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등에서 빠져나온 글로벌 자금이 독일 시장으로 급속히 유입되고 있다. 이에 따라 주가는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독일 주요 기업으로 구성된 DAX지수는 연초 대비 16% 이상 상승하며 사상 최고치에 근접했다. 반면 ‘MAGA’를 외친 미국의 S&P500지수는 최근 상승분을 반납하며 –1.8% 하락했다.
수년간 미국 시장 대비 부진했던 독일 증시가 올 들어 글로벌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독일 대표 방산기업 라인메탈의 주가는 같은 기간 80% 이상 폭등했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유럽연합(EU) 시가총액 ‘톱10’ 기업 중 독일 기업은 하나(SAP)뿐이었지만 지금은 지멘스, 도이치텔레콤까지 포함되며 국가별 비중 1위로 올라섰다.
시장의 열기와 달리 독일 경제는 여전히 위태위태하다. 독일 정부는 올해 0.3% 성장을 예상했지만 독일산업연합(BDI)은 마이너스 0.1% 성장 가능성을 경고했다. 최근 몇 년간 “유럽의 강자에서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다”는 조롱을 받아온 독일. 이 독일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독일의 각성지난 2월 말 독일의 차기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살폈다. 재무장관이 건넨 보고서는 암울했다. 독일 경제는 2년째 침체에 빠져 있었고 앞으로 4년간 1300억 유로의 예산 부족이 예상됐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미국 백악관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질책하며 미국이 유럽의 안보를 책임지는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메르츠는 결단을 내렸다. “독일이 변해야 한다.”
3월 4일(현지 시간) 메르츠는 준비한 칼을 빼들었다. 그는 연정 회의가 끝난 후 기자회견에서 “독일이 유럽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위협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메르츠는 국방비 조달에 필요한 경우 국내총생산(GDP)의 1%가 넘는 부채를 허용하도록 기본법(헌법)의 부채한도 규정을 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독일이 20년 넘게 고수해온 재정 보수주의 원칙을 완전히 뒤집는 대전환이었다.
그간 독일은 헌법에 재정준칙을 규정하고 정부의 재정적자를 GDP의 0.35% 이내로 묶어 놨다. 이른바 ‘부채 브레이크(Schuldenbremse)’ 준칙이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2009년 독일의 헌법인 기본법 109조 3항과 115조에 명시해 놓은 내용으로 2016년부터 시행됐다. 새로운 시대독일은 오랫동안 긴축 재정을 고수한 모범국가였다. 미국과 중국 등 세계 각국이 정부 지출을 늘리며 천문학적 재정적자를 기록할 때도 독일만큼은 정부부채 비율을 60%대로 유지하며 균형 재정을 지켰다.
통일 이후 동독 재건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고 2008 유럽 금융위기 당시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을 이웃나라들로부터 깨달았기 때문이다. 2011년 유럽재정위기 당시 재정건전성을 지키지 못한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오랜 긴축은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다. 독일 경제는 2023년 -0.3%, 2024년 -0.2%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역성장을 피하지 못했다. 올해도 전망은 밝지 않다. 독일 정부는 0.3% 성장을 예상하고 있지만 독일산업연합은 -0.1%의 역성장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메르츠의 발표는 곧 독일 경제에 걸린 ‘제동’을 푼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그가 언급한 ‘필요한 모든 조치’라는 표현은 2012년 유로존 위기 당시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무엇이든 하겠다(Whatever it takes)”며 막대한 돈을 풀었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외신은 “메르츠의 드라기 모먼트”라고 평가했다.
시장은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예상한다. 메르츠는 향후 10년 동안 5000억 유로(약 770조원) 규모의 특별 기금을 조성해 인프라 투자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연방정부 예산 4657억 유로(약 715조원)를 뛰어넘는 규모다. 여기에 국방비 제한을 풀 경우 국방 특별 예산만 4000억 유로(약 620조원) 추가 편성이 예상된다. 1000조원이 넘는 막대한 투자 규모다.
이날 발표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독일 증시는 폭등했다. DAX40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3.55% 상승했고 유럽 종합지수인 유로스톡스50도 1.85% 올랐다. 이날 미국이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한 관세정책을 발표하면서 글로벌 시장이 전반적으로 하락세를 보였음에도 독일 증시는 뜨거웠다. 화학 기업 바스프는 10.71% 상승했고 에너지·인프라 기업인 지멘스는 8.56% 급등했다. 특히 독일 대표 방산업체 라인메탈의 주가는 7.17% 뛰어오르며 국방비 확장 정책의 직접적인 수혜를 받았다.
국채 시장에서도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 국채금리는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다. 30년물 국채 수익률이 1998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으며 10년물 국채금리는 하루 만에 30bp(0.3%포인트) 이상 급등하며 장중 최고 2.7975%를 기록했다. 향후 대규모 국채 발행이 예상됨에 따라 국채가격이 하락한 것이다.
외환시장에서도 경기부양 기대감에 유로화가 초강세를 보였다. 유로화는 전날보다 1.5% 이상 급등하며 1.078달러 선에서 거래됐다. 이는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지속된 하락세를 회복한 수준이다.
골드만삭스는 ‘유럽 주식의 새로운 시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하며 독일 경제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모건스탠리는 이번 부양책이 독일 GDP를 올해 0.2%, 내년 0.7% 증가시키는 효과를 낼 것으로 전망했다. 외신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에 버금가는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넘어야 할 산은 많다.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으려면 설득과 합의 과정이 지난하다. 녹색당은 기자회견을 열어 특별기금 조성을 위한 헌법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밝혔다.
단 “최종적으로 공동 해결책을 찾는 게 목표”라며 구체적 예산 내역을 두고 계속 협상하겠다는 여지를 남겼다. 녹색당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는 “우리는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위해 방위 지출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불과 작년까지도 “틀에 박힌 데다 빠른 돌파구조차 없다”는 혹평을 받았던 독일이다. 다시 전차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변신은 성공할 수 있을까.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