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박은영 서울하우스 편집장·미술사가] 국화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다. 국화의 계절에 꽃을 그린 명화들을 감상하며 그림 속에 피고 지는 국화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초상화인가, 정물화인가
국화를 소재로 한 미술작품에 ‘국화와 여인’이라 불리는 그림이 있다. 인상주의 화가 에드가르 드가(1834~1917년)의 작품으로, 정식 제목은 <꽃병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이다. 그림 한가운데 다양한 종류의 국화꽃이 넓은 화병 가득 꽂혀 있고, 그 옆에 한 여인이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있다. 여자는 그림 한쪽을 비집고 들어온 것처럼 자리가 좁아 보인다. 그래도 여유롭게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손가락을 우아하게 입술 옆에 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의 시선이다. 그 눈길이 향한 곳은 관람자도 아니고 그림 속 만발한 꽃도 아니다. 그녀는 꽃에 밀착해 있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화면 밖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표정을 보니 별일은 아닌 듯, 그저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녀는 이 그림의 주인공일까. 꽃과 인물이 함께 나온다면 당연히 사람이 주인공일 텐데 어쩐지 석연치 않다. 수많은 국화꽃이 저리도 넓게 중심을 다 차지했으니! 사람보다 꽃을 더 중시했다면 이 그림은 정물화라고 봐야 할까.
그림의 모델은 화가의 친구 폴 발팽송의 부인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의 예비 드로잉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인물만 있고 꽃이나 배경 같은 부속물이 전혀 없다. 드가는 스케치를 유화로 옮기면서 때마침 절정을 이룬 국화의 아름다움을 여인에게 결합시키려 했는지도 모른다. 화병을 채운 국화는 다양한 종류가 섞여 있어서 야생 그대로를 다듬지 않고 바로 실내에 들여온 것 같다. 꽃은 벽지의 무늬와 여인의 모자 장식에도 연결돼 그림 전체에 넘실거린다. 풍부한 꽃과 세련된 여성의 존재가 거의 같은 무게로 대립하며 긴장감이 생긴다. 그 긴장감이 정지된 사물과 나른한 인물에게 생동감을 준다.
초상화의 주인공을 한쪽으로 쏠리게 배치하는 것은 서양미술에서 아주 이례적인 경우다. 드가의 그림은 종종 특이한 구도를 보이는데, 당시 유럽에 소개된 일본 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 드가는 일본 판화에 나오는 강한 대비나 의외의 배치, 형태의 절단 등 과감한 구성을 받아들여 독창적인 구도를 창안했다.
그림 속 여인은 화면에 우연히 들어온 것처럼 무심하고, 화가가 급히 포착한 듯 신체 한쪽이 화면 가장자리에서 잘려 나갔다. 이런 스냅사진 효과로 장면의 순간적인 느낌이 더욱 커진다. 순간성은 꽃의 생명이 짧다는 사실과 연결돼 꽃 정물화의 전통적 상징성을 연상시킨다. 화병의 꽃이 빨리 시드는 것처럼 인생도 짧으니, 세상의 쾌락에 집착하지 말고 다가올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드가는 정물화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 무거운 교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의 그림에서 순간성은 죽음보다는 오히려 약동하는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죽어가는 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 거기엔 어떤 희망이 있을까.
몬드리안, 시든 국화를 그리다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 피트 몬드리안(1872~1944년)도 국화를 여러 점 그렸다. 추상화로 나아가기 전, 몬드리안은 꽃이나 나무 등 한 가지 자연 대상에 집중하곤 했다. 단일한 식물을 소재로 당시 유럽에서 성행한 여러 미술 경향을 실험했다. 꽃 중에서 특히 국화를 많이 그렸는데 가끔 두세 송이를 그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한 송이만 단독으로 그렸다. 꽃의 개별적인 특징을 보여 주면서 화가의 의도를 좀 더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서다.
몬드리안은 대국의 탐스런 꽃송이로 양감을 강조하기도 하고, 활짝 핀 실국화를 정면으로 배치해 화면의 평면적 특징을 나타내기도 했다. 또 붉은 국화를 측면에서 묘사해 꽃잎의 삐죽삐죽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 두꺼운 붓질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큰 국화꽃 송이를 구성하는 작은 꽃잎들을 낱낱이 묘사한 것을 보면, 그 속에서 잔잔한 표정이나 미세한 움직임이 일어나는 듯하다.
몬드리안의 다양한 국화 그림 중 비교되는 두 작품이 있다. 둘 다 1908년에 그렸는데, 하나는 과슈로 그린 수채화 <국화>이고, 다른 하나는 유화 <변형>이다. 먼저 <국화>에는 세로로 긴 화면 속에 하얀 국화 한 송이가 유리병에 꽂혀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 수직의 붉은 띠가 있어서 커튼 또는 창틀 역할을 하며 공간을 구획한다. 국화는 자연 상태가 아니라 꺾여서 실내에 놓였지만 아직 싱싱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반면 <변형>에서는 꽃잎이 시들어 녹아내리고, 잎들도 누렇게 변해 처졌으며, 줄기마저 힘없이 휘어져 있다. 생명을 다한 국화의 모습은 어찌 보면 사람의 해골이나 유령을 닮았다. 가장자리의 수직 띠도 검고 두껍게 바뀌어 무거운 커튼이 됐다.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장막을 열어젖힌 것 같다.
몬드리안은 왜 죽어 가는 국화를 그려야 했을까. 학자들은 몬드리안의 꽃 그림에서 그가 심취한 신지학의 영향을 발견한다. 신지학에서는 인간과 우주가 탄생, 죽음, 재생의 순환을 통해 무한히 진화해서 언젠가는 ‘신’에 가까운 존재에게 다가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물질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초감각적 질료가 남아 영적 진화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하나의 꽃송이도 무한한 우주적 순환이 일어나는 소우주인 것이다.
몬드리안은 싱싱한 국화와 시든 국화를 모두 그려서 삶과 죽음이라는 물질계의 필연적 현상을 탐구했다. 오히려 시든 국화를 노랑과 금색으로 더 온화하게, 곡선을 많이 써서 더 부드럽게 표현했다. 주위에도 밝고 구불구불한 붓 자국을 여러 겹 첨가해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바로크 시대의 정물화가들이 꽃의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그려 생명의 덧없음을 상기시켰다면, 몬드리안은 죽어 가는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 물질의 변형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직접 전달했다. 그리고 과학의 궁극에서 만나게 되는 초월의 신비를 암시하려 했다. 몬드리안의 시든 국화는 더 이상 추하거나 흉하지 않고 의미가 충만한 자연이 됐다. 전통적 상징과는 다른 새로운 상징성을 띠게 된 것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5호(2020년 10월) 기사입니다.]
초상화인가, 정물화인가
국화를 소재로 한 미술작품에 ‘국화와 여인’이라 불리는 그림이 있다. 인상주의 화가 에드가르 드가(1834~1917년)의 작품으로, 정식 제목은 <꽃병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이다. 그림 한가운데 다양한 종류의 국화꽃이 넓은 화병 가득 꽂혀 있고, 그 옆에 한 여인이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있다. 여자는 그림 한쪽을 비집고 들어온 것처럼 자리가 좁아 보인다. 그래도 여유롭게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손가락을 우아하게 입술 옆에 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의 시선이다. 그 눈길이 향한 곳은 관람자도 아니고 그림 속 만발한 꽃도 아니다. 그녀는 꽃에 밀착해 있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화면 밖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표정을 보니 별일은 아닌 듯, 그저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녀는 이 그림의 주인공일까. 꽃과 인물이 함께 나온다면 당연히 사람이 주인공일 텐데 어쩐지 석연치 않다. 수많은 국화꽃이 저리도 넓게 중심을 다 차지했으니! 사람보다 꽃을 더 중시했다면 이 그림은 정물화라고 봐야 할까.
그림의 모델은 화가의 친구 폴 발팽송의 부인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의 예비 드로잉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인물만 있고 꽃이나 배경 같은 부속물이 전혀 없다. 드가는 스케치를 유화로 옮기면서 때마침 절정을 이룬 국화의 아름다움을 여인에게 결합시키려 했는지도 모른다. 화병을 채운 국화는 다양한 종류가 섞여 있어서 야생 그대로를 다듬지 않고 바로 실내에 들여온 것 같다. 꽃은 벽지의 무늬와 여인의 모자 장식에도 연결돼 그림 전체에 넘실거린다. 풍부한 꽃과 세련된 여성의 존재가 거의 같은 무게로 대립하며 긴장감이 생긴다. 그 긴장감이 정지된 사물과 나른한 인물에게 생동감을 준다.
초상화의 주인공을 한쪽으로 쏠리게 배치하는 것은 서양미술에서 아주 이례적인 경우다. 드가의 그림은 종종 특이한 구도를 보이는데, 당시 유럽에 소개된 일본 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 드가는 일본 판화에 나오는 강한 대비나 의외의 배치, 형태의 절단 등 과감한 구성을 받아들여 독창적인 구도를 창안했다.
그림 속 여인은 화면에 우연히 들어온 것처럼 무심하고, 화가가 급히 포착한 듯 신체 한쪽이 화면 가장자리에서 잘려 나갔다. 이런 스냅사진 효과로 장면의 순간적인 느낌이 더욱 커진다. 순간성은 꽃의 생명이 짧다는 사실과 연결돼 꽃 정물화의 전통적 상징성을 연상시킨다. 화병의 꽃이 빨리 시드는 것처럼 인생도 짧으니, 세상의 쾌락에 집착하지 말고 다가올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드가는 정물화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 무거운 교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의 그림에서 순간성은 죽음보다는 오히려 약동하는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죽어가는 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 거기엔 어떤 희망이 있을까.
몬드리안, 시든 국화를 그리다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 피트 몬드리안(1872~1944년)도 국화를 여러 점 그렸다. 추상화로 나아가기 전, 몬드리안은 꽃이나 나무 등 한 가지 자연 대상에 집중하곤 했다. 단일한 식물을 소재로 당시 유럽에서 성행한 여러 미술 경향을 실험했다. 꽃 중에서 특히 국화를 많이 그렸는데 가끔 두세 송이를 그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한 송이만 단독으로 그렸다. 꽃의 개별적인 특징을 보여 주면서 화가의 의도를 좀 더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서다.
몬드리안은 대국의 탐스런 꽃송이로 양감을 강조하기도 하고, 활짝 핀 실국화를 정면으로 배치해 화면의 평면적 특징을 나타내기도 했다. 또 붉은 국화를 측면에서 묘사해 꽃잎의 삐죽삐죽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 두꺼운 붓질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큰 국화꽃 송이를 구성하는 작은 꽃잎들을 낱낱이 묘사한 것을 보면, 그 속에서 잔잔한 표정이나 미세한 움직임이 일어나는 듯하다.
몬드리안의 다양한 국화 그림 중 비교되는 두 작품이 있다. 둘 다 1908년에 그렸는데, 하나는 과슈로 그린 수채화 <국화>이고, 다른 하나는 유화 <변형>이다. 먼저 <국화>에는 세로로 긴 화면 속에 하얀 국화 한 송이가 유리병에 꽂혀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 수직의 붉은 띠가 있어서 커튼 또는 창틀 역할을 하며 공간을 구획한다. 국화는 자연 상태가 아니라 꺾여서 실내에 놓였지만 아직 싱싱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반면 <변형>에서는 꽃잎이 시들어 녹아내리고, 잎들도 누렇게 변해 처졌으며, 줄기마저 힘없이 휘어져 있다. 생명을 다한 국화의 모습은 어찌 보면 사람의 해골이나 유령을 닮았다. 가장자리의 수직 띠도 검고 두껍게 바뀌어 무거운 커튼이 됐다.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장막을 열어젖힌 것 같다.
몬드리안은 왜 죽어 가는 국화를 그려야 했을까. 학자들은 몬드리안의 꽃 그림에서 그가 심취한 신지학의 영향을 발견한다. 신지학에서는 인간과 우주가 탄생, 죽음, 재생의 순환을 통해 무한히 진화해서 언젠가는 ‘신’에 가까운 존재에게 다가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물질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초감각적 질료가 남아 영적 진화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하나의 꽃송이도 무한한 우주적 순환이 일어나는 소우주인 것이다.
몬드리안은 싱싱한 국화와 시든 국화를 모두 그려서 삶과 죽음이라는 물질계의 필연적 현상을 탐구했다. 오히려 시든 국화를 노랑과 금색으로 더 온화하게, 곡선을 많이 써서 더 부드럽게 표현했다. 주위에도 밝고 구불구불한 붓 자국을 여러 겹 첨가해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바로크 시대의 정물화가들이 꽃의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그려 생명의 덧없음을 상기시켰다면, 몬드리안은 죽어 가는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 물질의 변형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직접 전달했다. 그리고 과학의 궁극에서 만나게 되는 초월의 신비를 암시하려 했다. 몬드리안의 시든 국화는 더 이상 추하거나 흉하지 않고 의미가 충만한 자연이 됐다. 전통적 상징과는 다른 새로운 상징성을 띠게 된 것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5호(2020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