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이란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합리화하는 행동을 비꼬는 용어다. 즉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편에게는 관대하지만 주로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이 같은 행동을 하면 윤리적, 이성적으로 비판하는 이중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나는 해도 되지만 남은 하면 안 된다는 남녀노소 동서고금의 이기주의를 적절히 나타낸 표현이다. 최근 들어서 TV나 공식 석상에서도 많이 쓰일 만큼 대중화된 단어다. 고사성어 혹은 사자성어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지만 저 4글자 중에서 한자는 ‘不’(아니 불) 한 자뿐이고 심지어 ‘로’는 아예 외국어의 줄임말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 봐야 다리의 힘을 알 수 있고, 깊은 물속에 들어가 봐야 키가 작음을 알 수 있다. 물이 빠질 때 비로소 누가 발가벗고 헤엄치고 있었는지를 안다. 우리는 언제 민낯이 드러날까? 현대인은 생존능력이 무능한 존재로 전락했고, 생존능력이 퇴화됨에 따라 인간으로서 위엄성도 사라졌다. 생존능력은 농부를 따라갈 수 없고,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들은 자연에서 먹을 것을 찾고, 추위를 극복하며, 생존을 위해 자신을 보호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에서 생존능력을 포기하는 대신 도시에서 안락함을 얻었다. 이는 지독한 분업의 결과이다. 이 엄청난 규모의 노동 분업을 거치게 되면 우리의 능력은 몇 갑절로 늘어나게 되지만, 우리의 삶은 지독하게 타인에게 의존적으로 변한다.
우리는 수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면서 돌아가는 시스템 속 사람으로 변했다. 그 안에서는 톱니바퀴가 겉돌아도 알 수 없다. 순간순간 헛바퀴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지만 거대한 바퀴에 파묻힌다. 거대한 바퀴는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일 수 있고, 더구나 나라일 수도 있다. 퇴직하는 순간, 낯선 나라로 여행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빈 껍데기였는지 금세 안다. 우리 모두 민낯이 드러나고, 발가벗고 헤엄친 것이다.
이 지독한 타인 의존적 삶은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너무나 쉽게 불의에 침묵하고, 대중의 신념에 굴복한다. 조직을 이탈하는 순간 생존 경쟁에서 무능력자로 전락하기에 쥐꼬리만 한 권력도 지독히 탐한다. 점점 더 타인에 의존하면서 자신한테는 너그러우면서 남한테는 엄격한 사람이 되어 간다. 우리는 리그 방식과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쟁한다. 비용과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토너먼트 방식은 상대방보다 월등한 실력이 아니라 “너보다만 나으면 돼”이다. 어느 순간 생각의 근육보다 관계 근육을 만들기에 치중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런 방식으로 몇 단계를 거치면 회사의 임원이 되고 고위 관료가 된다. 그렇게 하여 퇴직을 하면 민낯이 드러나고, 아! 내 능력이 내 것이 아니라 조직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본주의에서 부를 결정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대부분 상대방보다 탁월한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입찰에서 0.1점만 더 높게 점수를 받으면 수주한다. 그렇게 하여 부가 점점 위로 몰려가고 금액도 커지지만 여전히 상대방보다 0.1점만 더 요구할 뿐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남보다 탁월한 기술개발보다는 사회적 관계를 더 중요시하게 된다. 그렇게 한평생 살다가 회사를 운영하다가 새로운 플랫폼을 만나거나 파괴적 기술이 몰려올 때 민낯이 드러나고, 발가벗고 헤엄을 친 자신을 발견한다. 한 방에 훅 무너진다. 역사도 그렇다. 대부분 선형으로 변하지만 때로는 비선형의 변곡점을 만나 크게 활처럼 튕겨 나간다. 그때 나라도 민낯이 드러나고 한순간에 위기를 맞이한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디지털 대변혁(DX)도 그런 변곡점이라 생각한다. “우세한 기술 1~2개보다는 다수의 기술이 융합되는 세상이며, 규정과 절차가 파괴되고 개인의 인격은 무시되는 창의적 인재들이 득실대는 프런티어(Frontier)의 세계이다.” 이때 자신한테는 너그러우면서 남한테는 엄격한 사람들이 무너진다.
김홍유 경희대 교수(한국방위산업협회 정책위원, 전 한국취업진로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