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비상계엄에 부글부글 끓는 美, “심각한 오판” 공개비판[글로벌 현장]
입력 2024-12-06 06:00:04
수정 2024-12-06 06:00:04
韓 지도부 모두 불신 위기 처해
공들여 온 외교안보 성과도 순식간에 ‘무용지물’
“윤석열 대통령이 심각하게 오판했다고 생각한다(badly misjudged).”(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부장관)
지난 12월 3일 밤늦게 전격적으로 발표된 한국의 비상계엄 선포 소식은 전 세계에 깊은 충격을 줬다. 그중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곳은 미국이었을 것이다. 미국에 2만8500명의 주한미군이 주둔한 한국은 단순한 동맹국 중 하나가 아니다. 이곳의 상황이 급변하면 미국이 조성해 둔 동북아 지역의 균형이 깨질 수 있다. 최근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해 러시아와 ‘혈맹’을 자처한 만큼 북한에 대한 영향을 이유로 러시아가 갑작스러운 행동을 하는 시나리오도 고려해야 한다.
국내 정치만을 염두에 둔 비상계엄 선포는 한국이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무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미국은 비상계엄 선포 직전까지도 단 한마디의 통보도 받지 못했다. 이들은 국회가 4일 새벽 1시경(한국 시간) 계엄 해제를 가결하고 상황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고 나서야 한국의 입장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미국의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기엔 부족했다. 美에 답변 못 하고 우왕좌왕
사실 아무도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사람이 없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계엄 전 국무회의에 참석했으나 계획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균 외교부 1차관은 독일·스페인을 방문 중이었다. 강인선 2차관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6차 한·UAE 원자력 협력 고위급 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45년 만의 비상계엄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공무원은 거의 없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을 비롯해 해외 각국에서는 문의가 빗발쳤다. 같은 시각 주미한국대사관은 두 개의 전혀 다른 그룹으로 나뉘었다. 외교라인 쪽에서는 사태를 파악하고 상대국 질의에 대답하기 위해 발을 굴렀고 타 부처에서 파견된 비외교라인 직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파악하기 어려워 뉴스 내용에만 귀를 기울이며 심란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리카 앙골라 출장 중이었다. 공동취재단에 의하면 바이든 대통령은 현지 시간으로 3일 오후 6시(한국 시간 4일 오전 2시)가 넘어 연설이 끝난 후에 한국 상황에 대한 코멘트를 요청하는 기자들에게 “지금 브리핑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이후 차량 이동 중에 추가 보고를 받았다고 대변인은 전했다. 상황이 제대로 정리돼 바이든 대통령에게 전달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우려스럽다”→“안도한다”
계엄사태 발생에 대한 미국의 최초 입장은 “우려스럽다”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담당하는 커트 캠벨 국무부 부장관은 “중대한 우려(grave concern)”를 표했다. 국무부의 베단트 파텔 수석 부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한국 국회가 계엄령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 처리한 것과 관련해 “특정 국가의 법과 규칙은 해당 국가에서 준수돼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자 기대”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거기에 한국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 표결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그것도 같은 경우”라고 답했다. 윤 대통령이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를 존중할 것을 기대한 발언이다. 이어 팻 라이더 국방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한국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주한미군 태세 변화 여부에 대해 질문받자 “기본적으로 (주한) 미군에 영향은 없었다”고 답했다.
백악관은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철회한 후에야 “안도감을 느낀다”는 논평을 내놨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변인은 한국의 계엄 해제 관련 연합뉴스의 질의에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이 우려스러운(concerning) 계엄령 선포에 관해 방향을 바꿔 계엄을 해제하는 한국 국회의 표결을 존중한 것에 대해 안도한다”고 말했다. 대변인은 이어 “민주주의는 한·미 동맹의 근간”이라며 “우리는 계속해서 상황을 주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을 부를 때 그동안 미국 관계자들은 흔히 ‘남한(South Korea)’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계엄사태 이후에는 곳곳에서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라는 표현을 좀 더 많이 썼다. 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은연중에 강조한 셈이다. 美, 당혹감 숨기지 못해
계엄 선포로 인한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에는 보다 본격적인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다양한 주체가 발언했지만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감정은 ‘당혹스러움’이다.
캠벨 부장관은 4일(현지 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애스펀그룹 주최 안보행사(ASF)에 참석해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결정을 “심각한 오판”이라고 묘사하며 “매우 문제가 있고(deeply problematic)”, “불법적(illegitimate)”이라는 평가를 담아 말했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의 강건성을 강조하면서 국민의 의지와 입법기관의 의지로 계엄에 맞선 것이 “우리에게 위안과 자신감을 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민주주의 저력에 대한 칭찬으로 마무리했지만 외교관에게서 이 정도의 직설적인 발언이 나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캠벨 부장관은 미리 알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거의 모든 대화 상대방은 물론 외교장관, 재무장관, 한국 대통령실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는 핵심 인사들 스스로가 이 일에 매우 놀란 상태였다(deeply surprised by this)”고 덧붙였다. 또 “앞으로 몇 달간 한국은 도전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동맹(한·미 동맹)이 절대적으로 견고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거취가 불안정해졌다는 인식을 또렷이 드러낸 것이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같은 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외교장관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민주적 회복성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며 “모든 정치적 의견 불일치는 평화롭게, 법치에 따라 해소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캠벨 부장관에 비해 보다 외교적인 언사지만 그 속에는 비상계엄 사태가 민주주의를 해치는 것이었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이날 워싱턴에서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주최로 열린 대담에서 계엄 선포는 “미국에 깊은 우려(deep concern)를 제기했다”며 “우리는 한국의 민주적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윤 대통령은) 우리와 어떤 식으로든 상의한 게 없었다. 우리 역시 TV 발표를 보고 알게 됐다”고 전했다. 韓 외교력, 한순간에 후퇴
이번 사태는 향후 한국의 외교 무대에 작지 않은 상흔을 남길 전망이다. 당장 4일부터 이틀간 워싱턴DC에서 예정되었던 한·미 핵협의그룹(NCG) 회의와 1차 NCG 도상연습(TTX)은 무기한 연기됐다. 이 회의를 위해 미국에 국방부 관계자가 도착했지만 국방부 장관의 거취 등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회의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날 김용현 국방부 장관의 사직서가 수리됐다.
지난 10월 말 워싱턴DC에서는 한국과 미국 양국의 외교 및 국방 담당 장관 총 4명이 한자리에 모여 북한의 우크라이나 참전을 규탄하고 동맹의 강고함을 확인하는 ‘2+2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돌발적인 비상계엄의 선포와 이후의 소통 혼란은 이런 약속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많은 외교관들은 이번 사태를 대외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묻는 말에는 더더욱 답하기가 힘들다. 한국과 무언가를 도모하려 해도 윤석열 대통령의 지위가 흔들리고 내각 전원이 국민의 불신을 받게 된 만큼 누구와 상의하는 것이 적합한지를 판단하기도 어렵다. 그동안 애써 수립해 온 한·미·일 3국 간 동맹 체제에도 불안정성이 추가될 수밖에 없게 됐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