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한여름에 제일 생각나는 것. 아마 뼛속까지 시린 에어컨 바람과 얼음이 동동 뜬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닐까. 이열치열이라 했지만 8월의 뙤약볕은 뜨끈한 사골 국물보단 시원한 냉면 육수를 먼저 생각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무더위에 뜨거운 불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직업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을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흘린 숭고한 땀의 의미를 들어봤다.
THE BLACKSMITH 숲속의 대장간 이광원 대표
“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 주고 싶어”
대장장이는 모루(단조나 판금 작업시 재료를 얹어놓고 두드려 가공하는 받침)를 베고 죽어야 한다. ‘숲속의 대장간’을 이끄는 이광원 대표의 신념이다. 그는 고철덩어리가 될 뻔한, 폐업한 대장간의 모루들을 어떠한 값을 지불해서라도 산다. 뿐만 아니라 모든 연장의 근본은 농기구라 여기며 겉멋만 든 제자들을 쫓아내기도 한다. 어쩌면 기본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철학이 미래로 더 나아가는 원동력이지 않았을까. 그의 꿈은 철기 문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 줄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가마 근처에만 가도 땀이 나던데요.
“여름에는 조금 힘들죠. 하지만 대장장이가 불과 싸우는 건 숙명입니다. 일반적으로 쇠붙이의 용점이 섭씨 1500도 이상 되니까, 가마는 최대 2000도 가까이 올라가요. 평상시에는 800~1100도 정도 되고요. 그래서 여름에는 대장간이 쉬는 곳이 많아요. 저희도 7, 8월은 휴가를 갑니다.”
휴가 중에도 이렇게 작업을 하시네요.
“제자들은 휴가 중이고, 급박하게 저희 대장간 제품들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도매하는 분들이 오기 때문에 대량으로 주문하는 경우가 많죠. 어떤 분도 급하시다고 주문량의 일부만 먼저 가져가셨어요. 휴가 중임에도 불구하고 납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대장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어쩌다 보니 대장장이가 됐어요.(웃음) 매형이 의정부에서 큰 대장간을 하고 계셨는데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재미를 붙인 셈이죠. 원래 저는 그림을 전공했어요. 공부와 대장간 아르바이트를 8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40년째 대장장이를 하게 됐습니다.”
폐점한 전국의 대장간에서 모루를 모으신다고 들었어요.
“지금 대장간들이 많이 없어지고 있어요. 대장간을 하려는 사람들도 없고요. 대장간이 폐업하면 쓰던 모루들은 다 고철로 처리합니다. 그 세월을 같이 견뎠던 모루가 한순간에 무의미한 고철 덩어리가 돼 버리는 거죠. 대장장이들이 자기가 하던 일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개인적으로 좀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폐업하는 대장간들의 모루를 모으기 시작했죠.”
왜 모루인가요.
“어떤 책을 읽었는데 어느 농부가 기근이 와서 굶어서 죽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가 죽을 때 머리를 괬던 베개 안에 볍씨 종자가 서 말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걸 볶아 먹었으면 굶어 죽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이 이야기를 읽고 대장장이는 모루를 베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볍씨가 근본이라면, 연장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모루가 뿌리거든요. 그래서 가격이 얼마가 됐든 폐업한 곳의 모루들은 다 구입해 모으고 있어요. 새것보다 훨씬 비쌀 때도 있지만 부르는 대로 값을 지불하고 가져옵니다. 그 유명한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 위치한 형제대장간의 모루도 가져왔습니다.”
한국의 농기구에 대해 애착이 강하신 것 같아요.
“사실 올해 서울숲 부근에서 대한민국의 연장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습니다. 아쉽게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접어야 했지만요. 우리나라 농기구들은 모든 연장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온라인몰 아마존에서 호미가 굉장히 잘나가고 있는 건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죠. 우리나라밖에 없는 호미는 기계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손으로 일일이 두들겨서 만듭니다. 구조도 굉장히 과학적이어서, 목 부분은 잘 부러지지 않게 구부리고 날은 흙이 부드럽게 파지도록 곡선형으로 제작해요. 외국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좋아할 만하죠. 호미에 이어서 지금은 낫이 인기를 끌고 있어요.”
그래서 더 대장간이 없어지는 걸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대장간이 한 면에 두세 곳은있었어요. 하지만 중국에서 농기구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수입되면서 전통적인 대장간들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또 요즘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일을 기피하 죠. 대장장이가 되려면 10~20년 정도 배워야 하는데, 그 배움의 시간이 길고 고되니까요. 특히나 젊은 사람들은 농기구를 만들려고 하지 않아요. 대장간을 하고 싶어도 농기구보단 칼을 만들려고 해요.”
칼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몰랐어요.
“유명 블로거들이나 유튜버들도 제게 와서 칼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요. 그런 친구들은 단번에 내쫓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칼은 두들겨서 만드는 단조 과정으로 제작해야 하거든요. 레이저로 잘라 예쁘게 만든 칼은 절삭력과 예리함이라는 본질을 잃게 돼요. 전 제자들에게 칼부터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수십 년 동안 망치질을 한 다음, 모든 농기구를 만들 수 있는 경지에 이른 후에야 칼을 만들 수 있어요.”
대장장이가 되고 싶은 제자들이 꾸준히 방문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대장간이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치킨집은 한 곳이 장사가 잘되면 그 근방에 3~4개씩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데, 솔직히 그렇게 많이 필요 없잖아요. 하지만 대장간은 그러지 않으니까요. 배우는 시간이 길어서 그렇지, 숙련되고 나면 평생 일자리를 잃거나 굶어 죽을 걱정은 없어요.(웃음)”
가장 보람을 느끼셨을 때가 있다면.
“원래 강원 인제 쪽에 있다가 경기 포천으로 왔어요. 어떤 분이 낫의 나무 자루가 썩었다고 제게 수리를 맡기셨는데, 들여다보니 제가 강원에서 10년 전쯤 만들어 팔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시장에서 구매했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제작한 낫이 돌고 돌아 다시 저에게 왔을 때 보람을 느끼면서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도록 잘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됐어요.”
농기구와 연장뿐만 아니라 예술작품도 만드시죠.
“블루 베이스 아로와나를 만들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자세히 보면 푸른빛이 감돌죠. 천안에 있는 아로와나라는 물고기를 직접 보고 구상했고, 단조 공법으로 제작한 실물 크기 작품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 물고기를 용이라고 부를 정도로 귀한 동물이에요. 사흘 동안 작업하다가 에너지를 소진해서 일어나지 못했어요. 제작 기간은 총 한 달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철로 만들고 싶은 대상이 있으면 유심히 관찰을 해서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해요. 작가가 어떤 것을 표현할 때 어디에 포인트를 주느냐에 따라 작품이 주는 이미지가 달라지거든요. 그리고 작품에 저만의 스토리텔링도 넣을 때도 있어요. 그냥 작품만 덩그러니 놓으면 사람들이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 잘 모르잖아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적어서 작품과 같이 놓기도 해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멋진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갤러리와 작업장이 있는 근사한 공간이 되겠죠. 저는 과거만 전시하는 곳은 죽은 박물관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살아 있는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철로 과거 선조들이 썼던 농기구들, 연장들뿐만 아니라 이렇게 멋진 예술작품도 만들고 싶다는 걸 보여 주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철기 문화의 부흥이죠. 그리고 연장을 만드는 과정들도 전시해서 제가 죽더라도 누군가는 보고 배우고 계승하길 바랍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3호(2020년 08월) 기사입니다.]
THE BLACKSMITH 숲속의 대장간 이광원 대표
“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 주고 싶어”
대장장이는 모루(단조나 판금 작업시 재료를 얹어놓고 두드려 가공하는 받침)를 베고 죽어야 한다. ‘숲속의 대장간’을 이끄는 이광원 대표의 신념이다. 그는 고철덩어리가 될 뻔한, 폐업한 대장간의 모루들을 어떠한 값을 지불해서라도 산다. 뿐만 아니라 모든 연장의 근본은 농기구라 여기며 겉멋만 든 제자들을 쫓아내기도 한다. 어쩌면 기본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철학이 미래로 더 나아가는 원동력이지 않았을까. 그의 꿈은 철기 문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 줄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가마 근처에만 가도 땀이 나던데요.
“여름에는 조금 힘들죠. 하지만 대장장이가 불과 싸우는 건 숙명입니다. 일반적으로 쇠붙이의 용점이 섭씨 1500도 이상 되니까, 가마는 최대 2000도 가까이 올라가요. 평상시에는 800~1100도 정도 되고요. 그래서 여름에는 대장간이 쉬는 곳이 많아요. 저희도 7, 8월은 휴가를 갑니다.”
휴가 중에도 이렇게 작업을 하시네요.
“제자들은 휴가 중이고, 급박하게 저희 대장간 제품들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도매하는 분들이 오기 때문에 대량으로 주문하는 경우가 많죠. 어떤 분도 급하시다고 주문량의 일부만 먼저 가져가셨어요. 휴가 중임에도 불구하고 납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대장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어쩌다 보니 대장장이가 됐어요.(웃음) 매형이 의정부에서 큰 대장간을 하고 계셨는데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재미를 붙인 셈이죠. 원래 저는 그림을 전공했어요. 공부와 대장간 아르바이트를 8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40년째 대장장이를 하게 됐습니다.”
폐점한 전국의 대장간에서 모루를 모으신다고 들었어요.
“지금 대장간들이 많이 없어지고 있어요. 대장간을 하려는 사람들도 없고요. 대장간이 폐업하면 쓰던 모루들은 다 고철로 처리합니다. 그 세월을 같이 견뎠던 모루가 한순간에 무의미한 고철 덩어리가 돼 버리는 거죠. 대장장이들이 자기가 하던 일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개인적으로 좀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폐업하는 대장간들의 모루를 모으기 시작했죠.”
왜 모루인가요.
“어떤 책을 읽었는데 어느 농부가 기근이 와서 굶어서 죽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가 죽을 때 머리를 괬던 베개 안에 볍씨 종자가 서 말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걸 볶아 먹었으면 굶어 죽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이 이야기를 읽고 대장장이는 모루를 베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볍씨가 근본이라면, 연장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모루가 뿌리거든요. 그래서 가격이 얼마가 됐든 폐업한 곳의 모루들은 다 구입해 모으고 있어요. 새것보다 훨씬 비쌀 때도 있지만 부르는 대로 값을 지불하고 가져옵니다. 그 유명한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 위치한 형제대장간의 모루도 가져왔습니다.”
한국의 농기구에 대해 애착이 강하신 것 같아요.
“사실 올해 서울숲 부근에서 대한민국의 연장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습니다. 아쉽게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접어야 했지만요. 우리나라 농기구들은 모든 연장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온라인몰 아마존에서 호미가 굉장히 잘나가고 있는 건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죠. 우리나라밖에 없는 호미는 기계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손으로 일일이 두들겨서 만듭니다. 구조도 굉장히 과학적이어서, 목 부분은 잘 부러지지 않게 구부리고 날은 흙이 부드럽게 파지도록 곡선형으로 제작해요. 외국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좋아할 만하죠. 호미에 이어서 지금은 낫이 인기를 끌고 있어요.”
그래서 더 대장간이 없어지는 걸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대장간이 한 면에 두세 곳은있었어요. 하지만 중국에서 농기구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수입되면서 전통적인 대장간들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또 요즘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일을 기피하 죠. 대장장이가 되려면 10~20년 정도 배워야 하는데, 그 배움의 시간이 길고 고되니까요. 특히나 젊은 사람들은 농기구를 만들려고 하지 않아요. 대장간을 하고 싶어도 농기구보단 칼을 만들려고 해요.”
칼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몰랐어요.
“유명 블로거들이나 유튜버들도 제게 와서 칼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요. 그런 친구들은 단번에 내쫓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칼은 두들겨서 만드는 단조 과정으로 제작해야 하거든요. 레이저로 잘라 예쁘게 만든 칼은 절삭력과 예리함이라는 본질을 잃게 돼요. 전 제자들에게 칼부터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수십 년 동안 망치질을 한 다음, 모든 농기구를 만들 수 있는 경지에 이른 후에야 칼을 만들 수 있어요.”
대장장이가 되고 싶은 제자들이 꾸준히 방문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대장간이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치킨집은 한 곳이 장사가 잘되면 그 근방에 3~4개씩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데, 솔직히 그렇게 많이 필요 없잖아요. 하지만 대장간은 그러지 않으니까요. 배우는 시간이 길어서 그렇지, 숙련되고 나면 평생 일자리를 잃거나 굶어 죽을 걱정은 없어요.(웃음)”
가장 보람을 느끼셨을 때가 있다면.
“원래 강원 인제 쪽에 있다가 경기 포천으로 왔어요. 어떤 분이 낫의 나무 자루가 썩었다고 제게 수리를 맡기셨는데, 들여다보니 제가 강원에서 10년 전쯤 만들어 팔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시장에서 구매했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제작한 낫이 돌고 돌아 다시 저에게 왔을 때 보람을 느끼면서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도록 잘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됐어요.”
농기구와 연장뿐만 아니라 예술작품도 만드시죠.
“블루 베이스 아로와나를 만들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자세히 보면 푸른빛이 감돌죠. 천안에 있는 아로와나라는 물고기를 직접 보고 구상했고, 단조 공법으로 제작한 실물 크기 작품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 물고기를 용이라고 부를 정도로 귀한 동물이에요. 사흘 동안 작업하다가 에너지를 소진해서 일어나지 못했어요. 제작 기간은 총 한 달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철로 만들고 싶은 대상이 있으면 유심히 관찰을 해서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해요. 작가가 어떤 것을 표현할 때 어디에 포인트를 주느냐에 따라 작품이 주는 이미지가 달라지거든요. 그리고 작품에 저만의 스토리텔링도 넣을 때도 있어요. 그냥 작품만 덩그러니 놓으면 사람들이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 잘 모르잖아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적어서 작품과 같이 놓기도 해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멋진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갤러리와 작업장이 있는 근사한 공간이 되겠죠. 저는 과거만 전시하는 곳은 죽은 박물관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살아 있는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철로 과거 선조들이 썼던 농기구들, 연장들뿐만 아니라 이렇게 멋진 예술작품도 만들고 싶다는 걸 보여 주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철기 문화의 부흥이죠. 그리고 연장을 만드는 과정들도 전시해서 제가 죽더라도 누군가는 보고 배우고 계승하길 바랍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3호(2020년 0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