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백정림 갤러리 이고 대표·<앤티크의 발견> 저자 | 사진 서범세 기자] 비단과 차와 도자기가 있는 풍요의 땅, 넘볼 수 없는 부와 권력 ‘메이드 인 차이나’.
(사진) 티파니 디너 접시(아르데코), 베네치안 수프볼(빅토리안), 그린색 스템의 물잔(아르누보)이 세팅된 정찬 테이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기 위해 무모한 항해를 떠나기 오래전부터 동서양은 꾸준하게 문화와 문물을 교류해 왔다.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실크로드는 무엇보다도 오랜 동서양 교류를 말해 주고 있다.
동양의 차와 도자기가 서양을 매혹시켰던 16세기경에 당시 중국 대륙을 다스리고 있었던 명나라는 서양의 어떤 물건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차와 도자기를 주면서 그들이 그 대가로 갖고 싶었던 것은 은 본위제였던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은이었다.
16세기가 되기 전까지 유럽 또한 은은 참으로 귀한 귀금속이었지만 이러한 극도의 은 부족 현상을 단번에 바꾼 기적과 같은 일이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에서 발생하게 된다. 바로 지금의 볼리비아 지역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넘쳐나게 된 은을 가지고 유럽 여러 나라들은 배의 바닥짐(ballast)으로 은화를 가득 싣고 가서 그들이 열망하던 비단과 차와 도자기로 교환해 왔다. 비단과 도자기에 새겨진 이국적인 중국의 모습에 유럽인들은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인 가 보지 않은 먼 나라 중국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사진) 시누아즈리 풍의 벽지.
도자기, 사치품이지만 필수품
그러면 왜 유럽인들은 차와 함께 중국 도자기에 그토록 열광했던 것일까. 17세기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유럽에 들어온 외래 음료였던 초콜릿, 커피, 차는 공교롭게도 모두 뜨겁게 마셔야 했던 음료였다. 그런데 당시 유럽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도자기는 저온에서 만들어져 강도가 약하고, 유약도 뜨거운 물에 녹아 내려 안전하지 못하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고온을 견뎌 낼 수 있는 견고한 도자기 잔을 열망하게 됐다.
따라서 유럽 상류층들에게 고온에서 만들어져 강도와 유약 면에서 안전한 도자기 잔은 외래에서 들여온 뜨거운 음료를 마시기 위해 꼭 필요한 사치품이자 필수품이었다. 1710년 독일 마이센에서 유럽 최초의 경성자기가 만들어지기까지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앞 다투어 완성도 높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던 것도 그런 이유라 할 수 있다.
유럽의 17세기는 동양의 대한 광증에 가까운 사랑이 시작됐던 시기라 할 수 있고 그 중심에는 신대륙과의 글로벌한 무역을 통해 부를 획득한 절대왕정이 있었다. 절대왕정의 군주들은 값비싼 청화백자로 궁을 채웠고, 비단 천으로 벽과 의자를 장식했다. 동양의 옻칠가구는 궁의 곳곳을 장식하며 궁정의 화려함을 더했다. 이러한 왕실의 분위기는 귀족들에게도 이어져 ‘사치하고 낭비하지 않는 자, 귀족이 될 수 없다’라는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재정이 파탄 나는 귀족들을 양산하게 됐다.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절대왕정 강화를 위한 방법 중 하나는 귀족의 힘을 빼는 것이었고, 힘을 빼앗는 첫 번째 작업은 귀족들을 재정적으로 부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적·정치적 흐름 속에서 엄청난 양의 동양의 산물이 유럽으로 건너갔고 ‘중국 취미의’라는 뜻을 지닌 시누아즈리(Chinoiserie) 문화사조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생겨났다.
(사진_위부터) 칠기를 연상시키는 블랙 바탕에 오렌지색 공작새를 그려 넣은 시누아즈리 풍을 그린 센터피스(빅토리안), 붉은 새를 그려 넣은 시누아즈리 풍의 티 잔 트리오(빅토리안).
동양 열풍, 부와 권력의 상징
꽃과 새, 그리고 아름다운 산수를 모티브로 삼는 자연 친화적인 동양의 예술사조는 그대로 유럽으로 전해졌다. 그들은 동양에서 온 유려한 곡선의 라인을 그대로 차용해서 찻잔을 만들고 살롱의 벽을 장식했다.
동양에서 온 신비로운 향을 지닌 옻칠 병풍은 재해석돼 그들의 콘솔이나 서랍장 상판으로 쓰였다. 특히 왕족과 귀족들은 값비싼 산화코발트를 안료로 쓴 청화백자에 열광했는데,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서 방문하게 되는 대부분의 저택에서 볼 수 있는 ‘도자기방’에는 거의 예외 없이 청화백자가 진열돼 있다. 이러한 중국 취미는 17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꾸준하게 유럽 문화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그린 스템의 베네치안 와인잔(빅토리안).
19세기 중반에 유럽을 새로운 열망의 도가니에 휩싸이게 했던 일본 문화의 열풍이었던 자포니즘(Japonism) 또한 그 기원은 17세기부터 시작됐던 시누아즈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자포니즘의 뒤를 이어 19세기 말을 장식했던 예술사조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르누보(art nouveau)다. 아르누보 사조 역시 동양적인 화조 문양과 유려한 곡선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니 우리가 서양 문화로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이 실은 동양적인 것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누아즈리의 열풍은 17세기와 18세기에 그려진 많은 귀족들의 초상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의 귀족들이 가장 선호했던 초상화는 바로 찻잔을 손에 든 그들의 모습이었다. 예로부터 귀족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은으로 만든 주전자와 차 스푼, 그리고 찻잎을 거르는 스트레이너 옆에 주인공으로 자리하는 것은 물 건너 머나먼 곳에서 온 중국산 찻잔이었다. 중국 비단으로 만든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예쁜 드레스를 입은 그림 속 귀부인의 손에는 중국산 찻잔이 어김없이 들려져 있었고, 방 한쪽에는 옻칠 병풍과 가구가 놓여 그들의 넘볼 수 없는 부와 권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의 백정림 대표는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 문화의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 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그램 yigo_gallery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1호(2020년 06월) 기사입니다.]
(사진) 티파니 디너 접시(아르데코), 베네치안 수프볼(빅토리안), 그린색 스템의 물잔(아르누보)이 세팅된 정찬 테이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기 위해 무모한 항해를 떠나기 오래전부터 동서양은 꾸준하게 문화와 문물을 교류해 왔다.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실크로드는 무엇보다도 오랜 동서양 교류를 말해 주고 있다.
동양의 차와 도자기가 서양을 매혹시켰던 16세기경에 당시 중국 대륙을 다스리고 있었던 명나라는 서양의 어떤 물건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차와 도자기를 주면서 그들이 그 대가로 갖고 싶었던 것은 은 본위제였던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은이었다.
16세기가 되기 전까지 유럽 또한 은은 참으로 귀한 귀금속이었지만 이러한 극도의 은 부족 현상을 단번에 바꾼 기적과 같은 일이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에서 발생하게 된다. 바로 지금의 볼리비아 지역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넘쳐나게 된 은을 가지고 유럽 여러 나라들은 배의 바닥짐(ballast)으로 은화를 가득 싣고 가서 그들이 열망하던 비단과 차와 도자기로 교환해 왔다. 비단과 도자기에 새겨진 이국적인 중국의 모습에 유럽인들은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인 가 보지 않은 먼 나라 중국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사진) 시누아즈리 풍의 벽지.
도자기, 사치품이지만 필수품
그러면 왜 유럽인들은 차와 함께 중국 도자기에 그토록 열광했던 것일까. 17세기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유럽에 들어온 외래 음료였던 초콜릿, 커피, 차는 공교롭게도 모두 뜨겁게 마셔야 했던 음료였다. 그런데 당시 유럽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도자기는 저온에서 만들어져 강도가 약하고, 유약도 뜨거운 물에 녹아 내려 안전하지 못하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고온을 견뎌 낼 수 있는 견고한 도자기 잔을 열망하게 됐다.
따라서 유럽 상류층들에게 고온에서 만들어져 강도와 유약 면에서 안전한 도자기 잔은 외래에서 들여온 뜨거운 음료를 마시기 위해 꼭 필요한 사치품이자 필수품이었다. 1710년 독일 마이센에서 유럽 최초의 경성자기가 만들어지기까지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앞 다투어 완성도 높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던 것도 그런 이유라 할 수 있다.
유럽의 17세기는 동양의 대한 광증에 가까운 사랑이 시작됐던 시기라 할 수 있고 그 중심에는 신대륙과의 글로벌한 무역을 통해 부를 획득한 절대왕정이 있었다. 절대왕정의 군주들은 값비싼 청화백자로 궁을 채웠고, 비단 천으로 벽과 의자를 장식했다. 동양의 옻칠가구는 궁의 곳곳을 장식하며 궁정의 화려함을 더했다. 이러한 왕실의 분위기는 귀족들에게도 이어져 ‘사치하고 낭비하지 않는 자, 귀족이 될 수 없다’라는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재정이 파탄 나는 귀족들을 양산하게 됐다.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절대왕정 강화를 위한 방법 중 하나는 귀족의 힘을 빼는 것이었고, 힘을 빼앗는 첫 번째 작업은 귀족들을 재정적으로 부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적·정치적 흐름 속에서 엄청난 양의 동양의 산물이 유럽으로 건너갔고 ‘중국 취미의’라는 뜻을 지닌 시누아즈리(Chinoiserie) 문화사조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생겨났다.
(사진_위부터) 칠기를 연상시키는 블랙 바탕에 오렌지색 공작새를 그려 넣은 시누아즈리 풍을 그린 센터피스(빅토리안), 붉은 새를 그려 넣은 시누아즈리 풍의 티 잔 트리오(빅토리안).
동양 열풍, 부와 권력의 상징
꽃과 새, 그리고 아름다운 산수를 모티브로 삼는 자연 친화적인 동양의 예술사조는 그대로 유럽으로 전해졌다. 그들은 동양에서 온 유려한 곡선의 라인을 그대로 차용해서 찻잔을 만들고 살롱의 벽을 장식했다.
동양에서 온 신비로운 향을 지닌 옻칠 병풍은 재해석돼 그들의 콘솔이나 서랍장 상판으로 쓰였다. 특히 왕족과 귀족들은 값비싼 산화코발트를 안료로 쓴 청화백자에 열광했는데,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서 방문하게 되는 대부분의 저택에서 볼 수 있는 ‘도자기방’에는 거의 예외 없이 청화백자가 진열돼 있다. 이러한 중국 취미는 17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꾸준하게 유럽 문화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그린 스템의 베네치안 와인잔(빅토리안).
19세기 중반에 유럽을 새로운 열망의 도가니에 휩싸이게 했던 일본 문화의 열풍이었던 자포니즘(Japonism) 또한 그 기원은 17세기부터 시작됐던 시누아즈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자포니즘의 뒤를 이어 19세기 말을 장식했던 예술사조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르누보(art nouveau)다. 아르누보 사조 역시 동양적인 화조 문양과 유려한 곡선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니 우리가 서양 문화로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이 실은 동양적인 것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누아즈리의 열풍은 17세기와 18세기에 그려진 많은 귀족들의 초상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의 귀족들이 가장 선호했던 초상화는 바로 찻잔을 손에 든 그들의 모습이었다. 예로부터 귀족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은으로 만든 주전자와 차 스푼, 그리고 찻잎을 거르는 스트레이너 옆에 주인공으로 자리하는 것은 물 건너 머나먼 곳에서 온 중국산 찻잔이었다. 중국 비단으로 만든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예쁜 드레스를 입은 그림 속 귀부인의 손에는 중국산 찻잔이 어김없이 들려져 있었고, 방 한쪽에는 옻칠 병풍과 가구가 놓여 그들의 넘볼 수 없는 부와 권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의 백정림 대표는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 문화의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 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그램 yigo_gallery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1호(2020년 0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