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자리에 다시 호텔이…분양시장 불황에 설자리 좁아진 고급 오피스텔[비즈니스 포커스]
입력 2025-04-11 15:50:59
수정 2025-04-11 15:50:59
값비싼 서울 부동산 개발부지에 호텔이 돌아오고 있다. 분양시장이 급격히 움츠러들면서 강남이나 용산 등 땅값이 비싼 지역의 고급 주거시설 분양 또한 예전 같지 않아서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펜디가 인테리어를 맡아 화제가 됐던 강남구 논현동 레지던스 개발 프로젝트 ‘포도 바이 펜디 까사’도 공매 시장에 나올 전망이다.
분양시장과 달리 엔데믹 이후 관광객 수가 증가하자 숙박업은 다시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규모가 큰 프라임급 건물들 상당수가 복합시설로 계획된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분양 호실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건물 가치 상승에 도움이 되도록 시설 내에 호텔을 적극 입점시키고 있다. 저물어가는 고급 오피스텔 열풍
지난 몇 년간 중국 관광객 감소와 코로나19 확산으로 하향세를 탔던 호텔시장에선 급격한 지가 상승을 틈타 시설을 매각하는 사례가 흔하게 발생했다. 강남구 청담동 소재 프리마호텔 부지 거래가 대표적이다.
‘르피에드’ 브랜드로 알려진 부동산 시행사 미래인은 4638㎡ 규모의 옛 프리마호텔 부지(강남구 청담동 52-3)를 3.3㎡(토지면적 기준)당 2억8000만원, 약 4100억원에 사들였다. 해당 부지는 2019년 ‘르피에드’(현 르피에드 문정), 2020년 ‘르피에드 인 강남’ 등 분양 ‘완판(계약 마감)’ 사례에 힘입어 같은 하이엔드 오피스텔 형태인 ‘르피에드 청담’으로 개발될 예정이었다. 오피스텔이나 레지던스는 분양가상한제 등 공급가격에 대한 규제가 적용되지 않아 지가가 높은 지역에 하이엔드 콘셉트로 대거 개발이 됐다.
그런데 2022년 하반기 미국발(發) 기준금리 인상 이후 고급 오피스텔 시장은 차갑게 식었다. 공급가격이 3.3㎡(공급면적 기준)당 1억원이 넘는 수준으로 너무 높았던 데다 웃돈을 노리고 접근했던 투자자들도 높은 이자 부담과 커지는 시장 불확실성에 분양받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분양시장에 거품이 빠지면서 고급 주거시설 조성에 집중했던 유명 시행사들의 토지 상당수가 EOD(기한이익상실) 위기에 몰렸다. EOD란 채권자인 금융기관이 채무자가 부채를 상환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만기 전에 채권 회수에 나서는 행위를 뜻한다. 부동산 개발사업의 경우 EOD를 맞게 되면 토지 및 사업권에 대한 공매절차가 진행된다.
2023년에는 ‘루시아 청담 더 테라스’, 2024년에는 ‘아스턴 역삼’ 부지가 공매에 나왔다. 이 같은 고급 주거시설이나 오피스텔은 사전 분양의향서가 분양 호실의 50%가량을 충족해야 고금리 단기자금인 브리지론이 본PF(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로 넘어가며 사업이 본격 진행되는데 이들 단지에 대한 사전의향서가 많이 걷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르피에드 청담’ 부지도 곧 공매에 넘어갈 수 있다는 추측이 나왔다. 미래인이 대전 둔산동에 공급한 ‘그랑 르피에드’도 분양률이 낮아 위기설이 돌았지만 시공사인 대우건설이 채무보증에 나서면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르피에드 청담’의 경우에는 정해진 시공사도 없었고 이미 부지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이 관련 업계에 파다했다.
결국 신세계의 부동산 개발 그룹사인 신세계프라퍼티가 지난해 5월 지분 투자에 나서면서 ‘르피에드 청담’은 위기를 넘겼다. 프로젝트 시행자인 신세계청담PFV 지분 절반을 보유하게 된 신세계프라퍼티는 이곳에 최소 5성급 이상의 하이엔드급 호텔을 개발해 입점시킬 계획이다. 호텔에서 고급 오피스텔로 개발되려던 부지에 다시 호텔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호텔 개발로 수익·용적률 다 잡아
부동산 업계에선 신세계프라퍼티가 위기에 빠진 프로젝트에 전격 투자하는 대신 기존 자산가치 대비 저렴한 시세에 지분을 매입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후 해당 개발사업은 급진전됐다. 올해 2월 서울시의 지구단위계획이 결정고시되면서 49층 높이(195m)의 용적률 800% 규모 복합시설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지구단위계획에 따라 일반상업지역과 제3종일반주거지역이 섞여 있던 해당 부지는 일괄 일반상업지역으로 종상향됐다. 지난해 3월 서울시가 역세권 활성화 사업 대상지를 주요 간선도로변(노선형 상업지역)까지 확대했는데 도산대로변의 프리마호텔 부지가 첫 적용 대상이 됐다.
역세권 활성화 사업 대상에 포함되면 용적률을 최대 1100%까지 높이고 용도지역이 중첩된 상업지역은 ‘복합용도’를 도입하면 일반상업지역으로 용도지역을 상향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서 복합용도란 전체 용적률의 절반 이상을 오피스텔이 아닌 오피스 용도로 채우거나 관광 숙박시설을 설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시는 ‘외국인 관광객 3000만 관광도시’를 목표로 충분한 숙박시설 공급을 위해 이 같은 규제완화 방안을 도입했다. 결과적으로 호텔 개발계획으로 인해 용적률 혜택을 보게 된 것이다.
신세계프라퍼티 관계자는 “호텔 외에 다른 상품 구성이나 세부적인 개발계획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면서도 “하이엔드 호텔을 입점시킬 계획인 것은 맞다”고 말했다. 글로벌 호텔·리조트 체인인 아만그룹의 최상위 브랜드 ‘자누(JANU)’가 입점할 것이 유력하다.
이처럼 호텔이었던 곳에 다시 호텔이 운영되게 된 사례는 또 있다. 강남구 역삼동 662-7 소재 SM그룹 강남사옥은 ‘파고다호텔’, ‘케이팝호텔’ 등으로 운영되던 숙박시설이었다. 2015년 ‘관광숙박시설 확충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1267㎡를 증축했지만 2017년 경매에 나오면서 SM그룹이 낙찰을 받았다. 당시에는 사드(THAAD) 문제로 중국 관광객이 크게 줄면서 감정가의 83.5%인 437억원에 매각됐다. 이 건물은 2023년 기존 관광숙박시설에서 업무시설로 용도가 변경됐다.
그런데 미국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 블랙스톤이 해당 건물을 1200억원에 인수해 다시 호텔로 전환할 계획이다. 장현주 컬리어스코리아 이사는 “최근 관광객 증가와 숙박 객단가 상승으로 인해 많은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호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며 “글로벌 시장에선 오피스, 주거시설 경기가 좋지 않아 상대적으로 호텔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겠나”라고 분석했다.
글로벌 부동산컨설팅 기업 컬리어스에 따르면 2024년 국내 호텔 투자규모는 2조9000억원으로 2023년 1조9000억원 대비 1조원가량 늘었다. 분양 리스크 줄인 복합시설
최근 프라임급 건물은 이처럼 일부가 호텔로 구성된 복합시설로 개발하는 것이 ‘대세’다. ‘조선팰리스 서울 강남’이 위치한 역삼동 ‘센터필드’(옛 르네상스호텔 부지)처럼 저층과 지하는 상업시설, 지상은 호텔과 오피스 또는 주거시설 등이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호텔 입점을 통해 고급스러움과 주말 유동인구까지 잡는 한편 분양이나 임차 물량을 줄일 수도 있다.
밀레니엄 서울 힐튼, 르메르디앙 호텔(옛 리츠칼튼 호텔), 더리버사이드호텔 부지에도 이처럼 특급호텔이 입점하는 형태의 복합시설로 개발될 예정이다.
유엔사 부지를 개발해 조성되는 ‘더파크사이드 서울’에는 국내 최초로 럭셔리 호텔 브랜드 ‘로즈우드’가 입점한다. 일레븐건설은 이 단지에 복합문화시설과 호텔은 물론 775호실 규모 오피스텔, 400가구 주상복합 아파트도 조성할 계획이다. 오피스텔은 오는 6월부터 공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건물에 호텔이 입점하면 격이 높아지고 전반적인 가치가 올라갈 수 있지만 호텔을 단독 건물로 운영하기에는 객실 점유율이 떨어지는 등의 리스크가 크다”며 “대규모 건물은 전반적인 구성을 다양화해서 공실을 줄이고 저녁이나 주말까지 오피스 밀집 지역의 유동인구를 늘릴 수 있도록 계획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