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 누구나 한 번쯤, 달에 가는 상상을 한다. 일부는 쓸데없는 망상이라 치부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그저 낭만적인 이상으로 간직하며, 마지막 남은 일부는 이를 현실로 만든다. 달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뒤늦게 출발했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우리나라 달 탐사의 발자국에 대하여.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아니 더 오래전 인류의 조상이 두 발을 딛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 우주는 신비의 대상이었다. 특히 지구와 가장 가깝게 있는 달은 가 보고 싶고, 정복하고 싶은 미지의 존재였을 것이다.
달로, 우주로 가길 바랐던 건 과거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중국의 전설로 내려오는 명나라 시대 ‘완후’라는 천문학자는 튼튼한 의자에 47개의 거대한 폭죽과 방향을 조종할 수 있는 연을 달고 앉아 하인들이 동시에 도화선에 불을 붙이도록 했다.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완후는 사라졌고, 하인들은 그가 우주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 항공우주국(NASA, 나사)은 완후의 높은 투지를 기념해 달 표면 큰 분화구에 그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이름으로나마 그토록 바라던 우주에 가게 된 것이다.
달 탐사, 그 여정의 시작
완후처럼 우주를 탐사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리고 달은 그들에게 있어 전초기지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달에 먼저 도달하는 사람이, 혹은 국가만이 우주 탐사의 1인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1950년대, 냉전시대와 함께 미국과 구소련의 우주 경쟁이 발발했다. 1958년 8월 미국은 탐사선 파이어니어(Pioneer) 0호를 발사한다. 처음으로 달을 향해 발사된 탐사선이자 지구 대기권 밖으로 나가려는 인류 최초의 시도였으나 안타깝게도 74초 만에 폭발해 버리고 만다. 1959년 9월 처음으로 구소련이 쏘아 올린 루나(Luna) 2호가 달 표면에 도착할 때까지 미국과 구소련은 경쟁적으로 탐사선을 발사했다.
최초로 다른 천체에 도달한 인공물체인 루나 2호는 달 표면에 충돌하는 착륙 방법을 택했지만 달의 자기장과 방사선대가 없다는 사실을 알린, 의미 있는 결과를 보였다. 이어 구소련이 다시 발사한 탐사선, 루나 3호는 달을 근접 통과해 달의 뒷면 사진을 보냈고, 1966년 발사된 루나 10호는 최초로 달 주위를 선회한 궤도선으로 배터리 수명이 다할 때까지 달의 공전 궤도를 460바퀴 돌고, 219번의 데이터를 지구에 전송했다.
미국은 구소련의 연이은 발사와 성공에 자극을 받았다. 1961년 5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달 탐사를 위한 아폴로 계획(Apollo Program)을 발표하며 10년 내로 달에 갈 것임을 공표했다. 구소련의 루나 2호처럼 달 표면에 충돌해 착륙하는 레인저(Ranger) 시리즈를 연달아 시도했으며, 결국 1964년 레인저 7호가 달에 도달하게 된다. 레인저 시리즈는 달 표면의 고해상도 사진을 전송했다. 이후 미국은 달에 연착륙하는 탐사선 서베이어(Surveyor) 시리즈와 달 궤도선 루나 오비터(Lunar Orbiter) 시리즈를 통해 달 표면을 체계적으로 관측하고 착륙 기술의 기반을 다졌다. 구소련도 이에 질세라 지속적으로 루나 시리즈를 발사, 달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무인탐사에서 유인탐사로 가는 길을 다지고 있었다.
달에 사람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은 1968년 구소련이 탐사선인 존드(Zond) 5호에 거북이 한 쌍을 태우면서부터 폭발적으로 커졌다. 달을 근접 통과한 뒤, 지구로 돌아온 존드 5호는 탑승한 거북이 한 쌍이 생존한 채로 귀환해 최초로 생명체가 탄 탐사선이자, 달에서 돌아온 탐사선이 됐다. 드디어 같은 해 12월 21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선장 프랭크 보먼(Frank Borman)과 사령선 조종사 짐 러벨(James Lovell), 달 착륙선 조종사인 윌리엄 앤더스(Willian Anders), 총 3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아폴로 8호가 발사됐다. 발사 68시간 후 달 궤도에 진입, 20시간 동안 돈 후 다시 지구로 돌아온 아폴로 8호는 최초의 유인탐사선이 됐다. 승무원들은 인류 최초로 달 뒷면을 목격했고, 달에서 지구가 떠오르는 어스 라이즈를 최초로 촬영했다.
유인탐사 성공, 그 후
1969년 7월 20일, 전 세계인은 컬러 TV를 통해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7월 16일 케네디우주센터에서 발사된 아폴로 11호에는 선장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과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그리고 달 착륙선 조종사인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이 탑승했다. 발사 3일 후 달의 뒤편에 도착한 아폴로 11호는 달 궤도를 13바퀴 돈 후 착륙 지점인 고요의 바다 20km 상공에 도달했다. 콜린스가 조종하고 있던 사령선 ‘콜롬비아’에서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 착륙선인 ‘이글’로 갈아탔고, 달 표면에 착륙했다.
역사적인 인류의 첫 발자국을 찍은 암스트롱은 올드린과 함께 달 표면에 성조기를 세우고 사진 촬영을 했으며, 암석과 토양을 채취했다. 그 후 이글을 이륙시켜 무사히 달 궤도를 돌던 콜롬비아와 도킹한 후 지구로 귀환했다. 이글은 달 궤도에 남겨 놓고, 사령선만 대기권을 지나 지구로 돌아왔으며 이는 워싱턴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됐다. 이후 미국은 항해 도중 산소탱크가 폭발해 달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아폴로 13호를 제외하고, 아폴로 17호까지 총 6번의 달 착륙에 성공했다.
구소련도 루나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달에 보내 토양 시료를 채취하는 등 활발히 달 탐사를 진행했으나 1974년 루나 24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달에 탐사선을 보내지 않았다. 1980년대는 그 어떤 국가도 달에 탐사선을 발사하지 않았다. 막대한 투자 비용과 우주비행사들이 겪는 위험성에 비해 과학적·사회적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화성이나 목성과 같은 더 먼 행성에 대한 관심이 생겨 태양계를 탐사하는 움직임이 보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1990년대 들어서 재개된 달 탐사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 중국, 인도 등 많은 국가들이 뛰어들었다. 또한 미국은 1994년 달 궤도선, 클레멘타인(Clementine)을 발사해 극지방에 얼음이 있을 수 있다는 증거를 발견, 달에도 물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입증하고자 했다. 2003년에는 유럽 최초의 달 탐사선 스마트(Smart) 1호가 달 궤도에 진입했다. 그리고 달이 45억 년 전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해 생겼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수집했다. 2007년에는 일본이 달 궤도선 카구야(Kaguya)를, 중국이 달 궤도선 창어 1호(Chang’e 1)를 발사했다. 2008년에는 인도가 달 궤도선 찬드라얀(Chandrayaan) 1호를 발사했는데 물분자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발견하는 등 아시아 국가들의 달 탐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국내 달 탐사의 흐름
우리나라 달 탐사의 시작은 2007년 11월 ‘우주개발사업 세부실천 로드맵’을 발표하며 시작됐다. 우주 탐사 프로그램을 중장기적으로 추진해 달 탐사를 전초기지로 삼아 2017년부터 2020년 사이 달 탐사위성 1호(궤도선)를,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달 탐사위성 2호(착륙선)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아리랑 1호와 2호로 알려진 다목적 실용위성 1호와 2호 개발을 통해 탐사위성의 본체 기술은 상당 부분 확보했으나 다른 우주 관련 기술들은 기초 수준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함으로써 미약한 부분들을 개발하고, 미국, 유럽, 일본 등 우주 선진국의 국제 우주탐사 프로그램에 참여해 기초기술을 습득하고자 했다. 더욱이 당시 예정됐던 2008년 한국 최초 우주인 배출을 계기로 부분적인 유인우주 기술과 유인우주선을 포함한 다양한 우주탐사 기초기술을 습득할 것으로 기대했다.
2011년 ‘제2차 우주개발진흥 기본계획’에 따라 일정이 변경됐다. 2023년까지 달 궤도선을, 2025년까지 달 착륙선을 개발 및 발사하는 것으로 수정된 것.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따라 달 착륙을 5년 단축함으로써 일정은 또 한 번 변경됐다. 2018년 달 궤도선을, 2020년 달 착륙선을 발사하는 것으로 조정됐으며, 이는 2013년 11월 ‘우주개발중장기계획’에 반영됐다. 달 탐사 사업을 2017년까지 시험용 달 궤도선 개발하는 1단계와 2020년까지 한국형 발사체를 활용한 궤도선·착륙선 자력 발사를 2단계로 나눴다.
2016년에 이르러서야 달 탐사 1단계 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됐다. 나사와 공동으로 2018년까지 한국용 시험용 달 궤도선(Korea Pathfinder Lunar Orbiter, KPLO)을 개발하고, 나사의 발사체를 이용해 발사하기로 했다. 달 궤도선은 달에 착륙하지 않고 달 주변을 돌면서 달 표면을 촬영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12월에 체결된 ‘한·미 달 탐사 협력 이행 약정’은 2018년 발사할 시험용 달 궤도선을 개발하고 운영하기 위한 양국 협력의 내용을 담았다. 우리나라는 달 궤도선의 전체 시스템 제작과 운영에 대한 총괄 책임을, 미국은 우리나라가 싣는 탑재체(고해상도 카메라, 광시야 편광 카메라, 달 자기장 측정기, 감마선 측정기, 우주인터넷 시험탑재체 총 5개의 탑재체)와 중복되지 않는 종류의 탑재체를 개발해 달 궤도선에 싣는 것을 담당했다.
2017년 8월, 달 탐사 1단계 사업 일정이 변경됐다. 당초 2018년 12월 완료 예정이었던 일정은 2020년 12월 완료로 변경돼 24개월 연장된 것이다. 2018년 1월, ‘제3차 우주개발진흥 기본계획’의 일환으로 2020년 시험용 달 궤도선 발사 이후 사업의 임무 성과 평가 후 차기 단계를 착수할지에 대해 결정, 2030년 달 착륙을 목표로 달 탐사 2단계 사업을 2019년부터 착수한다고 밝혔다. 또한 달 착륙 이후 차기 행선지로 다시 달을 선택하지 않고 달 귀환에서 소행성 귀환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2019년 9월, 달 탐사 사업 1단계는 2022년 7월로 19개월 연장되고 만다. 상세 설계 및 시험모델 개발 과정에서 기술적 한계로 경량화에 어려움을 겪어 달 궤도선의 당초 목표(550kg)보다 중량이 128kg 증가됐고, 이로 인한 연료 부족과 임무 기간 단축 가능성 등 다양한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달 궤도선의 이동 경로 또한 수정됐다. 원래 계획했던 단계적 루프 트랜스퍼(Phasing Loop Transfer, PLT) 방식은 지구를 3.5바퀴 돈 후 점차 거리를 늘려 가며 달에 다다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궤도선의 무게를 줄이지 못했기 때문에 나사가 연료를 줄일 수 있는 달 진입 방식인 달 궤도 전이(Ballistic Lunar Transfer, BLT) 방식을 제안한 것. 궤도선을 지구와 태양의 중력이 맞닿는 곳까지 다다르게 한 다음, 달의 중력에 의해 점차 달에 진입할 수 있는 경로다. 기존에 비해 석 달이 걸리지만, 연료를 25% 절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 달 탐사의 역사는 길진 않지만, 수많은 시행착오와 일정 연기를 겪어 왔다. 지난해 달 궤도선 발사 일정을 2022년 7월로 미루고, 달 진입 방식을 변경한 이후 점차 안정을 찾는 기세다.
사진 한국경제DB | 도움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1호(2020년 06월) 기사입니다.]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아니 더 오래전 인류의 조상이 두 발을 딛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 우주는 신비의 대상이었다. 특히 지구와 가장 가깝게 있는 달은 가 보고 싶고, 정복하고 싶은 미지의 존재였을 것이다.
달로, 우주로 가길 바랐던 건 과거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중국의 전설로 내려오는 명나라 시대 ‘완후’라는 천문학자는 튼튼한 의자에 47개의 거대한 폭죽과 방향을 조종할 수 있는 연을 달고 앉아 하인들이 동시에 도화선에 불을 붙이도록 했다.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완후는 사라졌고, 하인들은 그가 우주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 항공우주국(NASA, 나사)은 완후의 높은 투지를 기념해 달 표면 큰 분화구에 그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이름으로나마 그토록 바라던 우주에 가게 된 것이다.
달 탐사, 그 여정의 시작
완후처럼 우주를 탐사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리고 달은 그들에게 있어 전초기지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달에 먼저 도달하는 사람이, 혹은 국가만이 우주 탐사의 1인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1950년대, 냉전시대와 함께 미국과 구소련의 우주 경쟁이 발발했다. 1958년 8월 미국은 탐사선 파이어니어(Pioneer) 0호를 발사한다. 처음으로 달을 향해 발사된 탐사선이자 지구 대기권 밖으로 나가려는 인류 최초의 시도였으나 안타깝게도 74초 만에 폭발해 버리고 만다. 1959년 9월 처음으로 구소련이 쏘아 올린 루나(Luna) 2호가 달 표면에 도착할 때까지 미국과 구소련은 경쟁적으로 탐사선을 발사했다.
최초로 다른 천체에 도달한 인공물체인 루나 2호는 달 표면에 충돌하는 착륙 방법을 택했지만 달의 자기장과 방사선대가 없다는 사실을 알린, 의미 있는 결과를 보였다. 이어 구소련이 다시 발사한 탐사선, 루나 3호는 달을 근접 통과해 달의 뒷면 사진을 보냈고, 1966년 발사된 루나 10호는 최초로 달 주위를 선회한 궤도선으로 배터리 수명이 다할 때까지 달의 공전 궤도를 460바퀴 돌고, 219번의 데이터를 지구에 전송했다.
미국은 구소련의 연이은 발사와 성공에 자극을 받았다. 1961년 5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달 탐사를 위한 아폴로 계획(Apollo Program)을 발표하며 10년 내로 달에 갈 것임을 공표했다. 구소련의 루나 2호처럼 달 표면에 충돌해 착륙하는 레인저(Ranger) 시리즈를 연달아 시도했으며, 결국 1964년 레인저 7호가 달에 도달하게 된다. 레인저 시리즈는 달 표면의 고해상도 사진을 전송했다. 이후 미국은 달에 연착륙하는 탐사선 서베이어(Surveyor) 시리즈와 달 궤도선 루나 오비터(Lunar Orbiter) 시리즈를 통해 달 표면을 체계적으로 관측하고 착륙 기술의 기반을 다졌다. 구소련도 이에 질세라 지속적으로 루나 시리즈를 발사, 달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무인탐사에서 유인탐사로 가는 길을 다지고 있었다.
달에 사람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은 1968년 구소련이 탐사선인 존드(Zond) 5호에 거북이 한 쌍을 태우면서부터 폭발적으로 커졌다. 달을 근접 통과한 뒤, 지구로 돌아온 존드 5호는 탑승한 거북이 한 쌍이 생존한 채로 귀환해 최초로 생명체가 탄 탐사선이자, 달에서 돌아온 탐사선이 됐다. 드디어 같은 해 12월 21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선장 프랭크 보먼(Frank Borman)과 사령선 조종사 짐 러벨(James Lovell), 달 착륙선 조종사인 윌리엄 앤더스(Willian Anders), 총 3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아폴로 8호가 발사됐다. 발사 68시간 후 달 궤도에 진입, 20시간 동안 돈 후 다시 지구로 돌아온 아폴로 8호는 최초의 유인탐사선이 됐다. 승무원들은 인류 최초로 달 뒷면을 목격했고, 달에서 지구가 떠오르는 어스 라이즈를 최초로 촬영했다.
유인탐사 성공, 그 후
1969년 7월 20일, 전 세계인은 컬러 TV를 통해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7월 16일 케네디우주센터에서 발사된 아폴로 11호에는 선장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과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그리고 달 착륙선 조종사인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이 탑승했다. 발사 3일 후 달의 뒤편에 도착한 아폴로 11호는 달 궤도를 13바퀴 돈 후 착륙 지점인 고요의 바다 20km 상공에 도달했다. 콜린스가 조종하고 있던 사령선 ‘콜롬비아’에서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 착륙선인 ‘이글’로 갈아탔고, 달 표면에 착륙했다.
역사적인 인류의 첫 발자국을 찍은 암스트롱은 올드린과 함께 달 표면에 성조기를 세우고 사진 촬영을 했으며, 암석과 토양을 채취했다. 그 후 이글을 이륙시켜 무사히 달 궤도를 돌던 콜롬비아와 도킹한 후 지구로 귀환했다. 이글은 달 궤도에 남겨 놓고, 사령선만 대기권을 지나 지구로 돌아왔으며 이는 워싱턴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됐다. 이후 미국은 항해 도중 산소탱크가 폭발해 달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아폴로 13호를 제외하고, 아폴로 17호까지 총 6번의 달 착륙에 성공했다.
구소련도 루나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달에 보내 토양 시료를 채취하는 등 활발히 달 탐사를 진행했으나 1974년 루나 24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달에 탐사선을 보내지 않았다. 1980년대는 그 어떤 국가도 달에 탐사선을 발사하지 않았다. 막대한 투자 비용과 우주비행사들이 겪는 위험성에 비해 과학적·사회적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화성이나 목성과 같은 더 먼 행성에 대한 관심이 생겨 태양계를 탐사하는 움직임이 보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1990년대 들어서 재개된 달 탐사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 중국, 인도 등 많은 국가들이 뛰어들었다. 또한 미국은 1994년 달 궤도선, 클레멘타인(Clementine)을 발사해 극지방에 얼음이 있을 수 있다는 증거를 발견, 달에도 물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입증하고자 했다. 2003년에는 유럽 최초의 달 탐사선 스마트(Smart) 1호가 달 궤도에 진입했다. 그리고 달이 45억 년 전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해 생겼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수집했다. 2007년에는 일본이 달 궤도선 카구야(Kaguya)를, 중국이 달 궤도선 창어 1호(Chang’e 1)를 발사했다. 2008년에는 인도가 달 궤도선 찬드라얀(Chandrayaan) 1호를 발사했는데 물분자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발견하는 등 아시아 국가들의 달 탐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국내 달 탐사의 흐름
우리나라 달 탐사의 시작은 2007년 11월 ‘우주개발사업 세부실천 로드맵’을 발표하며 시작됐다. 우주 탐사 프로그램을 중장기적으로 추진해 달 탐사를 전초기지로 삼아 2017년부터 2020년 사이 달 탐사위성 1호(궤도선)를,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달 탐사위성 2호(착륙선)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아리랑 1호와 2호로 알려진 다목적 실용위성 1호와 2호 개발을 통해 탐사위성의 본체 기술은 상당 부분 확보했으나 다른 우주 관련 기술들은 기초 수준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함으로써 미약한 부분들을 개발하고, 미국, 유럽, 일본 등 우주 선진국의 국제 우주탐사 프로그램에 참여해 기초기술을 습득하고자 했다. 더욱이 당시 예정됐던 2008년 한국 최초 우주인 배출을 계기로 부분적인 유인우주 기술과 유인우주선을 포함한 다양한 우주탐사 기초기술을 습득할 것으로 기대했다.
2011년 ‘제2차 우주개발진흥 기본계획’에 따라 일정이 변경됐다. 2023년까지 달 궤도선을, 2025년까지 달 착륙선을 개발 및 발사하는 것으로 수정된 것.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따라 달 착륙을 5년 단축함으로써 일정은 또 한 번 변경됐다. 2018년 달 궤도선을, 2020년 달 착륙선을 발사하는 것으로 조정됐으며, 이는 2013년 11월 ‘우주개발중장기계획’에 반영됐다. 달 탐사 사업을 2017년까지 시험용 달 궤도선 개발하는 1단계와 2020년까지 한국형 발사체를 활용한 궤도선·착륙선 자력 발사를 2단계로 나눴다.
2016년에 이르러서야 달 탐사 1단계 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됐다. 나사와 공동으로 2018년까지 한국용 시험용 달 궤도선(Korea Pathfinder Lunar Orbiter, KPLO)을 개발하고, 나사의 발사체를 이용해 발사하기로 했다. 달 궤도선은 달에 착륙하지 않고 달 주변을 돌면서 달 표면을 촬영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12월에 체결된 ‘한·미 달 탐사 협력 이행 약정’은 2018년 발사할 시험용 달 궤도선을 개발하고 운영하기 위한 양국 협력의 내용을 담았다. 우리나라는 달 궤도선의 전체 시스템 제작과 운영에 대한 총괄 책임을, 미국은 우리나라가 싣는 탑재체(고해상도 카메라, 광시야 편광 카메라, 달 자기장 측정기, 감마선 측정기, 우주인터넷 시험탑재체 총 5개의 탑재체)와 중복되지 않는 종류의 탑재체를 개발해 달 궤도선에 싣는 것을 담당했다.
2017년 8월, 달 탐사 1단계 사업 일정이 변경됐다. 당초 2018년 12월 완료 예정이었던 일정은 2020년 12월 완료로 변경돼 24개월 연장된 것이다. 2018년 1월, ‘제3차 우주개발진흥 기본계획’의 일환으로 2020년 시험용 달 궤도선 발사 이후 사업의 임무 성과 평가 후 차기 단계를 착수할지에 대해 결정, 2030년 달 착륙을 목표로 달 탐사 2단계 사업을 2019년부터 착수한다고 밝혔다. 또한 달 착륙 이후 차기 행선지로 다시 달을 선택하지 않고 달 귀환에서 소행성 귀환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2019년 9월, 달 탐사 사업 1단계는 2022년 7월로 19개월 연장되고 만다. 상세 설계 및 시험모델 개발 과정에서 기술적 한계로 경량화에 어려움을 겪어 달 궤도선의 당초 목표(550kg)보다 중량이 128kg 증가됐고, 이로 인한 연료 부족과 임무 기간 단축 가능성 등 다양한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달 궤도선의 이동 경로 또한 수정됐다. 원래 계획했던 단계적 루프 트랜스퍼(Phasing Loop Transfer, PLT) 방식은 지구를 3.5바퀴 돈 후 점차 거리를 늘려 가며 달에 다다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궤도선의 무게를 줄이지 못했기 때문에 나사가 연료를 줄일 수 있는 달 진입 방식인 달 궤도 전이(Ballistic Lunar Transfer, BLT) 방식을 제안한 것. 궤도선을 지구와 태양의 중력이 맞닿는 곳까지 다다르게 한 다음, 달의 중력에 의해 점차 달에 진입할 수 있는 경로다. 기존에 비해 석 달이 걸리지만, 연료를 25% 절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 달 탐사의 역사는 길진 않지만, 수많은 시행착오와 일정 연기를 겪어 왔다. 지난해 달 궤도선 발사 일정을 2022년 7월로 미루고, 달 진입 방식을 변경한 이후 점차 안정을 찾는 기세다.
사진 한국경제DB | 도움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1호(2020년 0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