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한여름에 제일 생각나는 것. 아마 뼛속까지 시린 에어컨 바람과 얼음이 동동 뜬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닐까. 이열치열이라 했지만 8월의 뙤약볕은 뜨끈한 사골 국물보단 시원한 냉면 육수를 먼저 생각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무더위에 뜨거운 불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직업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을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흘린 숭고한 땀의 의미를 들어봤다.
THE CERAMIST김시영 흑자 스튜디오 김시영 작가
“뜨거운 불로 형태의 자유로움 부여하죠”
‘하늘 천, 땅 지, 검은 현, 누를 황’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은 만고의 진리를 담았다. 하늘과 우주는 검다는 것, 즉 검은색은 삼라만상의 모든 색을 가졌다는 말이다. 흑자(黑瓷) 또한 단순히 ‘검은색 도자기’가 아니라 다채로운 색감을 표현할 수 있는 자기라고 김시영 작가는 말한다. 평생을 흑자에 전념해 온 그는 흑자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고온의 불로 형태의 자유로움을 부여하는 것이다.
불이 무섭진 않으신가요.
“고등학생 때 금속과 재료 예술을 하면서 용광로를 접했습니다. 제가 지금 환갑이 넘었으니 세월로 따져도 불을 적지 않게 다뤘죠. 도자기는 상온에서 빚지만 불에 의해 고유의 색과 형태가 완성되기 때문에 불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젠 불이 위험하기보단 친근하게 느껴져요. 거의 매일 가까이 하다 보니, 이젠 불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가마는 최대 몇 도까지 올라가는지 궁금합니다.
“옹기는 대략 섭씨 1200~1220도에서 구워집니다. 분청은 조금 더 높고, 그다음에 청자, 백자 순인데 1300도까지 올라가죠. 흑자는 유약을 두껍게 바르기 때문에 1350도에서 소성 작업을 합니다. 물론 이는 우리가 아는 예쁜 도자기의 형태를 만들 때죠. 저는 고온의 불이 주는 형태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1500도까지 올립니다. 기름으로 때는 현대식 가마는 비교적 온도를 일괄적으로 맞출 수 있는 반면, 장작으로 때는 전통가마의 경우는 내부 부분마다 온도 분포가 넓을 수 있어요.”
청자나 백자에 비해 흑자는 좀 생소한 것 같아요.
“도자기는 유색에 의해서 이름이 지어집니다. 청자는 푸른빛이 돌고, 백자는 흰색이죠. 그렇다면 흑자는 검은색이어야 하는데, 직접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러 가지 색이 감돌아요. 이는 흑자는 옹기를 만들 때 쓰는 약토, 즉 불에 잘 녹는 흙을 재와 함께 섞어 만듭니다. 광물들이 불 속에서 자신과 맞는 온도를 만나 물성이 변화하면서 자신만의 색을 나타냅니다. 모든 색이 합쳐져서 검은색이 되듯, 흑자가 삼라만상의 모든 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불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불이 60%, 흙이 40% 정도로, 불이 더 중요합니다. 청자나 백자에 비해 굉장히 불에 민감한 도자기죠. 가마의 불을 어떻게 때느냐에 따라 같은 흙임에도 색이 다르게 나옵니다. 불을 더 주의 깊게 관찰하고 계속 연구해야 합니다. 불의 원초적인 힘, 미지의 힘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재밌죠.”
흑유도예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서예가이셨던 아버지께서 외국 문물에 굉장히 밝은 분이셨어요. 외국 특히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흑자도 청자와 백자처럼 인정받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고려청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고려흑자 또한 알아주는 도자기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귀한 빛이 감도는 흑유 자기들을 임금님에게 바쳤다고 해요. 서민들도 많이 썼지만, 색감이 오묘하고 예쁜 것들은 당시에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흑자만의 매력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산을 돌아다니면서 검은 돌멩이들과 흙들을 많이 접했는데, 신비로웠어요. 처음에는 흑자의 검은색만 구현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검은색 안에 숨어 있던 다양한 색깔들이 자신의 특성을 찾아 나가더라고요. 이제 그 한계를 더 넓혀 가고자 해요. 한국의 흑자에서 지구의 흑자로. 색감뿐만 아니라 고온에서 형태와 어우러져서 불 속에서의 자유로움을 보여 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슬하에 두 자매, 김자인 작가와 김경인 작가를 두고 계시죠. 두 분 모두 도예와 설치미술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저를 따라다니며 흙을 캐러 다니고, 물레로 자기를 빚기도 했어요. 제가 가마에 예쁜 작품이 나오면 새벽에라도 애들을 깨워서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웃음) 그래서 자연스럽게 같은 길을 가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은 애들에게 많이 배워요. 전 세계 미술의 흐름이라든가 외국 사람들이 미술을 접하는 마인드와 같은 것들을 제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적인 추세를 애들을 통해 접하다 보니 저도 자극이 되는 부분이 많아요.”
가장 보람을 느끼셨을 때가 있다면.
“고전하던 중 정말 예상치 못하게 아름다운 작품이 나왔을 때,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큰딸인 김자인 작가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 도자기를 전시할 때도 행복했습니다. 지난해 문화훈장을 받았을 때도 기뻤어요. 나이 60이 넘어서까지 한 길을 계속 갔다고, 이제는 제가 마음껏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도 된다는 걸 인정해 주신 것 같아서 감사했어요. 이제부터 과거의 작품들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을 해야겠다고 확신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1년에 한두 번씩은 정말 산타 할아버지가 가마 속에 놓고 갔다고 생각할 정도로 놀라운 작품들이 나타나긴 해요. 지난해 전시한 라는 작품은 고온에서 덩어리가 서로 만나면서 부딪히고, 엿가락처럼 늘어지면서 저런 형태를 만들어 냈죠. 이 작품 덕분에 뜨거운 불이 주는 아름다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석 점으로 구성된 <허공>이라는 작품은 자세히 보시면 각각 공간, ‘허공’이 하나씩 있죠. 이 허공 자체의 자유로움, 그리고 빈 공간에 스며드는 햇빛과 광명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형태를 어느 정도 의도하고 예상하지만, 최종적으로 어떤 모양이 나올지는 오직 불이 결정합니다. 자연스러운 불의 묘미죠.”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도자기의 역사가 깊고 미술의 근간을 이룹니다. 우리나라의 도자기가 익숙하지 않은 흑자가 가진 한국의 아름다움, 그 고유의 색감을 보여 줄 방법을 궁리하고 있어요. 작품을 꼭 물레에서만 빚는 게 아니라 허공에서, 땅 속에서, 물속에서, 혹은 얼음 속에서 빚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죠. 이 새로운 느낌의 작품들을 조금 더 가다듬어서 훌륭한 컬렉터들이나 갤러리 큐레이터들에게 우리나라의 멋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3호(2020년 08월) 기사입니다.]
THE CERAMIST김시영 흑자 스튜디오 김시영 작가
“뜨거운 불로 형태의 자유로움 부여하죠”
‘하늘 천, 땅 지, 검은 현, 누를 황’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은 만고의 진리를 담았다. 하늘과 우주는 검다는 것, 즉 검은색은 삼라만상의 모든 색을 가졌다는 말이다. 흑자(黑瓷) 또한 단순히 ‘검은색 도자기’가 아니라 다채로운 색감을 표현할 수 있는 자기라고 김시영 작가는 말한다. 평생을 흑자에 전념해 온 그는 흑자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고온의 불로 형태의 자유로움을 부여하는 것이다.
불이 무섭진 않으신가요.
“고등학생 때 금속과 재료 예술을 하면서 용광로를 접했습니다. 제가 지금 환갑이 넘었으니 세월로 따져도 불을 적지 않게 다뤘죠. 도자기는 상온에서 빚지만 불에 의해 고유의 색과 형태가 완성되기 때문에 불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젠 불이 위험하기보단 친근하게 느껴져요. 거의 매일 가까이 하다 보니, 이젠 불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가마는 최대 몇 도까지 올라가는지 궁금합니다.
“옹기는 대략 섭씨 1200~1220도에서 구워집니다. 분청은 조금 더 높고, 그다음에 청자, 백자 순인데 1300도까지 올라가죠. 흑자는 유약을 두껍게 바르기 때문에 1350도에서 소성 작업을 합니다. 물론 이는 우리가 아는 예쁜 도자기의 형태를 만들 때죠. 저는 고온의 불이 주는 형태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1500도까지 올립니다. 기름으로 때는 현대식 가마는 비교적 온도를 일괄적으로 맞출 수 있는 반면, 장작으로 때는 전통가마의 경우는 내부 부분마다 온도 분포가 넓을 수 있어요.”
청자나 백자에 비해 흑자는 좀 생소한 것 같아요.
“도자기는 유색에 의해서 이름이 지어집니다. 청자는 푸른빛이 돌고, 백자는 흰색이죠. 그렇다면 흑자는 검은색이어야 하는데, 직접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러 가지 색이 감돌아요. 이는 흑자는 옹기를 만들 때 쓰는 약토, 즉 불에 잘 녹는 흙을 재와 함께 섞어 만듭니다. 광물들이 불 속에서 자신과 맞는 온도를 만나 물성이 변화하면서 자신만의 색을 나타냅니다. 모든 색이 합쳐져서 검은색이 되듯, 흑자가 삼라만상의 모든 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불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불이 60%, 흙이 40% 정도로, 불이 더 중요합니다. 청자나 백자에 비해 굉장히 불에 민감한 도자기죠. 가마의 불을 어떻게 때느냐에 따라 같은 흙임에도 색이 다르게 나옵니다. 불을 더 주의 깊게 관찰하고 계속 연구해야 합니다. 불의 원초적인 힘, 미지의 힘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재밌죠.”
흑유도예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서예가이셨던 아버지께서 외국 문물에 굉장히 밝은 분이셨어요. 외국 특히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흑자도 청자와 백자처럼 인정받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고려청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고려흑자 또한 알아주는 도자기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귀한 빛이 감도는 흑유 자기들을 임금님에게 바쳤다고 해요. 서민들도 많이 썼지만, 색감이 오묘하고 예쁜 것들은 당시에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흑자만의 매력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산을 돌아다니면서 검은 돌멩이들과 흙들을 많이 접했는데, 신비로웠어요. 처음에는 흑자의 검은색만 구현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검은색 안에 숨어 있던 다양한 색깔들이 자신의 특성을 찾아 나가더라고요. 이제 그 한계를 더 넓혀 가고자 해요. 한국의 흑자에서 지구의 흑자로. 색감뿐만 아니라 고온에서 형태와 어우러져서 불 속에서의 자유로움을 보여 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슬하에 두 자매, 김자인 작가와 김경인 작가를 두고 계시죠. 두 분 모두 도예와 설치미술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저를 따라다니며 흙을 캐러 다니고, 물레로 자기를 빚기도 했어요. 제가 가마에 예쁜 작품이 나오면 새벽에라도 애들을 깨워서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웃음) 그래서 자연스럽게 같은 길을 가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은 애들에게 많이 배워요. 전 세계 미술의 흐름이라든가 외국 사람들이 미술을 접하는 마인드와 같은 것들을 제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적인 추세를 애들을 통해 접하다 보니 저도 자극이 되는 부분이 많아요.”
가장 보람을 느끼셨을 때가 있다면.
“고전하던 중 정말 예상치 못하게 아름다운 작품이 나왔을 때,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큰딸인 김자인 작가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 도자기를 전시할 때도 행복했습니다. 지난해 문화훈장을 받았을 때도 기뻤어요. 나이 60이 넘어서까지 한 길을 계속 갔다고, 이제는 제가 마음껏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도 된다는 걸 인정해 주신 것 같아서 감사했어요. 이제부터 과거의 작품들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을 해야겠다고 확신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1년에 한두 번씩은 정말 산타 할아버지가 가마 속에 놓고 갔다고 생각할 정도로 놀라운 작품들이 나타나긴 해요. 지난해 전시한 라는 작품은 고온에서 덩어리가 서로 만나면서 부딪히고, 엿가락처럼 늘어지면서 저런 형태를 만들어 냈죠. 이 작품 덕분에 뜨거운 불이 주는 아름다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석 점으로 구성된 <허공>이라는 작품은 자세히 보시면 각각 공간, ‘허공’이 하나씩 있죠. 이 허공 자체의 자유로움, 그리고 빈 공간에 스며드는 햇빛과 광명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형태를 어느 정도 의도하고 예상하지만, 최종적으로 어떤 모양이 나올지는 오직 불이 결정합니다. 자연스러운 불의 묘미죠.”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도자기의 역사가 깊고 미술의 근간을 이룹니다. 우리나라의 도자기가 익숙하지 않은 흑자가 가진 한국의 아름다움, 그 고유의 색감을 보여 줄 방법을 궁리하고 있어요. 작품을 꼭 물레에서만 빚는 게 아니라 허공에서, 땅 속에서, 물속에서, 혹은 얼음 속에서 빚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죠. 이 새로운 느낌의 작품들을 조금 더 가다듬어서 훌륭한 컬렉터들이나 갤러리 큐레이터들에게 우리나라의 멋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3호(2020년 0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