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스톰’은 핑계일 뿐이다[하영춘 칼럼]




“트럼프 당선은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지.”

코스피지수가 2417로 후퇴한 지난 13일 한 지인이 “왜 우리 증시만 이렇게 빠지냐”고 한숨을 내쉬자 다른 지인이 한 말이다. “기업 실적은 뒷걸음질이지, 정부는 존재감이 없지, 정치권은 없는니만 못하지…”라면서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맞는 얘기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트럼프 랠리’가 일었다. 미국 다우지수 등 3대 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는 물론 일본 증시도 상승세를 보였다. 관세장벽의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이는 중국 증시도 올랐다. 반면 코스피는 2400 선마저 위협받고 있다. 한국만 왕따다.

그래서 트럼프는 핑계일 뿐이다. 뜯어보면 한국 증시엔 오를 이유가 별로 없다. 삼성전자는 HBM(고대역폭메모리) 경쟁에서 뒤져 휘청거리고 있다. 상장기업들은 줄줄이 어닝쇼크를 내고 있다. 3분기 실적을 발표한 198개 상장사 중 영업이익이 컨센서스(추정치 평균)를 10% 이상 밑돌거나 적자전환한 기업은 90곳에 이른다. 전체의 45.4%다. 주가가 오르는 게 이상하다.

그렇다고 역동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 2000년 이후 미국 증시에선 마이크로소프트(MS), 제너럴일렉트릭(GE), 엑손모빌, 애플, 엔비디아 등이 시가총액 1위 경쟁을 벌여 왔다. 지난 20년간 시가총액 10위권을 지키고 있는 기업은 MS가 유일하다. 대표적 반도체 기업 인텔은 초우량기업 30종목을 모아놓은 다우지수에서 퇴출됐다.

반면 한국 증시에선 삼성전자가 1999년부터 여전히 시가총액 1위를 지키고 있다. 2000년 이후 시가총액 10위 안에 새로 올랐던 종목 중 대기업 계열사가 아닌 기업은 네이버와 셀트리온뿐이다. 역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과 시장을 뒷받침해야 하는 정부는 존재감이 희미하다. 트럼프 당선 이후 기업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지만 “선제적이고 빈틈없이 대응할 것”(최상목 경제부총리)이라거나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에 경각심을 갖고 엄중히 바라보고 있다”(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는 입장만 밝히고 있다.

이에 비해 윤석열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돈 지난 10일에는 자화자찬식 자료를 쏟아냈다. 기획재정부는 “글로벌 복합 위기 속에 물가상승세 안정화와 높은 수출증가율로 대외충격을 최소화했고 역대 최고 국가신용등급을 유지했다”고 평가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시장이 움츠러들고 있는 상황이라 생뚱맞다는 반응이 많았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강경식 경제부총리의 “경제 펀더멘털은 괜찮다”는 발언이나, 문재인 정부 2년을 맞은 2019년 당시 1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는데도 “소득주도성장 정책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자화자찬한 경제팀을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나왔다. 4대 개혁, 세법 개정, 반도체특별법, 상법 개정 등을 위해 발벗고 뛰는 장관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정치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거대 야당이 내세우는 ‘먹사니즘’은 아직은 구호일 뿐이다. 검찰과 경찰 예산을 뭉텅이로 삭감하려는 걸 보면 예산심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소수당의 한계를 핑계로 삼는 여당은 뭘 하는 존재인지 모를 정도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다. 돌아보면 정치권이나 정부가 경제를 도왔던 기억은 별로 없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던 건 언제나 경제주체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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