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조 퇴직연금 실물이전? 도대체 뭔 얘기일까

그래픽=정다운 기자



퇴직연금을 다른 금융회사로 옮길 수 있는 실물이전이 10월 31일부터 가능하게 됐다. 400조 퇴직연금 시장을 뒤흔들 게임체인저라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많은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남의 일처럼 보고 있다. 직장인 5명 중 1명이 가입한 퇴직연금 상품도 모르고 있는 데다 왜 갈아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 중 뭐가 유리한지”, “개인형퇴직연금제도(IRP) 계좌는 왜 두 개 이상 만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활용하면 절세가 가능한지”, “금융회사 고를 때 뭘 따져봐야 할지” 등 소비자들의 대표적인 궁금증을 정리해봤다.
400조 유치전 왜?
지금까지 A은행에서 운영하던 퇴직연금 계좌를 B증권사로 이전하기 위해선 기존에 투자하고 있던 금융 상품을 팔아 현금화한 후 다시 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가령 IRP에서 5년 고금리 예금에 가입 중인데 갈아타기(연금 이전)를 하려면 만기 전에 예금을 깨고 현금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갈아타기를 해야하는 셈. 실물이전제도 시행으로 별도의 해지 절차 없이 연금 이전이 가능해졌다. 이전 가능한 상품은 예금, 정부 보증채권, 회사채,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등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실물이전 조건이 까다롭다. 실물이전이 가능한 상품이라도 옮겨 타려는 금융회사가 해당 상품을 취급하고 있어야 이전이 가능하다. 보유 중인 ETF를 갈아타려는 금융사에서 거래할 수 없다면 예전처럼 매도해 현금화한 후 계좌를 바꿀 수 있다는 얘기다.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영제도), 리츠, 보험계약 등 상품은 실물이전이 불가능하고 동일 제도 내에서의 이전(DB↔DB, DC↔DC, IRP↔IRP)만 가능하다는 점도 갈아타기의 걸림돌이다.

회사가 가입한 금융회사 간의 이동만 가능하다는 점도 한계점으로 거론된다. 사용자가 금융사를 추가하거나 뺄 경우(내용 변경) 노사협의가 필요하다(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4조 2·3항). 쉽게 금융사를 바꾸긴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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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이 많지만 금융회사들은 상품 수를 늘리고 서류 제출을 간소화하거나 수수료를 없애는 등 퇴직자를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펼치고 있다. 퇴직금은 거액인 데다 장기로 예치되기 때문에 금융회사 입장에선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3분기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400조878억원으로 집계됐다. 1년 전보다 11.4% 증가했다. 이 중 은행권 적립 규모는 210조2811억원으로 전체의 52.56%를 차지하고 있다. 증권사는 96조5328억원, 보험사는 93조2654억원이다.

보험사의 경우 보험계약이 적립금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어 자금 유치 경쟁은 사실상 은행과 증권업 간의 ‘양강 경쟁’으로 펼쳐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적립금의 절반 이상은 은행권이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은행은 ‘고객 지키기’에, 증권사는 ‘신규 고객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기존 퇴직 연금 상품을 다른 금융사로 옮길 수 있는 ‘퇴직 연금 실물 이전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은행들이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스타 마케팅’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사진은 배우 변우석(왼쪽부터), 가수 겸 배우 아이유, 그룹 아이브 안유진. 사진=NH농협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수수료 따지고,
대출금리 할인도 비교
회사별 수수료가 금융사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다. IRP의 경우 금융회사별 퇴직연금 수수료율은 0~0.45%로 차이가 크다. 계좌에 1억원이 있다면 어떤 금융사는 무료고 또 어떤 금융사는 1년에 45만원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수수료는 증권사가 가장 저렴하다. KB증권 등 일부 증권사는 비대면 채널로 IRP 계좌를 개설하면 수수료가 무료다. 운용 효율성이 높아 낮은 수수료 구조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비용부담률(적립금에서 계좌관리수수료와 펀드 보수 등 비율)도 대개 증권사가 낮은 편이다. 취급하는 상품도 다양하다.

반면 은행은 안정적인 운용으로 증시 침체기 수익률 방어가 유리한 편이다. 대면 채널(영업창구) 접근성이 좋아 문제가 생겼을 경우 상담받기도 쉽다. IRP 계좌가 있으면 대출금리 할인도 받을 수 있다. 이 경우 계좌 수수료(비용)와 대출금리 할인(혜택)을 비교해 선택해 볼 수 있다. 은행 중 우리은행은 비대면 계좌 수수료가 무료다.
낮은 수익률과 과다한 수수료에 분통
이 같은 제도 변화의 이면에는 퇴직연금의 수익률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도 작용했다. 현재 퇴직연금은 원금 보장 상품에 기반을 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지난 10년간 연평균 가입자 수익률이 2%다. 5년간 연평균 수익률이 7.63%인 국민연금 수익률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가입자가 원할 경우에 한해 별도의 전문 조직이 운용하는 ‘기금형’ 가입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배경이다.

적립금 규모에 따라 수수료를 떼어가는 시스템 탓에 불필요한 수수료가 소비자에게 과다하게 부과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내가 운용하는데 수수료까지 내야 하냐”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빗발치고 있다. 금융사 간 수수료 인하 경쟁을 촉진하도록 수수료 체계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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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이전 알아야 할 4가지
퇴직연금 이전이 가능하게 됐지만 관심도 없고 복잡해서 알 길도 없다는 직장인들이 많다. 퇴직연금 이전에 앞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네 가지 의문을 정리했다.

①임금상승률 크면 DB형,
물가상승률보다 낮으면 DC형 유리

“회사에서 그동안 DB만 이용했는데 이제는 DC도 신청할 수 있다고 선택하라고 하네요. 둘 중 뭐가 좋을까요?”(8년 차 직장인)

퇴직연금제도는 근로자 재직 기간 중 회사가 퇴직급여 지급 재원을 금융회사에 적립하고 이 재원을 사용자(회사)나 근로자(직장인)가 운용해 근로자 퇴직 시 연금 또는 일시금으로 지급하는 제도다. 금융회사에 맡긴 적립금을 회사가 운용한다면 DB, 직장인이 직접 운용한다면 DC다. 회사마다 노사협의에 따라 ①DB나 ②DC 또는 ③DB 및 DC의 선택지를 둔다.

DB형의 경우 사용자의 운용성과가 퇴직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수익이 나면 회사가 갖고 손실을 보면 메꿔야 하는 구조다. 퇴직급여는 ‘계속근로연수’에 ‘퇴직 직전 3개월 월평균 임금’을 곱해서 결정된다. 직장인 입장에선 ‘확실히 받을 수 있다’는 것 외에 금액적인 측면에서 기존 퇴직금과 큰 차이가 없다.

직장에서 승진 기회가 많고 임금상승률이 높거나 장기근속이 가능한 호봉제 직장인이라면 DB형으로 가입하는 게 유리하다. 안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투자 성향도 고려해볼 만하다.

임금피크제를 앞두고 있는 직장인이라면 임금피크제 적용 직전에 DC형으로 전환하는 것도 방법이다. DB형을 유지할 경우 줄어든 평균임금만큼 퇴직급여도 줄기 때문이다. 다만 임금피크제를 도입했지만 DB형을 유지해도 퇴직급여가 줄어들지 않도록 별도 기준을 마련한 사업장도 있다. 전환 결정 전 퇴직연금규약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DC형 퇴직연금을 DB형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DC형에서의 근로자 운용성과가 사용자에게 전가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DC형은 투자수익률이 클수록 퇴직금이 더 많이 쌓이는 구조다. 회사가 매년 근로자 연간임금의 12분의 1 이상을 근로자 퇴직계좌에 예치(중간정산과 유사)하고 근로자가 이를 직접 운용한다. 운용성과에 따라 은퇴 시 수령하는 퇴직금이 DB형과 비교해 더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임금상승률이 낮으며 고용이 불안정해 장기근속이 어려운 근로자가 투자에 자신이 있다면 DC형으로 가입하는 게 낫다.

퇴직금을 맡길 금융회사는 노사협의로 결정된다. 이때 사용자는 금융회사 1곳 이상을 가입하면 된다. 예컨대 회사가 A, B, C 총 3곳의 금융사에 퇴직금을 적립하기로 했다면 DC형의 근로자는 3곳 중 원하는 금융사 1곳을 고르면 된다.

DB형 퇴직연금 가입자는 추가로 내거나 중도인출을 할 수 없다. 반면 DC형은 근로자 본인이 추가로 부담금을 납입할 수 있고 중도 인출도 가능하다. 무주택자인 가입자가 본인 명의로 주택을 구입하거나 전세금 또는 보증금을 부담하는 경우 가입자나 부양가족 등의 의료비 마련 등의 사유가 있으면 된다. DB형 가입자가 중도 인출을 위해 DC형으로 바꾼다면 다시 DB형으로 복귀할 수 없다.

②IRP, 1계좌는 절세로
2계좌는 퇴직금으로

“2년 전 주택담보대출 받을 때 금리 할인해 준다고 해서 IRP 가입했어요. 그런데 최근 은행 다니는 친구에게서 IRP 가입하라고 연락이 왔어요. 2개 이상 만들어놔야 좋다는데 왜 그런가요?”(30대 직장인)

DB형과 DC형이 회사를 다니는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는 제도라면 IRP는 직장인은 물론 자영업자, 프리랜서 등 소득이 있는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퇴직연금제도다. “국민연금, 기초연금만으로는 노후 보장이 부족할 수 있으니 개인적으로도 연금 준비해라. 소득공제 해주겠다”는 취지로 2012년 도입됐다. 총 급여액에 따라 13.2~16.5%, 최대 900만원까지 세액공제가 가능하다.

IRP는 은행·증권사·보험사 중에서 선택 가입할 수 있다. 금융사 1곳당 1계좌가 원칙으로 개인이 여러 금융사에 다수 계좌를 보유할 수 있다. 연말정산 세액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 갖고 있던 IRP 계좌로 퇴직금을 받는다면 기존 개인 납입금과 퇴직금은 계좌 내에서 분리돼 관리된다. 하지만 급하게 목돈을 써야 할 상황이 왔을 때 해지하게 되면 그동안 부어온 개인 납입금도 함께 해지된다. 이때 그간 받아왔던 세금 혜택도 토해내야 한다. 세액공제용 IRP 계좌 1개, 퇴직금용 IRP 계좌 1개 총 2개 이상을 들고 있으면 좋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55세 전에 퇴직하는 근로자는 IRP 계좌로만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55세 이후에는 퇴직금을 IRP로 받아도 되고 다른 계좌로 일시금 수령도 가능하다.

이직이 잦은 직장인이 퇴직금을 받을 때마다 IRP 한 계좌로 모으면 목돈처럼 관리할 수 있다. 해지하면 그동안 받은 세금 혜택을 뱉어내야 해 섣불리 깰 수 없어 노후 재원 활용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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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IRP로 세금 아끼려면

퇴직금도 소득이라서 소득세를 내야 한다. 세금은 최대한 적게 낼수록 이득이다. 당장 목돈이 필요하지 않고 일시금 수령으로 인한 퇴직 소득세 부담을 덜고 싶다면 IRP 계좌를 통해 퇴직금을 연금 형태로 나눠 받는 방법이 있다. 이때는 연금소득세만 내면 되는데, 이는 퇴직소득세율의 70%에 해당한다. 일시금 수령보다 30%의 세금을 아낄 수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100만원의 퇴직소득세를 내야 하는 직장인의 경우 연금으로 받으면 70만원(연금소득세)만 내면 된다.

퇴직 후 당장 연금(돈)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퇴직금이 입금되면 단돈 10만원이라도 연금 수령을 바로 개시하는 게 좋다. 연금 수령 기간이 10년이 넘으면 세금 절감 혜택이 확대(30%→40%)되기 때문이다.

‘연금수령한도’ 범위 내에서 인출해야 세금 혜택을 받는다. 연금을 한꺼번에 뭉텅이로 꺼내 쓰는 경우까지 정부가 세금을 깎아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④회사 망해도 퇴직금 받을 수 있다?

올해 7월 대규모 판매대금 미정산 사태가 벌어진 티몬과 위메프. 최근 회사에서 퇴사한 직원들이 임금 및 퇴직금 등을 지급받지 못해 고용노동부에 임금체불을 신고했다. 모기업인 큐텐그룹의 큐텐테크놀로지 퇴직 임직원들은 집단소송에 나섰다. 대부분은 퇴직금 체불이다. 만약 회사가 퇴직연금제도를 선택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기존 퇴직금제도에서는 기업이 퇴직금을 사내 유보하는 경우가 많아 회사가 갑자기 망한다면 근로자가 퇴직금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퇴직연금제도(2005년 12월 도입)에서는 퇴직금이 외부 금융사에 적립되고 위탁 운용된다. 회사가 도산해도 근로자의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티몬과 위메프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규모가 꽤 큰 사업장이어도 무조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는 건 아니다. 사용자는 퇴직하는 근로자에게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퇴직금이나 퇴직연금제도 중 하나 이상의 제도를 설정해야 한다(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4조 1항). 2012년 7월 이후 설립된 사업장은 퇴직연금제도 도입이 의무화됐다. 하지만 미도입 업체에 대한 별도의 제재 규정이 없어 사실상 설립연도와 상관없이 기업이 퇴직금이나 퇴직연금 중에 선택할 수 있다. 대체로 규모가 작은 회사일수록 퇴직연금 가입률이 저조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퇴직연금 도입률은 26.8%로 나타났다. 300인 이상 사업장은 91.9%가 도입한 반면 30인 미만 사업장은 23.7%대로 집계됐다.

10월 24일 큐텐테크놀로지 전 임직원들이 서울중앙지법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큐텐테크놀로지 임직원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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