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공매도 과징금 판결…“모두 단순 실수, 다른 결과” [허란의 판례 읽기]
입력 2024-11-24 06:04:04
수정 2024-11-24 06:04:04
과징금 산정 기준 놓고 재량권 남용 여부 엇갈려
퀀트인과 ESK·케플러 상반된 판결
서울행정법원이 최근 잇따라 선고한 공매도 과징금 처분 취소소송에서 상반된 판단을 내놨다. 국내 퀀트인자산운용은 패소했지만 외국계 금융회사인 ESK자산운용과 케플러 쉐브레는 승소했다.
3건 모두 실수로 발생한 공매도 사례다. 퀀트인운용은 직원이 다른 펀드 계좌에서 주문을 냈고 케플러는 펀드 등록번호를 잘못 기입했으며 ESK운용은 해외중개업체의 실수로 중복 주문이 발생했다.
법원은 퀀트인운용 사건에서 “공매도 위반은 시정이 불가능하다”는 원칙적 입장을 밝혔지만 ESK운용과 케플러 사건에서는 “과징금 산정이 과도하다”며 처분을 취소했다.
법원 “공매도는 주문 순간 위반 성립”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고은설 부장판사)는 11월 14일 퀀트인운용이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를 상대로 낸 과징금 부과 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2023구합77122). 퀀트인운용은 2021년 8월 한 펀드가 보유한 E사 주식 5570주를 매도하려다 실수로 다른 펀드 계좌에서 매도 주문을 내 3억509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퀀트인운용은 △매도 당시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공매도가 아니고 △설령 공매도라도 단순 착오로 인한 것이며 △매도 후 매도 분량을 재매수하는 등 자체적인 시정조치를 취했다며 과징금 처분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러한 주장을 모두 배척했다. 재판부는 “공매도는 청약이나 주문을 낸 순간 위반행위가 성립하고 종료되므로 시정이 불가능하다”며 “대량의 공매도 주문을 내는 것만으로도 매수 의도가 있는 투자자는 매수 시점을 미루거나 매수가격을 낮출 수 있어 주가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퀀트인운용 판결은 공매도 위반의 시정조치 가능성에 대해 명확한 선을 그었다는 평가다. 재판부는 “금융투자업자인 원고는 높은 수준의 주의의무가 요구되며 기본적인 매매 주문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를 정당한 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며 “이후 주식을 매수한 것은 무차입공매도의 결제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과징금 산정의 적법성도 인정했다. “제재적 행정처분의 기준이 부령 형식으로 규정돼 있더라도 그 기준이 헌법이나 법률에 합치되지 않거나 처분이 현저히 부당하다고 인정할 만한 합리적 이유가 없는 한 섣불리 재량권 일탈·남용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며 증선위가 원고의 과실을 고려해 부과 비율을 하향 조정한 점 등을 들어 처분이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앞선 판결들에선 “과징금 산정 기준 잘못”…취소 판결
반면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는 ESK운용(2023구합67897)과 케플러(2023구합81664)의 소송에서는 과징금 산정 기준이 잘못됐다며 처분을 취소했다.
케플러는 2021년 9월 고객사로부터 A펀드 계좌의 SK하이닉스 주식 2만9771주를 매도 주문할 것을 지시받았으나 실수로 B펀드를 통해 매도 주문을 냈다. 증권사는 이를 분산해 총 4만1919주에 대한 매도주문을 제출했고 최종적으로 2만977주에 대한 매도계약이 체결됐다.
증선위는 이에 대해 10억63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서울행정법원 제4부(김정중 재판장)는 지난 8월 “자본시장조사 업무규정은 기본과징금 산정의 기준금액을 자본시장법 제180조를 위반한 공매도 주문금액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실제 매도를 요청한 주식 수량은 2만9771주였으나 증권사에서 4만1919주에 호가를 낸 금액을 기준으로 과징금이 산정된 점이 적법하지 않다”고 판시했다.
오스트리아 소재 ESK운용의 경우 2021년 8월 4일 에코프로에이치엔 주식에 대해 GTC(취소할 때까지 유효한 주문) 형태로 매도 주문을 냈다가 38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증권사가 이후 추가로 호가를 내면서 공매도 위반 규모가 늘어난 사례다.
한국 증시는 주문의 유효기간이 하루이기 때문에 증권사가 또다시 호가를 내는 바람에 중복해서 산정돼 공매도 위반 규모가 책정됐다. 같은 재판부인 서울행정법원 제4부(김정중 재판장)는 11월 8일 처분 주식 중 17만5000주에 관한 부분만 처분 사유가 인정되고 중복 제출 주식인 3만5744주에 관한 부분은 처분 사유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면서 증선위의 처분이 재량권을 일탈·남용해 전부를 취소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ESK운용으로서는 같은 영업일에 같은 주식에 관해 1회 호가를 제출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 뿐 2회 호가를 제출할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공매도 주문금액은 203억여 원임에도 주문금액이 251억여 원이라는 전제에서 과징금 액수를 산정했으므로 이 사건 처분은 위법하다”고 판시했다.
ESK운용과 케플러 사건을 판결한 재판부는 행정처분의 상대방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확장·유추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과징금 처분은 비례의 원칙과 책임주의 원칙에 위반되는 등 재량권을 일탈·남용했다”며 “행정법규는 엄격하게 해석·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퀀트인운용 판결은 공매도의 본질적 위반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반면, ESK운용과 케플러 판결은 과징금 산정의 행정 재량을 제한했다”며 “향후 소송에서도 위반행위 자체의 책임과 과징금 산정의 적정성은 분리돼 다퉈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돋보기]
증선위 IB 공매도 과징금 처분 기조 바뀔까
법원이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의 과징금 부과 처분을 두고 상반된 판단을 내놓으면서 금융당국의 공매도 규제 강화 기조가 이어질지 관심이 쏠린다. 2025년 3월 공매도 재개를 앞두고 과징금 산정 기준을 재검토할지가 관건이다.
2021년 4월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불법 공매도에 대한 과징금 한도가 주문액의 100%까지 올라간 뒤 제재 수위도 높아졌다. 과거 수천만원 수준이던 과징금이 수백억원대로 뛰었다. 공매도는 가격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식을 빌려서 판 뒤 주가가 내려가면 싼값에 되사는 매매 방식이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공매도할 주식을 확보한 상태에서 매도하는 차입 공매도만 허용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BNP파리바(190억원)와 HSBC(75억원)에 이어 올해 크레디트스위스(CS·271억원)에 고액 과징금이 부과됐다. 최근엔 바클레이즈와 씨티에 각각 700억원, 200억원 규모의 과징금 부과가 검토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2025년 3월 공매도 재개를 앞두고 엄정 대응 기조를 유지한다는 방침이지만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의 소송 리스크와 자본시장 접근성을 고려해 과징금 산정 기준을 재검토할 가능성도 있다.
당국은 무차입 공매도 주문의 고의성을 비롯해 위반금액 규모, 위반을 통한 이득 규모, 주문 체결률 등을 고려해 과징금을 산정한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2021년 4월 이후 44건의 과징금 중 7곳이 불복 소송을 제기했다.
IB들은 “고의가 아닌 실수로 인한 위반”이라며 과징금 수위가 과도하다고 주장한다. 최종 체결된 거래만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당국은 주식을 빌리지 않고 주문을 넣은 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맞서고 있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