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경영’ 선언한 P그룹사···현장에선 괴롭힘으로 '몸살' [강홍민의 끝까지 간다]

P그룹, 올 초 ‘인권경영’ 선언문 발표로 모두가 존중받는 기업문화 약속
제보자 ㄱ씨, P사 입사 후 상사로부터 지속적인 폭언 받아
사측 “괴롭힘 신고 접수 즉시 조사 착수···현장직서 내근직으로 분리조치도”



국내 대기업인 P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해당 사건의 대처를 두고 논란이다. 상사의 폭언과 욕설이 반복됐고, 피신고인에 대한 물리적 행위도 있었지만 해당 기업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올 초 이 기업은 구성원 모두가 존중받는 기업 문화를 조성하겠다는 인권경영 선언문을 발표해 더욱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입사 후 지속적인 폭언 이어져
2022년 5월 P사에 입사한 제보자 ㄱ씨는 입사 이후 지속적인 상사의 폭언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ㄱ씨가 현장에서 들은 폭언은 ‘이 XX야’' 등의 인신공격성 발언과 ‘회사에서 만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등의 협박성 발언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괴롭힘은 회식 장소에서도 이어졌다.

당시 약 복용 중이었던 ㄱ씨는 회식장소에서 상사가 권하는 술잔을 거부했다. ㄱ씨는 회식자리에서 상사 ㄴ씨가 술을 왜 안 먹느냐고 나무라자 ‘약을 복용해서 술을 못 먹는다’, ‘예전에 술 때문에 응급실에 간 적 있다’는 이유로 술을 거부했다.

하지만 ㄴ씨가 ‘술 먹고 오토바이는 타도 된다’, ‘우리랑 마시기 싫어서 안 먹는다’며 술을 강요했다고 ㄱ씨는 주장했다.

ㄱ씨는 상사인 ㄴ씨가 자신의 멱살을 잡아끌고 주먹으로 밀치는 행위도 했다고 주장했다. ㄴ씨는 ㄱ씨가 지시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폭언을 했고, ㄱ씨는 “제가 뭘 잘못했나”라며 언성을 높였다.

이 과정에서 ㄴ씨가 ㄱ씨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밀쳤고, 그 행동에 화가 난 ㄱ씨는 손에 들고 있던 랜턴을 파티션에 내리쳤다. 각각 두 사람은 상대방의 위협행동이 먼저 선행됐다고 주장했다.

사측은 피신고인인 ㄴ씨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해당 기업의 직장 내 괴롭힘 신고센터 관계자는 “피신고인과 참고인이 동일한 진술을 했고, 어떤 행동이 먼저 선행되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라고 ㄱ씨에게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 부친이 ‘직장 내 괴롭힘’ 신고···회사 측“신고인의 업무태만이 원인”
이후 제보자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혈변과 불안장애가 반복돼 정신과 치료를 병행했다. ㄱ씨를 지켜 본 그의 아버지는 지난해 7월 P사에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다. 그의 부친은 P사에서 30년 간 근무 중인 근로자였다. 하지만 괴롭힘은 인정되지 않았다.

사측은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접수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조사 기간 중 신고인의 의견을 반영해 교대근무에서 상주근무로, 현장근무에서 사무실 근무로 분리 조치를 시행했다.

더불어, 해당 사건의 객관적 조사를 위해 노무법인 등 제 3기관을 통한 조사도 함께 실시했으나 직장 내 괴롭힘에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해당 부서 관계자는 “직장 내 괴롭힘은 전후 상황을 따져야 한다”면서 “전후 상황을 고려했을 때 피신고인이 신고인을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어 한 행동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욕설·폭언 등이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신고인이)업무 태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상사가 뭘 알아오라고 할 경우, (신고인이) 말한 것만 확인해 오는 경우가 있다. 보통사람이라면 A를 살펴보라고 하면 A부터 E까지 파악을 하는데, 신고인은 상사가 지시한 A만 보고 온다”면서 이 같은 행태를 직무 태만으로 내다봤다.

제보자는 이 같은 사측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은 '사용자 또는 노동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노동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익명을 밝힌 한 노무사는 “근로자의 업무 미숙이 상사의 지속적인 폭언과 욕설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면서 “사측이 과도하게 피신고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또 다른 노무사는 “멱살을 쥔 상황은 우발적으로 볼 순 있으나 지속적인 인격모독성 발언은 근무환경을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면서 “공장 내 근로환경 특성상 한 번의 실수로 자칫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으나 하급자에게 지속적인 폭언은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복수의 노무 전문가들은 제조 공장 특성상 오래 전부터 뿌리째 박혀 있던 욕설과 폭언 등의 행위는 P사 뿐만 아니라 제조업 현장 내에선 여전히 남아 있는 악습이라고 입을 모았다. 현장업무가 워낙 위험하고 사고 발생률도 높아 군대식 상명하복 시스템이 존재하는 곳이 다수이지만 직장 내 괴롭힘의 근간인 행위들이 정당화 될 순 없다고 강조했다.

차별·무시행위 반복되면 괴롭힘으로 인정 사례 늘어
최근 직장 내 괴롭힘 사례를 보면 물리적 폭언과 폭행이 가해지지 않더라도 특정인의 따돌림 및 차별, 무시 등의 행위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괴롭힘으로 간주하는 판례가 늘고 있다.

P사 역시 임직원들의 직장 내 괴롭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매뉴얼 및 신고방법’에 대한 권고 메일을 주기적으로 보내는 것으로 파악됐다.

해당 메일에는 ‘윤리경영 캠페인-5대 근절행위’로 동료·부하직원·상사 등에게 모욕적이거나 무례한 언행으로 상대방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비인격적 언행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여기에 인신공격성 발언이나 부적절한 호칭 사용 등이 반복될 경우 상급자 또는 법무실 인권센터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안내되어 있다.

P사의 한 관계자는 이번 일과 관련해 “(해당 근무지가) 군대로 비유하면 전방 GOP 같은 곳이라 다른 곳보다 군기가 세고, 사고가 발생할 수 있어 안전에 대해 강박이 있다”면서 “이번 일로 피신고인에 대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같은(욕설·폭언 등) 행동은 안 된다는 교육을 실시했다”고 언급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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