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an] 대한장인(大韓匠人) 6. 남자의 멋, 영국 구두의 절제, 비스포크 슈메이커 박종오

남성 패션 칼럼니스트 이헌이 조명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의 장인들.

[한경 머니 = 이헌 작가·패션 칼럼니스트·스타일리스트|사진·정리 김창규] 국내에 자칭 ‘구두 장인’은 흔하지만, 영국과 같은 구두 종주국의 장인들과 동일한 공정으로 하이엔드 구두를 생산하는 진짜 ‘구두 장인’은 거의 없다. 남성 패션 칼럼니스트 이헌이 조명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의 장인들. 여섯 번째 주인공은 영국에서 제화를 배워 서울 종로구 서촌에 유럽식 비스포크 구두 공방을 차린 ‘저브 팍(Jove Park)’, 슈메이커 박종오다.
자신의 구두를 들고 있는 박종오
뒤늦게 자신의 길을 찾아 성과를 낸 이들에게선 ‘깊은 사유’라는 공통된 습관을 발견할 수 있다. 생각의 골짜기를 지나며 이런 저런 고민을 거친 결과물은 다면체와 같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신선한 모습으로 빛을 발하곤 한다. 개척자의 항로는 어린 시절 부모의 손에 이끌리거나, 주어진 환경에 의해 흘러가듯 선택한 길이 아니기에 거듭되는 망설임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혼자의 힘으로 정글 같은 산업 사회의 장애물들을 이겨 내고, 스스로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 대답을 끌어내는 과정이 바로 ‘깊은 사유’로부터 시작된다. 슈메이커 박종오에게서도 그런 면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자신의 영어식 이름이자 브랜드명이기도 한 ‘Jove Park(저브 팍)’을 고안해 낸 과정이다. 필자가 처음 ‘JOVE’라는 이름과 맞닥뜨렸을 때 그저 막연하게 ‘LOVE’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농담처럼 ‘얼마나 구두 만들기를 깊이 사랑하길래’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 이름엔 박종오가 구두 만들기를 대하는 자세와 철학 등이 담겨 있다.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비스포크 구두 만들기[(구두의 형태를 결정하는 구두골(라스트)부터 바느질까지 단 한 사람을 위해 고안된 구두. 구두가 대량 생산되기 이전과 동일한 방식의 슈메이킹을 일컫는 말]의 과정과 그 세부 공정에 관여된 이들의 명칭을 알아야 한다.
박종오의 철학이 담긴 브랜드명 ‘JOVE PARK’이 새겨진 작업실 입구

비스포크 슈메이킹의 공정에 뿌리를 둔 이름 짓기일반인들에게 슈메이커란 구두를 만드는 데 관여된 모든 사람들로 이해되기 쉽다. 하지만 실제 작업 현장에서는 기술과 역할에 따라 명칭이 나뉘어져 있다. 우선 구두골을 만드는 이를 라스트 메이커(last maker), 평평한 가죽을 입체화하는 패턴 메이커(pattern maker), 가죽을 재단하는 클릭커(clicker), 구두의 껍데기인 갑피(甲皮)를 만드는 클로저(closer)가 구두 제작자들의 부분별 명칭이다. 이러한 작업자들에 의해 준비된 라스트와 갑피를 가지고 하나의 구두로 만드는 이를 비로소 슈메이커(shoe maker)라고 부른다. 물론 이 모든 작업자들에게 상세한 작업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고객과의 충분한 상담과 꼼꼼한 채촌 등 직업과 생활패턴까지 관찰해 구두에 적용시키는 것도 슈메이커의 일이다. 이 슈메이커를 구두에서 가장 중요한 바닥 부를 설계하고, 최종 상품의 형태적 특징을 모두 결정하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보텀 메이커(bottom maker)라고도 부른다. 이 보텀을 대한민국에서는 저부(底部)라고 한다. 그렇기에 박종오는 서양인들이 쉽게 발음할 수 있는 ‘jove’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바닥에 몸을 대고 채촌하는 박종오
상세하게 채촌이 완료된 채촌지
그는 인터뷰 내내 슈메이커로서의 철학과 자세를 언급하면서 저부(底部, Jove)의 다양한 의미를 설명했다. 언제나 낮은 곳에서 일하는 슈메이커들의 처지, 발 사이즈를 측정할 때 취하는 낮은 자세와 태도, 그리고 편안한 발과 세련된 스타일링을 위해서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구두의 존재감을 떠올리면서 내내 그는 낮은 곳, 근간이 되는 곳이라는 의미의 저부를 강조했다. 구두 만들기를 향한 그의 출발은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으나, 그만큼 사유의 시간과 골은 더 깊어,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으리라.
다양한 소재와 형태의 구두들

장인의 DNA와 록 음악그가 떠올리는 유년 시절은 솜씨 좋은 대목장이었던 할아버지에게서 시작된다. 조선의 궁궐과 권세가들의 고택을 수리할 때 불려 다니시던, 그야말로 장인의 길을 걷던 할아버지가 만드신 목제품을 접하며 자라 온 그에게는 장인의 DNA가 이미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감수성이 폭발하는 10대 시절 친구로부터 받은 비틀스의 카세트테이프로 그는 신세계를 만난다. 이후 영국을 대표하는 록 그룹 퀸은 결국 그를 록 음악의 넓은 바다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드록부터 사이키델릭, 글램록, 스래시메탈, 데스메탈, 블랙메탈, 브릿팝, 프로그레시브 등 갖가지 록 음악을 섭렵하며 파고들었으니 줄곧 학생주임으로 교직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와의 갈등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그는 밴드를 결성해 음반까지 발매하고 클럽 공연으로 전국 투어를 다녔다. 비록 이름을 날리는 록스타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로커의 삶을 살면서 뜨거운 마음, 사랑, 분노, 호기심, 그리고 새로운 것을 향한 편견 없는 순수함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영국 펑크록은 음악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그의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휴학과 동시에 영국 런던에서 보낸 어학연수 1년 반 동안에 그는 진정한 ‘영국빠’로 거듭나게 됐지만 현실은 어김없이 삶이라는 압박으로 찾아왔다. 졸업 후 그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10대와 20대를 바쳤던 록 음악, 그리고 충만했던 펑크 정신,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장인의 DNA는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쌓이는 월급여의 달콤함보다 훨씬 강력한 에너지를 뿜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미래를 고민하던 그에게 어느 날 사건이 발생한다. 10년 넘게 밴드를 같이 했던 가까운 동생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3년간 자전거 세계일주에 도전한 일이다. 이 사건은 적성에 안 맞는 일과 뻔한 직장인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그에게 오랫동안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로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평소 작은 발 때문에 구두를 고를 때면 고민하던 기억이 떠올랐고, 이어 ‘내가 직접 구두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돼 심사숙고 끝에 퇴사를 결정하게 된다.
가장 동작이 화려한 만큼 힘이 많이 드는 어퍼와 저부를 연결하는 공정
전문가에게 요청해 전달받은 구두 갑피들
대한민국 성수동에서 영국 코드웨이너스로박종오가 구두를 만들기로 결심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국비지원 사업으로 운영되는 한국제화아카데미의 프로그램에 지원한 것이었다. 면접에서 떨어졌지만, 예비지원으로 면접관에게 사정해 꼴찌로 겨우 입학을 했다. 열의와 진지함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는 졸업작품 품평회에서 결국 최우수상을 받고 졸업했다. 이후에도 무엇 하나 쉬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유명한 구두 명장을 찾아가 제자가 되고자 했지만 받아주지 않자 그는 두 달을 꼬박 옆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옛 도제 시절 견습공들처럼 밥도 짓고, 찬물에 설거지도 하며 추운 겨울을 성수동에서 버텨 결국 스승으로부터 1년 반을 배우고 좋은 기회를 얻어 웰트화(바닥 부분을 윗부분에 실로 꿰매어 부착하는 고급 구두 제법) 공장에 스카우트됐다. 손바느질과 재봉틀을 사용하는 소규모 팀의 막내로 들어가 기성화 제작의 전반적인 기술을 습득하며 2년 반을 근무해 성수동에서 5년을 채웠다. 그런 뒤 목표로 했던 영국으로의 슈메이킹 유학을 준비했다.많은 이들은 새로운 전환점에 앞서 도피를 겸한 유학을 준비하지만 박종오는 달랐다. 슈메이킹을 결심한 순간부터 영국 전통 제화를 목표로 5년간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수동에서 기본기를 닦아 유학을 준비하면서 비스포크 슈메이커들의 상당수가 코드웨이너스 칼리지(Cordwainers Collage)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스승 제임스 더커와 함께 선 박종오
구두 제작에 사용되는 도구들
코드웨이너스는 12세기부터 이어온 영국의 제화업자 길드로, 1989년에 이름을 코드웨이너스 칼리지로 바꿨다. 2000년부터는 런던의 유명 패션 대학인 LCF(London College of Fashion)에 합병된 영국 구두 산업의 산실이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기술을 가르치는 코스는 없어지고, 이론 수업만 진행된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래도 뜻을 세운 남자가 이대로 그만둘 리는 없었다. 코드웨이너스에서 기술을 가르치던 튜터들을 찾아가 직접 배우기로 결심하고 수소문을 시작했다. 다행히 세계 최고의 비스포크 슈메이커로 불리는 존 롭(John Lobb LTD)에서 일했던 제임스 더커에게 슈메이킹을 사사할 기회를 얻었다. 물론 이 과정도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처음엔 긴 기간 견습생을 받지 않았던 더커가 박종오에게 이탈리아 제화 학교를 추천했던 것. 하지만 그는 왜 영국 구두를 배워야 하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집요하게 설득해 런던행을 확정 지었다. 더커에게 배우는 동안 그는 틈틈이 시간을 내 코드웨이너스의 튜터들이었으며, 현직에서 활동 중인 장인들에게 슈메이킹과 관련된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전반적인 지식과 기술적 깊이를 얻었다. 클레버리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도미닉 케이시, 존 롭과 클레버리에서 패턴 메이커로 일하고 있는 피오나 캠벨이 그들로 박종오에게 라스트와 패턴 메이킹의 기본을 알려줬다.
MTO(Make To Order) 주문을 위한 기본 구두골들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늘 섬세한 작업이 요구된다.
영국 구두, 그리고 박종오의 구두그가 유독 런던을 고집한 이유는 록 음악에서 시작된 영국을 향한 동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국은 슈트로 대변되는 현대 남성 패션의 근간이 확립된 곳으로, 우리가 입는 옷이 영국의 군복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국 구두는 타국의 구두와 다른 특징을 지닌다. 이탈리아 구두는 화려한 색상을 많이 쓰는 편이고, 일본 구두는 특유의 국민성에 따라 마감이나 디테일에 과하게 매몰되는 경향이 있으며, 프랑스 구두는 화려한 실루엣을 추구하는 데 비해 영국 구두는 실용적이며, 덜 화려하고, 더 튼튼하다. 바로 이런 점이 박종오가 추구하는 슈메이킹과 맞닿아 그에게 확신을 부여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영국의 장인들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라스트는 찰스 왕세자의 라스트 메이커이기도 한 마이클 제임스에게 의뢰해 공급받고 있으며, 모든 가죽과 부자재를 영국에서 직접 수입해 사용한다. 특히 슈메이킹에서 중요한 인솔, 아웃솔, 웰트, 힐 등을 만들 때 쓰는 오크 바크 가죽은 로마 시대부터 가죽을 생산해 온 잉글랜드 남부의 태너리에서 옛 방식 그대로 만든 것을 사용한다. 원자재는 물론 함께 구두를 완성하는 다른 부분을 맡은 이들의 면면도 화려해 팀워크도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박종오는 자신이 만드는 구두를 3개의 영어 단어로 정리했다. ‘Understated, Masculine and Elegant’. 절제되고 남성적인 동시에 우아함을 잃지 않는 구두로 번역이 가능할 텐데, 이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슈메이커를 준비해 온 그가 영국을 택해 구두 만들기를 배운 이유와 맞닿아 있다. 낮은 곳에서 낮은 자로 처신하며 만든 그의 구두는 그래서 힘이 있다.
완성된 구두
일하는 남자의 멋, 그 기본은 구두에서 시작된다. 절제되고 남성적이지만 우아한 그의 구두를 신는 이들은 멋진 남자가 되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스스로 저부(底部)를 택한 그의 구두가 세상을 들끓게 할 그날을 기대한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1호(2020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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