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콘텐츠 총결산: 거센 파도를 견딘 ‘그릿(GRIT)’의 힘[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입력 2024-11-27 10:15:21
수정 2024-11-27 10:15:21
올해 한국 콘텐츠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두 작품 ‘눈물의 여왕’(왼쪽)과 ‘흑백 요리사’ 포스터. / 자료 : tvN, 넷플릭스
1940년 미국 하버드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체력 테스트가 진행됐다. 러닝머신을 최고 속도로 높인 다음 5분 이상 그 위에서 뛰도록 하는 실험이었다. 고강도로 진행됐다 보니 5분을 버틴 학생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40년 후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실험에 참여한 이들을 추적한 결과 그중 큰 사회적 성공을 거둔 사람의 대부분은 40년 전 러닝머신 위에서 5분을 버텼던 학생들로 나타났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극한의 상황에서도 단 한 걸음이라도 더 달리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IQ, 재능, 환경을 뛰어넘어 마침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앤절라 더크워스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 같은 태도를 가리켜 ‘그릿(GRIT)’이라 부른다. 성장(Growth), 회복력(Resilience),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 끈기(Tenacity)의 줄임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집념으로 끈질기게 나아가는 태도를 유지하면 크나큰 역전과 성공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 콘텐츠 산업도 2024년을 ‘그릿’의 정신으로 버텼다고 할 수 있다. 올 한 해는 초고속 러닝머신을 탄 것보다도 훨씬 힘들고 답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기였다. 급격한 산업 구조의 변화, 콘텐츠 소비 패턴의 변화, 경기침체, 글로벌 기업들의 공세 등 다양한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국내 콘텐츠 기업과 창작자들을 압박했다. 하지만 격렬한 파도에도 항로를 잃지 않고 조금씩 나아가려는 노력 덕분에 다수의 성과들이 이어졌다. 콘텐츠 업계에선 ‘눈물의 여왕’, ‘선재 업고 튀어’, ‘흑백 요리사’, ‘파묘’ 등 각 분야에 걸쳐 흥행작들이 탄생했다. K팝 시장은 내홍을 겪는 가운데서도 ‘APT.’ 등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2025년의 콘텐츠 산업 환경은 더 녹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올해 보여준 그릿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해 간다면 2025년 역시 도약의 해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 치열한 고군분투의 시간을 보낸 2024년 콘텐츠 산업을 되돌아봐야 할 때다. ‘체리슈머’의 선택을 받은 K드라마
K콘텐츠는 글로벌 시장에서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반열에 올랐다. 이른바 ‘특이점’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특이점은 양적 팽창을 이루다 어느 순간 질적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11월 1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넷플릭스의 인터내셔널 쇼케이스에서 넷플릭스 측은 “오늘날 전 세계 가입자 중 80% 이상이 K콘텐츠를 시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K콘텐츠가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 침투한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눈물의 여왕’, ‘흑백 요리사’처럼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는 작품도 꾸준히 나와 질적인 성장도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성과는 산업 구조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진 상황에서 달성한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특히 영화, 드라마 시장엔 대대적인 산업 구조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제작비 규모가 커지면서 리스크도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중심으로 콘텐츠 경쟁이 심화하면서 캐스팅 비용을 포함한 전체 제작비가 급속히 증가한 영향이 크다.
그런데 제작비를 많이 투입해도 성공 확률은 더 낮아졌다.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대중의 선택을 받기 어려워지면서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는 작품도 늘어나고 있다. 이는 콘텐츠를 감상하는 대중의 관점과 태도가 달라진 것을 뜻하기도 한다. 대중은 이제 콘텐츠를 선택할 때도 ‘체리슈머(Cherrysumer)’로서의 관점과 태도를 적용하고 있다. 체리슈머는 ‘체리 피커(Cherry Pick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이다. 원래 체리 피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로 기업의 상품이나 서비스는 구매하지 않으면서 부가서비스 등 혜택만 챙겨가는 소비자를 뜻한다. 물론 이 같은 극소수의 체리 피커들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요즘 다수의 소비자는 한층 발전된 형태의 체리슈머로 거듭나고 있다. 체리슈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자원을 알뜰하게 사용하기 위해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명한 소비자를 이른다. 이 같은 경향은 콘텐츠를 감상할 때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시시각각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개별 작품을 일일이 확인하며 감상하긴 어렵다. 그러다 보니 체리슈머들은 자신만의 명확한 기준을 설정,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만한 콘텐츠만 선정해 감상하고 있다.
다행히 2024년 드라마 시장에선 이토록 까다로운 체리슈머의 기준을 통과하고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이 많았다. ‘눈물의 여왕’, ‘내 남편과 결혼해줘’, ‘선재 업고 튀어’, ‘굿 파트너’, ‘정년이’, ‘열혈사제 2’,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등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드라마들이 사랑을 받았다. ‘선재 업고 튀어’, ‘굿 파트너’는 초반엔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체리슈머의 선택을 받으면서 입소문을 타고 흥행에 성공했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인기 서사 공식이 된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 설정에 맞춰 주인공이 회귀와 환생을 해 갑갑한 현실을 바꾸며 통쾌함을 선사했다. ‘정년이’,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콘텐츠 홍수의 시대라 해도 웰메이드 작품은 대중이 알아보고 반응한다는 점을 재확인해준 작품들이다. 이처럼 2024년의 K드라마는 숏폼 콘텐츠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최근의 영상 시장에서도 긴 호흡을 가진 드라마만의 매력이 여전히 크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며 꽤 괜찮은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2024년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장르는 ‘흑백 요리사’를 필두로 한 예능 부문이었다. 작년에도 ‘피지컬 100’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이후에도 예능이 글로벌 시장에서 계속 성과를 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긴 힘들었다. 하지만 ‘흑백 요리사’는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시리즈 부문 1위에 오르며 의구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은 일상의 소재인 ‘요리’를 다루면서도 ‘오징어 게임’과 같은 ‘계급’ 코드를 넣어 참신함을 불어넣었다. 이를 통해 예능 역시 차별화된 서사와 전략을 접목한다면 대대적인 글로벌 흥행을 이뤄낼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재함 보여준 K팝, ‘허리’가 필요한 K무비
승승장구하던 K팝 시장에선 유례없는 분쟁이 일어나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특히 하이브와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의 분쟁은 큰 혼란을 일으키며 국내외 K팝 팬들의 우려를 낳았다. 기존의 멀티 레이블 체제 등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하지만 국내에서 일어난 업계 내홍, 방탄소년단(BTS)과 같은 대형 아티스트의 단체 활동 부재에도 K팝은 해외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BTS 개별 멤버들의 음악이 글로벌 차트 상위권에 계속 올랐고 블랙핑크 멤버 로제의 ‘APT.’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화제가 됐다. K팝의 위기가 찾아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K팝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안타깝게도 영화 시장은 2023년에 이어 상황이 좋지 않은 편이다. 연초엔 분위기가 괜찮았다. ‘파묘’, ‘범죄도시4’가 나란히 1000만 관객을 달성한 덕분이다. ‘파묘’는 비주류 장르인 오컬트 영화에 해당하지만 체리슈머들의 선택을 받아 새로운 흥행 기록을 세웠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속편은 잘되기 어렵다’라는 통설을 깨고 ‘트리플 1000만’ 기록을 보유한 지식재산권(IP)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 산업을 지탱하는 ‘허리’가 되어줬던 ‘중박’ 영화들은 실종된 상태이다. 중박 영화는 300만~5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중예산 영화를 이른다. 올해 개봉한 국내 영화 순위를 살펴보면 ‘파묘’, ‘범죄도시4’에 이어 3위엔 ‘베테랑2’(648만 명), 4위엔 ‘파일럿’(470만 명)이 올랐다. 다음으로 ‘탈주’가 254만 명을 동원했으며 나머지 작품들은 100만 명 수준이거나 그 이하에 그쳤다. OTT의 발전 등으로 ‘웬만한 작품이 아니고선 극장까지 가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의 관습처럼 고착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영화계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올 한 해 동안만 해도 수차례 생존과 실패의 갈림길에 놓였던 한국 콘텐츠 산업. 어쩌면 2025년엔 더 크고 거센 파도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2024년처럼 때로 흔들리더라도 절대 꺾이지는 않는다면 이 또한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릿의 정신을 바탕으로 새해에도 많은 국내외 팬들의 선택을 받는 뛰어난 작품들이 탄생하길 바란다.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