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The Pioneer Spirit Lives On, LONGINES
입력 2020-12-01 13:29:26
수정 2020-12-01 13:29:26
[한경 머니 = 이승률 프리랜서|사진 이수강] 개척자 정신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 시대의 진정한 개척자들.
1세대 여성 파일럿 진에어 기장, 이혜정이혜정 진에어 기장에게는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정말 많다. 그녀는 국내 1세대 여성 파일럿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승무원 출신 조종사다. 또한 국내 저비용항공사(LCC) 최초의 여성 기장이면서 2012년에는 국토해양부의 심사를 거처 국내 첫 민간항공 여성 위촉 심사관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그녀의 개척자 정신은 국내 여성 조종사 중 압도적으로 많은 누적 비행시간에서도 드러난다. 이 기장의 누적 비행시간은 무려 1만3000여 시간. 현재 그녀는 진에어가 국내 LCC 가운데 유일하게 보유 중인 대형기 B777을 책임진다.
1997년 처음 부기장이 됐다. 당시만 해도 매우 드문 일이었을 텐데.
드문 일이 아니라 아예 없었다. 1991년 아시아나항공 승무원으로 처음 비행기와 연을 맺었다. 4년 후 퍼스트클래스 사무장까지 하고 나니 ‘새로운 도전’이 하고 싶더라. 그러다 우연히 1995년 사내 조종사 모집공고를 보고 원서를 넣었다. 군필 등 여러 가지 조건 항목이 있었지만 ‘여자는 안 된다’는 내용은 없어서 용기를 냈다. 당시 여성 두 명이 뽑혔는데 이후 약 2년간 비행 훈련 기록을 쌓은 후 부기장에 올랐다. 불과 며칠 차이로 여성 1호 조종사 자리는 경쟁 항공사였던 대한항공 조종사에게 뺏겼다. (웃음)
개척자의 길은 험난하다. ‘금녀의 벽’을 깨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홍보용으로 뽑았다’라는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위치에서 묵묵히 내 역할을 해내다 보니 그런 편견은 자연스레 없어졌다. 실력으로 극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남들보다 비행시간이 훨씬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국내 최초의 승무원 출신 조종사다. 승무원 경험이 도움이 되나.
기장과 부기장, 승무원 간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같은 비행기에서 근무하더라도 조종사와 승무원은 서로의 일에 대해 세세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 부딪히는 경우도 있다. 나는 양쪽 다 경험해 봤기 때문에 이해를 통해 조화로운 일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조종사가 된 걸 후회한 적은 없나.
음…, 한 번도 없다. 다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학교 행사 같은 데 못 가는 게 엄마로서 미안하기는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자라면서 엄마의 직업을 이해해 주고, 지금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기 때문에 조종사로 일하는 것이 더욱 자랑스럽다.
반대로 ‘조종사가 되기를 참 잘했다’라고 생각한 순간이 있다면.
비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25년이 됐다. 그런데도 매 비행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수백 명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성취감도 크다. 또한 요즘에는 국내에 여성 조종사들이 정말 많아졌다. 적지 않은 여성 조종사들이 나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말해 줄 때나 지금은 나보다 더 훌륭한 조종사가 된 후배들을 보면 뿌듯함을 느낀다.
하늘은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다. 조종사를 꿈꾸는 사람, 특히 여성들에게 조언한다면.
여성이기 때문에, 형편이 안 돼서, 이런 것들은 모두 핑계일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처음 지원 공고를 보고, ‘여자인 나를 뽑아 주겠어?’ 하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요즘은 여성 기장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는다. 조종석(콕핏) 안에는 오직 기장과 부기장만 있을 뿐 여성 기장, 남성 부기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남녀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편견과 싸워 이뤄 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도전했으면 좋겠다. 도전해야 이룰 수 있고, 그래야 한계도 뛰어넘을 수 있다.
벌써 25년 차다. 미래를 생각해 봤을 법도 하다.
꿈은 소박(?)하다. 모든 조종사들이 그러하듯, 안전 운항으로 무사히 정년을 마치고, 기회가 된다면 후진 양성을 위한 모의 비행 장치 교관으로 활동하고 싶다.
디지털 디자인 컴퍼니 디스트릭트 대표, 이성호지난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아티움 건물 위 전광판에는 거대한 수족관 속 일렁이는 파도의 모습이 재현됐다. 웨이브(Wave)라 명명된 이 작품은,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 멋진 충격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누가 만들었을지 몹시 궁금해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16여 년 동안 업계에서 굵직한 경력을 이어온 디지털 미디어 전문 기업 디스트릭트. 디스트릭트는 올해부터 미디어 아티스트 유닛인 에이스트릭트를 출범하고 디자인 에이전시의 한계를 벗어나 창의적인 순수예술로서 미디어 아트에 도전하고 있다.
현재 디스트릭트에서 대표 이사직을 맡고 있다. 디스트릭트는 어떤 회사인가.
우리는 디스트릭트를 '디지털 디자인 컴퍼니'라 부른다. 주로 오프라인 공간에서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콘텐츠를 제작한다. 예전에는 고객의 의뢰에 맞춰 콘텐츠 제작을 해 왔다면, 올해부터는 자체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활동 범위를 늘려 가고 있다.
디자인 회사가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행보다.
고객사와 일하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일정이 빠듯하고, 수정 작업도 부지기수다. 크리에이터가 하지 않아도 될 감정노동과 정신노동까지 해야 된다. 나는 우리 회사에 유능한 크리에이터들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좋아할 만한 수익 모델을 찾아주고 싶었다. '우리만의 콘텐츠로 돈을 벌어 보자'고 생각했고,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바로 지난 4월 삼성동 코엑스 아티움 건물에 설치한 '웨이브'였다.
'웨이브'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언론에서도 화제가 될 만큼 대단한 이슈를 낳았다.
사실 처음부터 반응이 뜨거웠던 건 아니다. ‘웨이브’는 옥외 광고의 형태이지 않나. '신기하다'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상영도 처음에는 4월 한 달만 진행했다. 이후 5월 13일 내가 유튜브에 '웨이브'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다음 날부터 감당이 안 될 정도의 문의가 쏟아졌다. 이동의 자유가 제약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파도치는 영상이 대리만족을 준 것 같다.
9월에는 제주에 국내 최대 규모의 디지털 미디어 미술관인 아르떼뮤지엄을 개관하기도 했다.
아르떼뮤지엄은 '시공을 초월한 자연'을 콘셉트로 한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관이다. 역시 새로운 수익 창출의 일환으로 지난해 3월부터 준비한 것이다. 사실 아르떼뮤지엄은 우리에게는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다. 디스트릭트는 지난 2011년 일산 킨텍스에서 세계 최초의 4차원(4D) 아트 파크인 '라이프 파크'를 선보인 바 있다. 요즘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미디어 아트 전시관의 효시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고, 회사는 경영 위기를 겪었다. 그런 과정에서 창업주가 돌아가시기도 하고. 당시의 실패를 발판 삼아 개관한 것이 바로 아르떼뮤지엄이다. 결과적으로는 매우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50여일 만에 벌써 9만여 명이 다녀갔다.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지금은 성공한 원인은 무엇일까.
10년 전만 해도 대중이 디지털 미디어를 향유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좋은 공간에 좋은 작품을 만들어 놓으면, 대중들이 알아서 홍보를 해 준다. 시대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앞서가도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었다.
디스트릭트가 지닌 철학이 있다면.
디스트릭트는 '디자인(design'’과 '스트릭트(strict)'의 결합어로 ‘엄격한 디자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회사명에서부터 장인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철학은 바로 개척정신이다. 디스트릭트는 늘 새로운 시도를 해 왔다. 일례로 건축물에 빔프로젝트를 쏘거나 홀로그램을 활용한 콘서트를 만든 것 또한 우리가 국내에서 처음 한 것들이다. 또한 앞서 말한 '라이브 파크'는 세계 최초의 시도였다. 엄격한 퀄리티와 남보다 앞선 시도 모두 돌아가신 창업주가 남긴 유산이다. 비록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회사에 남은 구성원들이 그 철학에서 이탈하지 않고 잘 완성해 냈다고 생각한다.
국내 1호 맹금류 재활치료사, 박상현박상현 대표의 보살핌을 받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맹금류의 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특히 안락사 판정이나 심각한 부상을 당한 맹금류를 재활 프로그램을 통해 완벽한 상태로 치료를 마친 뒤 자연으로 돌려보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박 대표는 맹금류 재활치료를 하며 수익을 거둔 적이 전혀 없다. 이번 인터뷰 때 지급된 소정의 모델비 역시 한 조류 보호 협회에 전액 기부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조금 부족해도 살 수 있지만, 보호 협회의 새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게 이유다.
맹금류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아주 어릴 때부터 맹금류를 굉장히 좋아했다. 어린 남자 아이들이 로봇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에게는 맹금류가 동경의 대상이었다. TV에 나온 조류박사의 사무실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 만나보고 싶다고 졸랐을 정도다. 그런데 조금씩 머리가 크면서 한국에서는 나의 호기심을 채우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중학교 때 부모님을 설득해 유학길에 올랐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서 맹금류 재활치료사가 됐다.
내가 하는 일이 꼭 재활치료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는 오히려 연구 조사 활동을 더 많이 했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왔는데, 당시 국내 환경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라. 굳이 찾는다면 수의학이 가장 가까웠다. 그래서 수의사들과 함께 맹금류를 구조하고 치료·방사하는 일들을 해 왔는데, 수의사들이 나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맹금류 재활치료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맹금류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육장을 청소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를 회고한다면.
맹금류가 태어나서 그 해 겨울을 생존해 낼 확률은 10% 미만이다. 맹금류와 같은 야생 동물이 구조센터에 들어온다는 건, 사람이 병원에 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대부분은 야생에서 도태된 상태다. 그들을 치료하고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재활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당시 국내에는 그런 활동이 턱없이 부족했다.
요즘은 어떤가. 최근 국내에서도 환경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환경보호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요즘에는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인류가 발전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애석하게도 생태계 파괴 속도는 그와 반비례한다. 나는 사람들이 “좋은 일 하신다”라고 하는 게 참 멋쩍다. 환경보호가 좋은 일이나 아름다운 일이 아닌 상식이 됐으면 좋겠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고 야생동물 또한 사람과 같은 피라미드 안에 속해 있는 존재다.
국내 1호 맹금류 재활치료사라 불린다. 없던 길을 개척하는 데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사실 난 딱히 도전해 온 것도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신나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취미생활처럼 여기까지 왔다. 맹금류가 좋아서 그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던 만큼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여전히 맹금류가 좋은가.
그렇다. 지금도 새로운 ‘아이’들을 보면 설렌다. 맹금류는 나의 영원한 짝사랑 대상이다. 그들이 날 보고 설렐 일은 없으니까. (웃음)
요즘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최근에는 종 복원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번식하는 맹금류 중 유독 도심에서만 완전히 사라진 종이 있다. 단순하게 빌딩이 많고 차가 많고 하는 문제는 아니다. 홍콩에서는 여전히 도심에서 서식한다. 홍콩에서는 살 수 있는데, 서울에선 사라진 이유를 조사하고 그들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최종 꿈이 있다면.
제2의 나와 같은 어린 아이가 있다면, 의지하고 따라올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런 아이들하고의 관계를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헤어·메이크업 제롬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7호(2020년 12월) 기사입니다.]
1세대 여성 파일럿 진에어 기장, 이혜정이혜정 진에어 기장에게는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정말 많다. 그녀는 국내 1세대 여성 파일럿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승무원 출신 조종사다. 또한 국내 저비용항공사(LCC) 최초의 여성 기장이면서 2012년에는 국토해양부의 심사를 거처 국내 첫 민간항공 여성 위촉 심사관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그녀의 개척자 정신은 국내 여성 조종사 중 압도적으로 많은 누적 비행시간에서도 드러난다. 이 기장의 누적 비행시간은 무려 1만3000여 시간. 현재 그녀는 진에어가 국내 LCC 가운데 유일하게 보유 중인 대형기 B777을 책임진다.
1997년 처음 부기장이 됐다. 당시만 해도 매우 드문 일이었을 텐데.
드문 일이 아니라 아예 없었다. 1991년 아시아나항공 승무원으로 처음 비행기와 연을 맺었다. 4년 후 퍼스트클래스 사무장까지 하고 나니 ‘새로운 도전’이 하고 싶더라. 그러다 우연히 1995년 사내 조종사 모집공고를 보고 원서를 넣었다. 군필 등 여러 가지 조건 항목이 있었지만 ‘여자는 안 된다’는 내용은 없어서 용기를 냈다. 당시 여성 두 명이 뽑혔는데 이후 약 2년간 비행 훈련 기록을 쌓은 후 부기장에 올랐다. 불과 며칠 차이로 여성 1호 조종사 자리는 경쟁 항공사였던 대한항공 조종사에게 뺏겼다. (웃음)
개척자의 길은 험난하다. ‘금녀의 벽’을 깨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홍보용으로 뽑았다’라는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위치에서 묵묵히 내 역할을 해내다 보니 그런 편견은 자연스레 없어졌다. 실력으로 극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남들보다 비행시간이 훨씬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국내 최초의 승무원 출신 조종사다. 승무원 경험이 도움이 되나.
기장과 부기장, 승무원 간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같은 비행기에서 근무하더라도 조종사와 승무원은 서로의 일에 대해 세세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 부딪히는 경우도 있다. 나는 양쪽 다 경험해 봤기 때문에 이해를 통해 조화로운 일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조종사가 된 걸 후회한 적은 없나.
음…, 한 번도 없다. 다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학교 행사 같은 데 못 가는 게 엄마로서 미안하기는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자라면서 엄마의 직업을 이해해 주고, 지금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기 때문에 조종사로 일하는 것이 더욱 자랑스럽다.
반대로 ‘조종사가 되기를 참 잘했다’라고 생각한 순간이 있다면.
비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25년이 됐다. 그런데도 매 비행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수백 명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성취감도 크다. 또한 요즘에는 국내에 여성 조종사들이 정말 많아졌다. 적지 않은 여성 조종사들이 나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말해 줄 때나 지금은 나보다 더 훌륭한 조종사가 된 후배들을 보면 뿌듯함을 느낀다.
하늘은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다. 조종사를 꿈꾸는 사람, 특히 여성들에게 조언한다면.
여성이기 때문에, 형편이 안 돼서, 이런 것들은 모두 핑계일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처음 지원 공고를 보고, ‘여자인 나를 뽑아 주겠어?’ 하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요즘은 여성 기장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는다. 조종석(콕핏) 안에는 오직 기장과 부기장만 있을 뿐 여성 기장, 남성 부기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남녀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편견과 싸워 이뤄 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도전했으면 좋겠다. 도전해야 이룰 수 있고, 그래야 한계도 뛰어넘을 수 있다.
벌써 25년 차다. 미래를 생각해 봤을 법도 하다.
꿈은 소박(?)하다. 모든 조종사들이 그러하듯, 안전 운항으로 무사히 정년을 마치고, 기회가 된다면 후진 양성을 위한 모의 비행 장치 교관으로 활동하고 싶다.
디지털 디자인 컴퍼니 디스트릭트 대표, 이성호지난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아티움 건물 위 전광판에는 거대한 수족관 속 일렁이는 파도의 모습이 재현됐다. 웨이브(Wave)라 명명된 이 작품은,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 멋진 충격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누가 만들었을지 몹시 궁금해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16여 년 동안 업계에서 굵직한 경력을 이어온 디지털 미디어 전문 기업 디스트릭트. 디스트릭트는 올해부터 미디어 아티스트 유닛인 에이스트릭트를 출범하고 디자인 에이전시의 한계를 벗어나 창의적인 순수예술로서 미디어 아트에 도전하고 있다.
현재 디스트릭트에서 대표 이사직을 맡고 있다. 디스트릭트는 어떤 회사인가.
우리는 디스트릭트를 '디지털 디자인 컴퍼니'라 부른다. 주로 오프라인 공간에서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콘텐츠를 제작한다. 예전에는 고객의 의뢰에 맞춰 콘텐츠 제작을 해 왔다면, 올해부터는 자체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활동 범위를 늘려 가고 있다.
디자인 회사가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행보다.
고객사와 일하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일정이 빠듯하고, 수정 작업도 부지기수다. 크리에이터가 하지 않아도 될 감정노동과 정신노동까지 해야 된다. 나는 우리 회사에 유능한 크리에이터들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좋아할 만한 수익 모델을 찾아주고 싶었다. '우리만의 콘텐츠로 돈을 벌어 보자'고 생각했고,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바로 지난 4월 삼성동 코엑스 아티움 건물에 설치한 '웨이브'였다.
'웨이브'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언론에서도 화제가 될 만큼 대단한 이슈를 낳았다.
사실 처음부터 반응이 뜨거웠던 건 아니다. ‘웨이브’는 옥외 광고의 형태이지 않나. '신기하다'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상영도 처음에는 4월 한 달만 진행했다. 이후 5월 13일 내가 유튜브에 '웨이브'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다음 날부터 감당이 안 될 정도의 문의가 쏟아졌다. 이동의 자유가 제약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파도치는 영상이 대리만족을 준 것 같다.
9월에는 제주에 국내 최대 규모의 디지털 미디어 미술관인 아르떼뮤지엄을 개관하기도 했다.
아르떼뮤지엄은 '시공을 초월한 자연'을 콘셉트로 한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관이다. 역시 새로운 수익 창출의 일환으로 지난해 3월부터 준비한 것이다. 사실 아르떼뮤지엄은 우리에게는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다. 디스트릭트는 지난 2011년 일산 킨텍스에서 세계 최초의 4차원(4D) 아트 파크인 '라이프 파크'를 선보인 바 있다. 요즘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미디어 아트 전시관의 효시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고, 회사는 경영 위기를 겪었다. 그런 과정에서 창업주가 돌아가시기도 하고. 당시의 실패를 발판 삼아 개관한 것이 바로 아르떼뮤지엄이다. 결과적으로는 매우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50여일 만에 벌써 9만여 명이 다녀갔다.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지금은 성공한 원인은 무엇일까.
10년 전만 해도 대중이 디지털 미디어를 향유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좋은 공간에 좋은 작품을 만들어 놓으면, 대중들이 알아서 홍보를 해 준다. 시대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앞서가도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었다.
디스트릭트가 지닌 철학이 있다면.
디스트릭트는 '디자인(design'’과 '스트릭트(strict)'의 결합어로 ‘엄격한 디자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회사명에서부터 장인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철학은 바로 개척정신이다. 디스트릭트는 늘 새로운 시도를 해 왔다. 일례로 건축물에 빔프로젝트를 쏘거나 홀로그램을 활용한 콘서트를 만든 것 또한 우리가 국내에서 처음 한 것들이다. 또한 앞서 말한 '라이브 파크'는 세계 최초의 시도였다. 엄격한 퀄리티와 남보다 앞선 시도 모두 돌아가신 창업주가 남긴 유산이다. 비록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회사에 남은 구성원들이 그 철학에서 이탈하지 않고 잘 완성해 냈다고 생각한다.
국내 1호 맹금류 재활치료사, 박상현박상현 대표의 보살핌을 받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맹금류의 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특히 안락사 판정이나 심각한 부상을 당한 맹금류를 재활 프로그램을 통해 완벽한 상태로 치료를 마친 뒤 자연으로 돌려보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박 대표는 맹금류 재활치료를 하며 수익을 거둔 적이 전혀 없다. 이번 인터뷰 때 지급된 소정의 모델비 역시 한 조류 보호 협회에 전액 기부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조금 부족해도 살 수 있지만, 보호 협회의 새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게 이유다.
맹금류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아주 어릴 때부터 맹금류를 굉장히 좋아했다. 어린 남자 아이들이 로봇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에게는 맹금류가 동경의 대상이었다. TV에 나온 조류박사의 사무실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 만나보고 싶다고 졸랐을 정도다. 그런데 조금씩 머리가 크면서 한국에서는 나의 호기심을 채우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중학교 때 부모님을 설득해 유학길에 올랐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서 맹금류 재활치료사가 됐다.
내가 하는 일이 꼭 재활치료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는 오히려 연구 조사 활동을 더 많이 했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왔는데, 당시 국내 환경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라. 굳이 찾는다면 수의학이 가장 가까웠다. 그래서 수의사들과 함께 맹금류를 구조하고 치료·방사하는 일들을 해 왔는데, 수의사들이 나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맹금류 재활치료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맹금류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육장을 청소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를 회고한다면.
맹금류가 태어나서 그 해 겨울을 생존해 낼 확률은 10% 미만이다. 맹금류와 같은 야생 동물이 구조센터에 들어온다는 건, 사람이 병원에 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대부분은 야생에서 도태된 상태다. 그들을 치료하고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재활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당시 국내에는 그런 활동이 턱없이 부족했다.
요즘은 어떤가. 최근 국내에서도 환경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환경보호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요즘에는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인류가 발전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애석하게도 생태계 파괴 속도는 그와 반비례한다. 나는 사람들이 “좋은 일 하신다”라고 하는 게 참 멋쩍다. 환경보호가 좋은 일이나 아름다운 일이 아닌 상식이 됐으면 좋겠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고 야생동물 또한 사람과 같은 피라미드 안에 속해 있는 존재다.
국내 1호 맹금류 재활치료사라 불린다. 없던 길을 개척하는 데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사실 난 딱히 도전해 온 것도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신나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취미생활처럼 여기까지 왔다. 맹금류가 좋아서 그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던 만큼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여전히 맹금류가 좋은가.
그렇다. 지금도 새로운 ‘아이’들을 보면 설렌다. 맹금류는 나의 영원한 짝사랑 대상이다. 그들이 날 보고 설렐 일은 없으니까. (웃음)
요즘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최근에는 종 복원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번식하는 맹금류 중 유독 도심에서만 완전히 사라진 종이 있다. 단순하게 빌딩이 많고 차가 많고 하는 문제는 아니다. 홍콩에서는 여전히 도심에서 서식한다. 홍콩에서는 살 수 있는데, 서울에선 사라진 이유를 조사하고 그들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최종 꿈이 있다면.
제2의 나와 같은 어린 아이가 있다면, 의지하고 따라올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런 아이들하고의 관계를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헤어·메이크업 제롬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7호(2020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