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AI ‘테마주’처럼 여겨지던 전력 관련주가 올해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원자력 대표주자인 두산에너빌리티는 8월 13일 기준 3개월간 110.8% 뛰었고 변압기를 수출하는 효성중공업(123.9%), HD현대일렉트릭(37.3%), LS일렉트릭(28.6%) 역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룹사 시가총액 순위도 뒤집혔다. 두산에너빌리티가 2008년 이후 17년 만에 시가총액 10위권에 진입하면서 두산그룹은 상반기 포스코·카카오·셀트리온 등을 제치고 시가총액 기준 7위 그룹사에 올랐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전력주가 앞으로도 추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이미 많이 올랐다는 부담감이 공존하고 있다.
증권가는 전력주가 올해 급등하며 단기 조정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전력망 인프라 확충이 불가피한 시대적 과제라는 점에서 장기적 상승 여력이 크다고 평가한다. 실적 기반 성장 가능성은 물론 미국발 호재까지 반영할 수 있는 종목으로 전력주를 주목하며 주가 전망치를 상향하고 있다. S&P500 상승률 5배 앞지른 전력주ETF 시장에서도 원전·전력망 테마가 나란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원자력 관련 기업과 전력 인프라 기업을 담은 ‘HANARO 원자력iSelect’는 3개월간 67.3% 급등했다. ‘HANARO 전력설비투자’, ‘KODEX AI전력핵심설비’ 등도 50% 뛰었다.
전 세계적으로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 폭증과 공급망 병목 현상이 이어지자 글로벌 기업을 담은 ETF 역시 고공행진했다.
신한자산운용이 지난 5월 20일 상장한 SOL 미국원자력SMR ETF(상장지수펀드) 순자산은 상장 석 달 만에 2000억원을 돌파했다. 해당 ETF는 우라늄 채굴부터 원자로 운영 그리고 SMR(소형원자로) 대표 기업을 아우르는 미국 원자력 산업 밸류체인 18종목에 투자하는 상품이다. 상장 이후 수익률은 48.60%로 같은 기간 S&P500 지수 상승률(8.86%)을 크게 앞섰다. 미국, 송전선 70%가 교체 대상
전력주와 원자력주가 급등하는 이유는 전기가 부족해서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가 급증했고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시장에서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까지 맞물리면서 관련 기자재와 설비를 공급하는 기업들의 실적과 시가총액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예견한 사람이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2024년 베를린에서 열린 보쉬 커넥티드 월드 행사에서 “작년에는 칩이 부족했는데 내년이 되면 세계는 전기와 변압기 부족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세계 최고의 AI·전기차 기업 수장이 공개적으로 변압기 수급난을 언급하면서 전기가 AI 시대의 전략자산임을 보여준 장면이다.
그는 이어 “다음 부족은 전기가 될 것이고 내년엔 모든 칩을 구동하기에 충분한 전력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가 쓰는 전기는 2024년 415TWh에서 2030년 945TWh로 거의 두 배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AI 산업이 계속 성장하면 전기 수요는 지금 예상보다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전기는 기술혁명을 움직이는 ‘혈류’와 같다. 데이터센터의 다른 이름이 ‘전기 먹는 하마’인 이유도 AI를 구동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기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다. 수십 년간 투자가 부족했던 주요 선진국의 낡고 경직된 전력망은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유럽 역시 전력망 노후화가 심각하다. IEA는 각국이 기후 목표를 지키려면 10년간 연간 3000억 달러 수준이었던 전력망 투자 규모가 2030년까지 매년 6000억 달러로 두 배가량 늘어나야 한다고 분석했다. 맥킨지는 데이터센터만으로도 2030년까지 전 세계 발전소와 송배전망(T&D)에 1조3000억 달러(1796조6000억원)가 필요할 것으로 전망했다. “5년치 일감 확보” 국내 변압기 기업 더 오른다
글로벌 수요가 치솟자 국내 기업들에도 주문이 밀렸다. 가장 뜨거운 곳은 변압기 회사다. 변압기는 수급 불균형이 이어지면서 ‘공급자 우위’ 시장이 형성됐다. 수요는 많은데 납기가 길어서 단가는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주문이 밀려 있는 상황이다.
한국무역협회 무역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대형 변압기의 대미 수출액은 3억8599만 달러(5289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21.6% 증가했다. 전체 수출액 6억6420만 달러 중 58%가 미국에서 발생한 것이다. 영역을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로 넓히면 수출 비중은 64%로 더 늘어난다. 캐나다향 수출액도 4107만 달러로 지난해 상반기 대비 154% 성장했다.
미국 세관 집계에 따르면 한국산 변압기 수입 물량은 작년 약 350기로 교역 대상국 가운데 최대였다. 약 150기를 공급한 대만과 100기에도 못 미친 중국을 압도했다. 미국 공장 생산능력 면에서도 HD현대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이 각각 1, 2위를 달린다. 작년 기준 연간 생산능력은 각각 120기와 100기다. 두 회사는 앨라배마와 테네시에 있는 공장 증설을 진행 중이다.
영국(6378만 달러)은 올 상반기 수출액이 64.8% 증가하며 미국에 이어 변압기 수출국 2위에 올랐다. 슈나이더일렉트릭, 지멘스, ABB 등 유럽 전력기기 업체 대비 가격이 저렴하고 납기를 제대로 지킬 수 있는 강점이 유럽에서도 통했다는 평가다.
변압기는 발전소에서 갓 만들어진 전력이 먼 곳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높은 전압으로 변환해주는 역할을 한다. 비유하자면 송전망 내에서 피가 돌게 하는 ‘심장’ 역할을 하는 셈이다.
글로벌 변압기 교체 수요는 한국의 빅4(HD현대일렉트릭,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일진전기)가 흡수하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267260)은 올해 2분기 매출 9062억원, 영업이익 2091억원을 기록했다. 매출과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2%, 0.5% 소폭 하락했지만 지속적인 글로벌 전력인프라 투자 확대 기조 속에 전력기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8.2%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2분기 23.1%를 기록하며 상승했다.
상반기 누계 수주액은 23억3100만 달러(약 3조2000억원)를 기록했다. 수주잔고는 65억5000만 달러(약 9조원)로 전년 동기 대비 24.7% 증가했다.
증권가는 이들 기업의 주가가 추가 상승 여력이 충분하다고 본다. 인공지능(AI) 서비스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미국, 유럽, 중동 등에서 발주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교보증권은 지난 7월 말 기준 48만원대였던 HD현대일렉트릭의 목표주가를 68만원으로 제시했다.
7월 28일 유가증권시장에서 효성중공업은 14.31% 오른 128만6000원에 마감했다. 산일전기(13.55%), 일진전기(4.43%), LS일렉트릭(1.57%) 등 다른 전력기기 관련주도 일제히 상승했다. 효성중공업의 올해 주가 상승률은 216%에 달한다.
전력기기 슈퍼사이클이 실적으로 확인되면서 주가가 급등했다는 설명이다. 효성중공업은 지난 2분기 매출 1조5253억원, 영업이익 1642억원으로 각각 전년 동기 대비 27.8%, 161.9% 증가했다고 이날 밝혔다. 이동헌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 관세 불확실성에도 역대 최대 수주 실적으로 전력기기 시장이 공급자 우위 시장임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전력기기 수출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효성중공업은 올 2분기 연결 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27.8% 성장한 1조5253억원, 영업이익은 162.1% 증가한 1642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분기 기준으로 역대 최대를 찍었다. 미국 법인 영업이익률은 35%를 웃돌았다. 2분기 신규 수주는 2조1970억원이며 수주잔고는 10조7000억원에 달한다. 한국투자증권은 7월 말 효성중공업의 미국향 수주 실적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며 목표가를 22% 올린 155만원으로 조정했다. 신한투자증권은 지난 2월 제시했던 목표주가 62만원을 113% 올려 132만원의 목표주가를 제시했다. 눈높이를 두 배 넘게 상향한 것이다.
LS일렉트릭은 올해 2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5.35% 늘어난 1조 1930억원을 기록했다. 북미 초고압 변압기 수출 호조가 이어진 데다 글로벌 빅테크 데이터센터 프로젝트 매출이 본격 반영됐다. 특히 초고압 변압기 수주잔고는 사상 최대치인 1조8000억원을 기록했다. 이미 5년치 일감이 쌓여있다.
일진전기는 2028년까지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일진전기의 올 2분기 연결 기준 매출은 5228억원으로 전년 대비 20.5%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376억원으로 53.4% 늘었다. 수익성 개선의 핵심은 중전기 부문이었다. 해당 부문 매출은 1920억원으로 전년 대비 131.7%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239억원으로 118.5% 늘었다. 분기 중 약 300억원 규모의 미국향 변압기 출하가 지연되며 하반기 매출로 이연될 전망이다. 수주잔고는 약 19억 달러(2조6309억원)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현재 보유한 수주잔고 중 절반 이상이 미국 물량으로 추정된다. 유안타증권은 일진전기가 중전기 부문 고성장으로 수익성 방어에 성공했다며 목표주가를 기존보다 높인 4만7000원으로 제시했다.
증권가에서는 글로벌 전력기기 수요 확대가 단순한 사이클이 아니라 구조적 장기 국면에 진입했다고 진단한다. 미국, 유럽, 중동 등에서 잇따르는 대규모 발주와 장기 수주잔고는 향후 수년간 안정적인 실적 모멘텀을 뒷받침할 것이란 평가다.
장재혁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변압기, 초고압 케이블 등 핵심 설비는 제조능력, 기술인력, 원자재, 리드타임 제약으로 공급 부족이 구조적으로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며 “송전망, 신재생 인프라는 착공까지 최소 5년 이상 걸리는 만큼 관련 기업들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수주 환경을 장기간 누릴 전망”이라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