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혼자서도 배움을 터득할 수 있는 시스템, 스타트업이 만든다 [배움의 씨앗을 심다]

[텍스트브이로그] 좋은 학습 앱이 어린이의 삶에 만들어 내는 변화



[한경잡앤조이=에누마 김은파 님] 추운 겨울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봄. 사무실에서는 태블릿PC 수백 대가 전국 각지 어린이들을 만나러 갈 준비를 막 마친 참이다. 가정과 지역아동센터 등에 배포되는 이 태블릿에는 한글과 수학 학습 앱이 탑재되어 있어 태블릿 하나만 있어도 어린이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다. 정성 들여 만든 앱이 어린이들을 만나는 광경은 언제 봐도 설레고 기쁘지만, 지금 이 만남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특별하다. 이 태블릿이 향하는 곳은 좋은 학습 도구를 누구보다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어른들의 관심과 도움을 받지 못해 기초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가 생각보다 많다. 양육자가 경제적 여건 때문에 아이의 학습을 돌보기 힘든 경우도 있고, 이주 배경의 양육자가 언어 장벽 때문에 아이에게 한글로 된 책을 읽어 주거나 읽기 학습을 돕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산간벽지에 살고 있어 집 외의 장소에서 학습 지원을 받기 힘든 아이들도 있다. 나이로는 6~8세, 글자에 관심을 보이거나 읽기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의 어린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초등 2, 3학년이어도 아직 읽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참여 대상이 된다. 목표는, 어른이 옆에 붙어서 도움을 주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어린이가 스스로 앱을 사용하며 읽기와 수학의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어른의 개입 없이도 플레이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디자인된 학습 앱은 이런 환경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책 읽기를 생각해 보자. 세상에는 좋은 책이 수없이 많지만 책을 고르고 읽어 줄 사람이 없는 환경이라면 어린이가 이런 책을 만나 읽기의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아직 글을 모르는 어린이가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올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앱을 통해서는 혼자서도 책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 가능하다. 손가락 하나로 책을 고를 수 있고, 글자를 몰라도 읽어 주기 기능의 도움을 받아 내용을 이해하고 책과 친해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책 읽기가 책을 매개로 한 어린이와 어른 사이의 상호작용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상호작용이 매우 적거나 아예 없는 상황이라면 학습 앱은 더욱 풍부한 문해 환경을 조성하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특히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학습자와 교수자가 일상적인 대면 교육 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지난 2년은 학습 앱이 더욱 유용하게 사용된 시기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장기화하면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난 상황에서 태블릿은 어린이들에게는 친구가 되고 양육자들에게는 어깨의 짐을 덜어주는 도우미가 되었다. 앱을 통해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습득해야 할 모든 것을 배우지는 못한다 해도 읽기와 셈하기 같은 특정 영역에서의 학습 공백은 메울 수 있었고, 학습 결손이 누적되며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들에게는 각자의 수준과 속도에 맞춰 학습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실 2020년에 처음 태블릿 기반의 취약계층 교육 지원 사업이 시작될 때만 해도 나의 마음속에는 어린이들이 정말 앱을 통해 스스로 학습할 수 있을까 하는 약간의 염려가 있었다. 그 전에 에누마의 앱이 주로 사용된 현장은 저소득 국가나 난민 캠프와 같이 환경이 열악한 곳이었다. 그에 비하면 한국에서는 각종 교구와 영상, 게임 등을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과연 어린이들이 앱만 가지고도 즐겁게 학습을 이어가고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 완전히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랬기에 내가 개발에 참여한 앱이 지난 3년에 걸쳐 2,5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의 일상에 만들어 낸 변화의 순간들을 지켜본 것은 나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었다.

앱을 통해 어떤 점이 좋아졌고 무엇을 배웠는지 어린이들에게 물었을 때는 이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글자를 잘 몰랐는데 이제 또박또박 읽을 줄 알게 되었다고. 전에는 받침을 읽는 게 어려웠는데 잘할 수 있게 되었다고. 또, 학교에서 받아쓰기 100점을 맞았다고. 공부가 재미있다거나 글자 공부가 좋아졌다고도 말한다. 어린이들이 느끼는 변화는 학습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아서, 앱으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 할머니 등 주위 어른이 칭찬해 줘서 좋았다는 대답도 많았다. 이처럼 스스로 글자를 알아보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느끼는 성취감, 주위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받으며 향상된 자존감은 이후 이들이 학습을 지속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더욱 반가운 것은 아이뿐만 아니라 양육자도 긍정적인 변화를 함께 경험한다는 점이다. 양육자들은 예전에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 적절한 교육 방법에 대해 잘 모르거나, 한국어 발음이나 어휘 등에서 부족함을 느끼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아이에게 답답함을 느끼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한다. 생계활동이 바빠 아예 아이의 학습을 챙길 엄두조차 못 낸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아이에게 적절한 지원을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면, 아이가 태블릿으로 학습을 시작하면서부터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아이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게 된다. 물건이 배달 왔을 때처럼 일상생활에서 글을 읽을 기회가 생겼을 때 스스로 해 보려고 하는 모습, 자기가 읽은 책의 내용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야기해 주는 모습, 스트레스 받지 않고 집중해서 공부하는 모습 등에서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있음을 발견할 때 양육자가 느낄 반가움과 안도감은 얼마나 클까. 이렇듯 양육자가 학습에 대해 느끼던 조바심을 내려놓고 아이의 변화와 성장을 기뻐하고 격려할 수 있게 되는 것 또한 중요한 성과다.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최고의 학습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습 환경이나 인지 발달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는 아이라면 적당히 괜찮은 앱이나 교재로도 충분히 잘 배울 수 있겠지만, 학습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라면 거기에서 확실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반복되는 실패를 경험하다 좌절해 버린 학습자에게서 배울 마음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악순환에 빠지는 일을 막기 위해 우리는 어린이들이 처해 있는 구체적인 환경과 이들이 학습의 과정에서 만날 인지적, 심리적 장벽을 고려하여 앱을 만들고 있다.

인지적인 면에서 학습자에게 적절한 수준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과 더불어 콘텐츠에 대해 학습자가 느낄 마음의 거리를 잘 고려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예를 들어 한글 습득이 느리다고 해서 초등 2학년 어린이에게 유아들이 볼 법한 책을 주면 글자는 읽을 수 있겠지만 ‘아기들이 보는 책’을 읽는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 글자를 잘 모른다 해도 일상생활에서의 경험은 적지 않을 것이므로, 읽기 쉬운 책에서부터 이 나이대 어린이들의 관심사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 앱에서는 페이지당 글의 분량이 한두 단어에서 짧은 한 문장 정도에 불과한 책에서도 분식집의 메뉴처럼 어린이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것을 소재로 삼고, ‘자기만의 공간에 혼자 있고 싶은 마음’처럼 좀 더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을 다루기도 한다. 그 외에도, 할아버지가 아이를 돌보거나 부모 중 한 명만 등장하는 경우처럼 여러 형태의 가족을 보여 주고, 피부색이나 체구 등에서 다양한 특징을 가진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서로 다른 배경과 특성을 가진 어린이들이 저마다 책을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쉬운 글로 쓰였지만 어린이들의 관심사를 반영한 책.


어린이뿐만 아니라 양육자를 함께 지원하는 기능 또한 앱을 만드는 과정 내내 염두에 두었던 부분이다. 특히 이주 배경의 양육자라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안 언어적・문화적 장벽을 맞닥뜨린 경험 때문에 자신이 아이에게도 충분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앱 내에서 무엇을 얼마나 학습했는지와 같은 정보를 다국어로 제공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있는 양육자가 아이의 학습에 관심을 가지려 할 때 비슷한 장벽을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한, 베트남, 중국, 필리핀, 태국의 전래 동화와 현대 생활 동화도 여러 언어로 제공하고 있는데, 이러한 책을 매개로 양육자는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출신 국가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다.

이렇듯 어린이와 가정 모두를 고려해 더 좋은 학습 도구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런 도구가 취약한 환경의 학습자를 도울 수 있으려면 많은 이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학습 지원을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을 찾아내고, 자원을 끌어오고, 어린이의 손에 태블릿을 전달하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여러 주체의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가 닿으려면 몇 배 더 많은 품을 들여야 하지만, 그러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 수고를 통해 어린이 한 명 한 명이 배움의 재미를 느끼고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우리의 노력은 충분한 의미를 갖지 않을까.

김은파 씨는 학습의 기회를 만들고 확장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이집트, 우간다, 한국 등에서 학습자를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에듀테크 스타트업 '에누마'에서 어린이들이 즐겁게 읽고 쓰기를 배울 수 있는 앱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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