주당 대표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플러스 실질임금’의 안정적 실현 측면에서 급격히 통화정책을 변경해선 안 된다”며 조기 금리인상에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그럼에도 엔저 가속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면 정치권도 금리인상에 반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오히려 자민·공명 연립 여당이 총선에서 패하고 국민민주당 등이 약진하면서 엔저를 부추길 가능성도 높다는 분석이다. 재정 불안이 핵심 이유다. 자민당이 ‘미래 지향적 적극 재정’이나 소비세 감세, 소득세 비과세 한도 상향 등을 내세우는 국민민주당을 끌어안는 과정에서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 것이다. 비자금 스캔들에 참패한 자민당
이번 선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0월 27일 총선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은 191석을 차지했다. 종전 의석 대비 56석이나 줄었다. 연립 여당 공명당은 8석 감소한 24석에 그쳤다. 자민당과 공명당 의석수 합계는 215석으로 중의원 465석의 과반인 233석에 미치지 못했다.

10월 9일 중의원 해산 때만 해도 자민당 단독 과반까지는 어렵더라도 공명당까지 합치면 무난히 과반을 확보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그러나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에 대한 심판 여론이 거세지면서 참패했다. 작년 12월 불거진 비자금 스캔들은 옛 아베파 등 자민당 주요 파벌이 정치자금 모금 행사(파티)를 주최하면서 ‘파티권’을 할당량 이상 판매한 소속 의원에게 초과분의 돈을 다시 넘겨줘 비자금화했다는 의혹이다.

선거를 목전에 두고 이 스캔들과 관련해 새로운 악재가 불거졌다. 자민당 본부가 비자금 스캔들에 연루돼 공천하지 않은 출마자가 대표를 맡은 지부에도 2000만 엔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앞서 자민당 본부는 공천 대상자가 있는 지부에 공천 명목 비용 500만 엔과 활동비 1500만 엔 등 2000만 엔을 이체했다.

결국 일본 서민들은 자민당에 등을 돌렸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를 넘는 고물가가 계속되고 실질임금이 거의 오르지 않으면서 가뜩이나 불만이 컸는데 자만당이 ‘돈 장난’을 쳤다는 데 분노했다.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입헌민주당은 종전 98석에서 148석으로 약진했다. 제1야당이 전체 의석의 30%인 140석 이상을 확보한 것은 2003년 이후 21년 만이다. 다만 입헌민주당 역시 과반인 233석에는 이르지 못했다. 캐스팅 보트 쥔 국민민주당
일본은 중의원 해산에 따른 총선 후 1개월 내 특별의회를 열고 총리 지명 등을 새로 하게 된다. 총리 지명 선거에서 이기려면 과반 찬성이 필요하다. 자민·공명당이나 입헌민주당 모두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만큼 제2야당인 일본유신회와 제3야당인 국민민주당이 킹메이커로 떠오르게 됐다.

특히 국민민주당은 종전 7석이던 중의원 의석을 네 배인 28석으로 크게 늘리면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됐다. 국민민주당이 약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성 정당에 대한 불만이 큰 젊은층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국민민주당은 당선자 중 이번 선거에 처음 출마한 신인 후보의 비율이 67.9%로 당선자를 한 명 이상 배출한 정당 가운데 가장 높았다.

11월 11일 열리는 특별의회 총리 지명 선거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상위 두 명이 결선을 치른다. 현재 의석 구조상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올 가능성이 낮다. 이에 따라 이시바 총리와 노다 요시히코 입헌민주당 대표가 결선에서 맞붙을 가능성이 크다.

결선 투표는 투표용지에 지지 후보 이름을 쓰는 방식인데 국민민주당 의원들이 이시바 총리나 노다 대표 대신 자당 대표인 다마키 유이치로를 쓰면 모두 무효표가 된다. 그럼 의석수가 가장 많은 제1당 자민당 총재인 이시바가 다시 총리로 지명되는 구조다. 이미 국민민주당은 다마키 대표에게 투표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자민당에서 대량 이탈만 없으면 이시바 총리가 재임할 가능성이 크다. 이시바 ‘단명 총리’ 되나
이시바 총리가 재지명되더라도 앞으로 갈 길은 험난하다는 관측이 많다. 특히 30%대로 떨어진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관건이다. 이시바 총리가 내년 7월 참의원 선거까지 지지율을 올리지 못하면 ‘단명 총리’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이시바 끌어내리기’를 주도할 인물로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결선을 치렀던 극우 성향 정치인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이 꼽힌다. 다카이치 전 담당상은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매년 참배한 인물로 ‘여자 아베’로도 불린다.

다카이치 전 담당상은 지난 총재 선거 때 일본은행의 금리인상을 강하게 반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다카이치 전 담당상의 당선 가능성을 높게 본 외환시장에선 엔화 가치가 하락하고 주식시장에선 닛케이지수가 상승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시바 총리가 힘을 잃고 다카이치 전 담당상이 득세하면 일본은행의 고민이 더 깊어질 가능성이 있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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