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달라 찾아 온 노숙인들 수백명···먹고살 길 찾아주는 게 제 일이죠” [강홍민의 굿잡]
입력 2024-12-16 09:20:57
수정 2024-12-16 09:21:03
이명식 노숙인 관리담당 공무원(중랑구청 사회복지과)
다사다난했던 2024년 한 해가 어느덧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비상계엄’으로 총체적 난국에 빠진 국정상황에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늘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인생의 밑바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살아가는 노숙인들에게 큰 형님이자 키다리 아저씨로 30여 년 째 노숙인 관리를 맡고 있는 이명식 씨 역시 그 중 하나다.
공무원을 시작할 무렵인 1989년부터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 노숙인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 해 온 그는 중랑구는 물론 노숙인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간 수천 건의 노숙인 민원을 해결하고, 인생바닥에 있던 그들을 다시금 일으켜 세워 사람답게 만든 그는 노숙인 계도 및 관리 공무에서는 베테랑으로 꼽힌다. 모두가 꺼려하는 일이지만 그 속에서 보람을 느낀다는 이명식 씨를 만나 <직업의 세계>를 들어봤다.
요즘같이 추운 겨울에도 밖에서 근무하시는 거죠.
“그렇죠. 이 면목역 광장이 내 일터니까요. 늘 광장을 순찰하면서 도움이 필요 없나 보고 있습니다.”
오다 보니, 광장, 그리고 주변 상가 근처에 앉아계신 분들이 많던데, 다들 얼굴을 아시겠네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요. 여기 몇 년을 있었는데요. 집이 어디인지, 어떤 사연들이 있는지 다 알지요. 예전에는 형님형님 그러더니 요즘에는 또 부장님이라 그래. 내가 부장도 아닌데(웃음)”
이 일 한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한 35년이 넘었지요. 1989년도에 기능직 공무원으로 중랑구청에 발령받아서 한 2년쯤 일하다가 사회복지과로 발령이 났어요. 그때부터 이 일을 했지요. 제가 올해 일흔둘(53년생)이에요.”
그럼 공무원으로 퇴직한 뒤에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으시군요.
“퇴직한지가 10년도 넘었지. 근데 퇴직한다니까 이 일을 할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럼 또 어쩔 수 없잖아요. 공공근로 계약직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그걸 10년 넘게 하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이 구체적으로 뭔가요.
“중랑구의 노숙인들을 관리하는 겁니다. 예전에는 면목역 광장에 노숙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요. IMF때만 해도 노숙인들 천지였지. 그 사람들을 노숙인 시설로 입소시키고, 아프면 병원 인계해주고, 노숙인 관련 민원 처리나 순찰을 하는 겁니다. 지금 광장 밖에 있는 사람들은 노숙인들이 아녜요. 다들 고시원이나 잘 곳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이 여기로 왔지만 지금은 돌아갈 집이 있고 하루하루 먹을 게 있잖아요. 그게 제 일이에요.”
"노숙인들, 시민들의 민원 처리...돈 없고, 잘 곳 없는 노숙인들에게 도움 주는 키다리 아저씨"
그 노숙인들을 어떻게 먹고 살게 해준다는 건가요.
“여기 오는 사람들은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낮이나 밤이나 늘 여기 광장에서 술 먹고 자는 거예요. 여기가 지하철역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술 취해 널 부러져 있는 노숙자들이 시민들한테 욕하고 시비 걸고, 민원이 장난 아니었다고요. 그렇다고 쫓아 낼 수가 있나. 누구나 있을 수 있는 광장이니까요. 노숙인들이 여기로 모이니 문제가 참 심각했지요. 그래서 이 사람들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어요. 뭐 사연 하나 둘쯤 없는 사람이 없어요. 돈벌이가 없는 사람들은 나라에서 해주는 기초수급자로 등록하면 어느 정도 돈이 나오잖아요. 근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게 뭔지, 어떻게 신청하는지조차 몰라. 그 사람들을 데리고 구청에 가서 기초수급자 신청을 해 주는 거예요. 그럼 고시원 방 하나는 얻어서 먹고 살 수는 있거든. 그게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거예요. 나 좀 살려달라고.(웃음)”
그럼 그동안 많은 분들을 도와주셨겠네요.
“아마 한 몇 백 명은 될 거예요.”
노숙인이라고 모두 기초수급자가 되는 건 아닐 텐데요. 방법이 있는 건가요.
“얼마 전에 노숙을 하는 어떤 여자가 찾아왔어요. 배에 복수가 차서 병원을 가야하는데 돈이 없으니 병원을 갈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살려달라고 절 찾아 온 거예요. 노숙자들을 받아 주는 병원이 있어 일단 거기에 데리고 갔는데, 병원에서는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는 거예요. 사망선고지. 돈은 없고 몸은 아파 죽겠다고 하니 얼마나 불쌍해요. 그래서 알아보니 또 주소가 중랑구로 안 돼 있고, 예전에 살던 남편과는 이혼했다는데 호적 정리가 안 돼 있었어요. 자식들도 있어서 연락했더니 죽어도 상관 안한대. 그럼 기초수급자로 신청이 안돼요. 이거 참 난감하더라고. 일단 아는 요양병원에 부탁을 하고 넣어놨지. 그리고 이혼을 하라고 얘기하고,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서 기초수급자로 만들어 줬지. 얼마 전에 병원서 연락 왔는데, 몸이 좋아졌다는 얘길 들었어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거네요.
“거의 그런 셈이죠.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젊을 땐 교도소 들락날락 거리다 몸이 아파 오갈 데 없는 친구도 있어요. 그냥 놔두면 죽는데 어쩌겠어요. 도와줘야지.”
대체로 노숙인들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을 텐데, 다가갈 때 무섭진 않으세요.
“무섭긴. 그 사람들이랑 지낸 지 수십 년이 돼서 대충 성향을 알지요. 가끔 제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은 대뜸 욕부터 하는 경우도 있긴 있어요. 한 몇 년 전에 중랑시장 안에 질이 좀 나쁜 노숙인들이 모여 있을 때가 있었어요. 하루는 뭐가 시끄러워서 가봤더니 한 녀석이 “니가 이명식이냐”하면서 빈병을 깨서 나한테 들이밀더라고. 그래서 “그걸로 나 찌르려고 하는 거냐? 한 번 찔러봐라”고 배를 들이밀었더니 무릎 꿇고 “죄송합니다 형님”이러더군요.(웃음)”
노숙인 관리라고 하는 게 절차나 보고시스템이 있나요.
“우선 민원이 안 나오게끔 면목동 광장을 비롯해서 주변을 잘 정리를 해줘야합니다. 그리고 민원이 생기면 단속하고, 그 근거로 사진촬영이나 결과보고를 해줘야 해요. 만약 새로운 노숙인이 중랑구로 왔으면 인적사항을 체크해 구청에 보고하게 돼 있어요.”
일하면서 가장 힘들 땐 언제인가요.
“사람이 죽었을 때지. 지금은 중랑구에 등록된 노숙인이 2~3명밖에 안 되지만 예전에는 그것보다 많았다고. 밖에서 자다가 사람이 죽으면 사망신고부터, 솔직히 골치가 아프죠. 인간적으로도 참 안됐고. 개인적 고충은 노숙인들이랑 같이 있다 보면 그 사람들 냄새가 저한테 배어요. 하루는 우리 순찰차로 노숙인을 태워 준 적이 있었는데 집에 갔더니 아내가 냄새가 너무 역하다고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 난 무슨 냄샌지 모르죠. 아무리 씻어도 냄새가 가시질 않더라고요. 그때 고생 좀 했죠.(웃음)”
일 자체가 힘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보람될 때도 많겠어요.
“하루 한 끼도 못 먹던 사람을 기초수급자로 만들어 주면 멀리서 얼굴만 봐도 달려와서 인사합니다. 밥 한 끼 대접하겠다고 극구 식당을 데리고 가는데, 가면 지가 사나요, 제가 사지.(웃음) 참, 요즘같이 추운 겨울에 얇은 옷 입고 덜덜 떨고 있는 노숙인들한테 제 외투를 벗어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서 마누라한테 혼도 많이 나긴 했죠.(웃음)”
노숙인 관리를 하시면서 바라는 점이 있으세요.
“워낙 요즘엔 지원체계도 잘 돼 있고, 이렇게 언론에 나가면 또 주변에서 도와주는 분들이 많아요. 참 감사하죠. 하나만 말씀드리면, 노숙인들이 병원을 갈 땐 자질구레한 병으론 잘 안 가요. 진짜 심각하거나 죽기 직전에 간단 말이죠. 근데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갔을 때 진료비가 천원이라도 밀려 있으면 안 받아줘요.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라 사정을 했는데도 안 되더라고.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어요. 이해는 해요. 병원도 다 체계가 있어 그렇겠지만 그냥 제 짧은 생각으론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그 다음 병원비를 해결하면 어떨까 싶어요.”
30년 넘게 이 일을 하셨는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하실 계획이신가요.
“내년에 끝납니다. 은퇴해야죠. 제 나이 칠십이 넘었고, 이제 다른 걸 좀 해봐야지요.”
그래도 구청에서 안 놔주면 어떡하죠.
“그땐 뭐···(웃음)”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