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tor & Mentee] 사제 3대, 피아노로 인생을 조율하다
입력 2020-04-24 14:17:03
수정 2020-04-24 14:17:03
[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누구에게나 은사는 있다.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건만, 감사의 표현에는 인색한 편이다. 반면 도제식으로 전수되는 분야는 사제 간 정이 남다르다. 피아노 조율도 그중 하나다. 국내 명장 1호인 이종열 조율사와 그의 제자 이정규 조율사, 그리고 3대 제자인 김서원 조율사를 만났다. 조율에 감동을 주자는 그들의 신조만큼 사제 간 끈끈함도 남달랐다.
백전노장이라는 표현이 제일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1938년생, 올해 한국 나이로 83세의 ‘노장’ 이종열 조율사는 64년의 쟁쟁한 경력을 자랑한다. 오랜 세월 동안 그는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다. 피아노 앞에 선 그는 늘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타이는 정갈하게 맨다. 80이 넘는 나이에도 굳건한 자세와 표정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발산한다.
이종열 조율사는 오랜 경력만큼 특출 난 이력을 지녔다. 2003년 6월,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내한해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한 후 ‘미스터 리’의 조율에 찬사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한 인터뷰에서 “피아노 음에서 빛이 나게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내로라하는 해외 피아니스트들이 내한하면 그의 실력에 모두 감탄을 자아낸다. 국위선양이 따로 없는 셈이다. 2007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명장’으로 인정했다. 국내 피아노 조율사 명장 1호다.
이종열 조율사는 스스로 음악을 좋아하는 유전자를 타고났다고 말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단소를 만들어 부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던 어려웠던 시절 유일하게 갖고 놀 수 있었던 일제 하모니카를 뒷동산에 올라가 불며 놀던 그 당시를 회상했다.
“고등학생 때 지인이 전도를 해서 교회에 갔는데, 거기에 풍금이 있더란 말입니다. 하모니카 하나로도 황홀했는데, 풍금을 보니 눈이 홱 뒤집힐 정도였죠. 예배가 끝나면 풍금 연습을 했는데 그냥 풍금이나 치고 말지, 화음을 많이 들어 보니 어떻게 하면 풍금 소리를 더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생긴 겁니다.”
그렇게 이종열 조율사는 고등학교 과정 물리 교과서 중 소리 부분을 찾아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교과서에 풍금을 조율하는 방법에 대해 나와 있지는 않을 터. 진동이 빠르면 음이 높고, 진동이 느리면 음이 낮다는 이론 하나만 가지고 교회의 풍금을 만지기 시작했다. 결과는 엉망진창. 결국 그는 조율을 독학하기로 결심했다.
“풍금을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그 원리를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일본에서 어렵사리 조율과 관련된 책을 주문했는데 두 달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막상 일본에서 책이 와 봐야 일본어를 모르니 소용이 없잖아요. 그 책방에 주문을 한 김에 일본어 교재도 사와서 혼자 공부했죠. 결국 교회 풍금을 고운 소리로 싹 고쳐 놓았어요. 그래서 더 신이 났던 거 같아요.”
그의 수제자인 이정규 조율사가 가장 놀라는 부분이다. 그 어린 나이에 다른 나라 언어로 독학해서 조율의 기초 원리를 이해했다는 스승에 대해 대단함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전 선생님하고 완전 달라요. 재능이 뛰어나거나 피아노를 잘 쳐서 조율사를 시작한 건 아니거든요.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는 결혼하라고 하는데 뭐라도 배우고 결혼을 하고 싶은 거예요. 우연히 신문에 실린 피아노 조율에 관한 기사를 읽고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정규 조율사는 스스로 절박하지 않아 배움이 느렸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어 피아노를 곧잘 치는 친구에게 부탁해 눈으로 익힌 다음, 집에 가서 달력 뒷면에 건반을 그려 저녁 내내 연습했다. 학원에서 빈 연습실이 생기면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 우여곡절 끝에 6개월간 학원 코스를 끝내고 실전에 돌입할 때가 됐다. 더 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처음에 학원 강사가 피아노가 한 집 건너 하나 있으니 굶어 죽을 일은 없다고 호언장담하셨는데, 막상 나가 보니 제가 조율사인 걸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당시에는 3년 경력이 있어야 피아노 조율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기에 이정규 조율사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지인의 부탁으로 공짜로 해 주는 것은 물론, 교회를 찾아다니며 무료로 조율하기도 했다. 피아노가 있어야 조율을 할 수 있고, 실력이 늘기 위해선 계속 조율을 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 3년이 지나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동료 수강생의 추천을 받아 한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이종열 조율사다.
3대 제자까지 이어진 인연
“선생님은 ‘나 잘해’라고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몸소 보여 주시고 모르는 게 있으면 배우라고 하셨죠. 지금 생각해 보니 미련한 짓인데, 전 모르면 혼날까 봐 옆에서 보기만 했거든요.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제가 배웠던 다른 선생님들과는 인품이 달랐어요. 그래서 절대 나가지 말아야겠다, 딱 달라붙어 있어야겠다고 결심했죠.”
이종열 조율사 역시 처음 이정규 조율사를 만났을 당시를 떠올렸다. “일바지에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있었는데, 어찌나 촌티가 흐르던지.(웃음) 그래도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기특했어요. 당시 제자들이 저희 집 2층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가지고 끼리끼리 모여 연습하고, 저는 퇴근하고 돌아와서 얼마나 연습했는지 검사하곤 했습니다.”
이정규 조율사는 그 무리 중 자신이 특출 난 게 없었기 때문에 끈기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종열 조율사를 따라다니면서 보는 눈이 확실히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서른 즈음에 참된 스승을 만난 이정규 조율사는 그때부터 인생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원래 뭐라도 배우고 결혼을 하려고 시작했는데, 선생님을 만나고 1~2년 동안 오히려 마음이 조율로 기울더라고요. 정말 선생님처럼 훌륭한 조율사가 돼 보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이정규 조율사의 직속 제자이자, 이종열 조율사의 3대 제자인 김서원 조율사는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예고에도 진학했다. 열심히 피아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힘에 부치자, 그의 아버지는 놀랍게도 피아노 조율사를 권유했다.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 위치한 피아노 조율 학원을 처음 가 봤어요. 그때까지 피아노만 치다가 조율이라는 낯선 분야를 만나게 된 거죠. 피아노를 분해해서 그 안에 구조들이 다 보이는데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같기도 하고, 그 속에서 소리가 변화하는 게 너무 흥미로웠어요. 그다음 날 바로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고 조율 학원을 등록했죠.”
조율 학원은 일반적으로 6개월 코스, 그랜드 피아노는 1년 코스로 구성된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서원 조율사는 2년 넘게 학원만 다녔다. 학생 신분으로 실제 조율사로 일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교복을 입고 경기대회에 참가한 김서원 조율사는 시험감독관으로 왔던 이정규 조율사를 만나게 된다.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남부터미널역에서 예술의전당으로 가는 차에 동승했는데, 옆에 큰 선생님(이종열 조율사)이 앉아 계신 거예요. 처음엔 웬 할아버지가 탔나 했죠.(웃음) 실제로 따라가서 보니 신세계였어요. 너무 높으신 선생님들이 계시니 좀 무섭기도 했고요. ‘이거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딱 붙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정규 조율사 역시 김서원 조율사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알았죠. 절대로 그만둘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요. 지금은 저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어요.”
가족보다 깊은 사제의 정
실제로 이정규 조율사와 김서원 조율사는 엄마와 딸 같은 친분을 자랑한다. 팔짱을 끼고 다니는 건 물론, 허리춤을 감는 등 감도 높은 스킨십도 서슴없다. 서먹한 스승과 제자 사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이정규 조율사도 이 점에 동의한다. “딸 같은 존재죠. 얘(김서원 조율사)는 어머니가 있지만, 전 딸이 없거든요. 제가 오히려 많이 의존하기도 해요. 가끔은 ‘우리 선생님이 나를 이렇게 생각하셨겠구나’를 느낄 때가 있어요.”
이종열 조율사와 이정규 조율사, 김서원 조율사는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물론 고민 상담도 예외는 아니다. 이종열 조율사는 아들과 딸에게는 상의하지 못한 것을 제자들에게 먼저 물어본다고 고백했다. 김서원 조율사도 마찬가지다.
“저도 부모님보다 선생님들과 의논하는 게 더 빠를 때가 있어요. 일하다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 전화를 드리면 ‘너가 알아서 해’라는 말씀을 두 분 모두 하신 적이 없어요. 한번은 답답하셨는지 제가 있는 곳까지 두 분이 오셔서 해결해 주신 적도 있어요.”
이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한 만큼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대견함 역시 남다르다. 이정규 조율사는 위대한 스승과 센스 있는 제자를 둔 입장으로서 참 좋다고 말한다. “우리 선생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걸 느낀 적이 있어요. 조율 과정에는 음을 맞추는 ‘조율’과 피아노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조정’, 음색을 맞추는 ‘정음’이 모두 포함돼요. 하지만 외국에서는 3가지를 따로 하고, 또 따로 돈을 받는다고 해요. 선배 중 한 분이 이 점을 지적하면서 선생님께도 각각 따로 돈을 받으라고 권유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그 선배에게 ‘나는 오랫동안 조율비만 받고 다 했으니 고객에게 돈을 더 받을 수 없지만 자네는 설명을 드리고 고객이 허락하면 그렇게 하게’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그게 너무 바보 같은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이 저에게는 조율비를 따로따로 받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조율은 계속 해 봐야 실력이 느는 건데 고객이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디서 해 볼 것이냐고 되물으셨죠. 선생님은 늘 돈을 벌려고 하지 말라 하셨어요. 정말 열심히 연마하면 돈은 저절로 들어온다고요.”
이종열 조율사의 신조는 ‘찾아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불려 다니는 사람이 되자’다. “내가 가진 상품이 기술인데, 이 상품이 좋으면 사 달라고 하지 않아도 입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찾기 마련입니다. 그럼 스스로에게 더 당당해지죠.”
이종열 조율사 역시 제자들이 대견스러울 때가 많다. 그가 꼽은 건 이정규 조율사가 세종문화회관 전족 조율을 맡았던 순간이다. 이종열 조율사는 예술의전당 이전에 세종문화회관 전속 조율사였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 때문에 억울하게 쫓겨나듯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예술의전당에 스카우트돼 전속 조율사로 일하고 몇 해가 지날 즈음, 세종문화회관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새로 온 조율사가 연주자들과 트러블이 많아서 다시 저와 일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새로운 관계자가 제가 이전에 세종문화회관 전속이었다는 걸 알고 전화를 한 거죠. 하지만 저는 이미 예술의전당을 맡고 있었고, 연주자가 조율사를 찾는 시간은 대부분 퇴근 시간이라 2곳을 왔다 갔다 할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이정규 조율사를 설득해 소개시켜 줬죠. 그렇게 연주장은 맡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친구가 지금까지도 잘하고 있으니, 아주 대견스러워요.”
올해로 조율에 입문한 지 13년이 되는 김서원 조율사는 금호아트홀 전속 조율사다.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두 선생님들의 눈에서는 대견함이 묻어 나온다. 특히 이정규 조율사는 처음 가르칠 때, 설명도 해 주지 않은 것을 알아서 척척 해 내는 경우도 많았다며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서원 조율사도 일하다가 스승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하는 일을 가치로 매겨서 돈으로 환산 받으려고 하잖아요. 두 분은 오직 피아노 하나만 생각하는 장인정신으로만 오랜 시간을 일해 오셨어요. 최고의 기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청각 조율의 미학
안타깝게도 아날로그적인 방식들이 사양산업으로 접어드는 시대다. 조율 역시 사람의 청각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계들이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이종열 조율사는 사람이 귀로 들으며 하는 조율이 아름답다고 강조한다.
“오직 사람의 귀만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돈시킬 수 있죠. 앞으로 청각 조율은 줄어들 거예요. 요즘 같은 때에 기계를 보고 하면 되는데, 귀에만 의존하는 건 힘들거든. 하지만 공연장에서 피아노 소리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한, 청각 조율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물론 실력이 상위권에 있으면 경기가 불황이고, 조율이 사양산업이 된다 하더라도 살아남는 거죠. 그래서 지금까지도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어요.”
김서원 조율사도 이에 크게 동의한다. “희소가치라는 것이 있잖아요. 지금 스마트폰도 있고, 전자시계도 있지만, 스위스에서 장인들이 만든 기계식 시계를 찾는 이들은 여전히 있어요. 또 그게 명품화가 되고요. 피아노도 디지털이 우세하지만 클래식 시장은 딱 자리 잡고 있어요. 그 규모는 작아질지언정 절대 없어지진 않을 거예요.”
이는 이종열 조율사가 후학을 열심히 양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혼자만 반짝이다 가면 안 돼잖아요. 제가 가진 모든 걸 다 꺼내서 보여 주려고 합니다. 물론 제자들이 얼마나 잘 따라가고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진보가 있겠지만요. 마지막 단계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겁니다. 스스로 마음에 들 때까지 붙잡고 늘어지면 언젠가 자기 것이 되겠죠.”
이종열 조율사는 항상 안달이 난 상태라고 언급했다. 사회에 나가서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공장에서 새 피아노를 조율하는 것이었다. 삼익피아노로 직장을 옮겨 자신의 이름을 달고 조율을 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조금 더 전문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한옥이냐 양옥이냐에 따라 피아노의 상태가 달랐고 집집마다 피아노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동안 알고 있던 기본적인 지식으로는 부족해 더 공부했다. 한국에서 최고의 조율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세종문화회관에 스카우트된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쟁쟁한 피아니스트들을 만나게 됐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스스로도 세계적인 기술을 터득해야겠다 싶어 항상 박차를 가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조율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줘야 합니다. 조율은 매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일반 가정집에서는 1년에 한 번 조율을 해도 잘 관리하는 편에 속합니다. 그런 분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을 부리면 안 되죠.”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스승의 날을 위한 특별한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정규 조율사는 자신의 스승이 일절 대접을 받 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석 달에 한 번, 넉 달에 한 번 일을 하니 수입이 얼마나 있겠어요. 조율은 부업이었고, 뜨개질을 주업으로 삼아 생계를 이어나갔죠. 그러다 선생님을 만났고요. 레슨을 받으려면 돈을 내야 하는데 선생님께선 돈도 받지 않으시고, 그렇다고 제자들이 식사를 대접하려고 하면 선생님께선 밥걱정하지 말고 배우러 오라고 하셨어요. 저희들 모두 돈 못 버는 거 다 안다고요.”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20년을 했어요. 밥 얻어먹는 거를. 선생님께선 명절도 챙기지 말라 하셔서 설날이나 추석 때 인사드린 적도 없어요. 대신 선생님의 생신이나 스승의 날은 꼭 챙겨요. 거창하게 하는 건 아니고, 모여서 같이 식사하는 정도예요. 올해도 그렇게 스승의 날을 보내겠죠.”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0호(2020년 05월) 기사입니다.]
백전노장이라는 표현이 제일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1938년생, 올해 한국 나이로 83세의 ‘노장’ 이종열 조율사는 64년의 쟁쟁한 경력을 자랑한다. 오랜 세월 동안 그는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다. 피아노 앞에 선 그는 늘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타이는 정갈하게 맨다. 80이 넘는 나이에도 굳건한 자세와 표정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발산한다.
이종열 조율사는 오랜 경력만큼 특출 난 이력을 지녔다. 2003년 6월,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내한해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한 후 ‘미스터 리’의 조율에 찬사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한 인터뷰에서 “피아노 음에서 빛이 나게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내로라하는 해외 피아니스트들이 내한하면 그의 실력에 모두 감탄을 자아낸다. 국위선양이 따로 없는 셈이다. 2007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명장’으로 인정했다. 국내 피아노 조율사 명장 1호다.
이종열 조율사는 스스로 음악을 좋아하는 유전자를 타고났다고 말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단소를 만들어 부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던 어려웠던 시절 유일하게 갖고 놀 수 있었던 일제 하모니카를 뒷동산에 올라가 불며 놀던 그 당시를 회상했다.
“고등학생 때 지인이 전도를 해서 교회에 갔는데, 거기에 풍금이 있더란 말입니다. 하모니카 하나로도 황홀했는데, 풍금을 보니 눈이 홱 뒤집힐 정도였죠. 예배가 끝나면 풍금 연습을 했는데 그냥 풍금이나 치고 말지, 화음을 많이 들어 보니 어떻게 하면 풍금 소리를 더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생긴 겁니다.”
그렇게 이종열 조율사는 고등학교 과정 물리 교과서 중 소리 부분을 찾아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교과서에 풍금을 조율하는 방법에 대해 나와 있지는 않을 터. 진동이 빠르면 음이 높고, 진동이 느리면 음이 낮다는 이론 하나만 가지고 교회의 풍금을 만지기 시작했다. 결과는 엉망진창. 결국 그는 조율을 독학하기로 결심했다.
“풍금을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그 원리를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일본에서 어렵사리 조율과 관련된 책을 주문했는데 두 달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막상 일본에서 책이 와 봐야 일본어를 모르니 소용이 없잖아요. 그 책방에 주문을 한 김에 일본어 교재도 사와서 혼자 공부했죠. 결국 교회 풍금을 고운 소리로 싹 고쳐 놓았어요. 그래서 더 신이 났던 거 같아요.”
그의 수제자인 이정규 조율사가 가장 놀라는 부분이다. 그 어린 나이에 다른 나라 언어로 독학해서 조율의 기초 원리를 이해했다는 스승에 대해 대단함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전 선생님하고 완전 달라요. 재능이 뛰어나거나 피아노를 잘 쳐서 조율사를 시작한 건 아니거든요.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는 결혼하라고 하는데 뭐라도 배우고 결혼을 하고 싶은 거예요. 우연히 신문에 실린 피아노 조율에 관한 기사를 읽고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정규 조율사는 스스로 절박하지 않아 배움이 느렸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어 피아노를 곧잘 치는 친구에게 부탁해 눈으로 익힌 다음, 집에 가서 달력 뒷면에 건반을 그려 저녁 내내 연습했다. 학원에서 빈 연습실이 생기면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 우여곡절 끝에 6개월간 학원 코스를 끝내고 실전에 돌입할 때가 됐다. 더 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처음에 학원 강사가 피아노가 한 집 건너 하나 있으니 굶어 죽을 일은 없다고 호언장담하셨는데, 막상 나가 보니 제가 조율사인 걸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당시에는 3년 경력이 있어야 피아노 조율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기에 이정규 조율사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지인의 부탁으로 공짜로 해 주는 것은 물론, 교회를 찾아다니며 무료로 조율하기도 했다. 피아노가 있어야 조율을 할 수 있고, 실력이 늘기 위해선 계속 조율을 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 3년이 지나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동료 수강생의 추천을 받아 한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이종열 조율사다.
3대 제자까지 이어진 인연
“선생님은 ‘나 잘해’라고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몸소 보여 주시고 모르는 게 있으면 배우라고 하셨죠. 지금 생각해 보니 미련한 짓인데, 전 모르면 혼날까 봐 옆에서 보기만 했거든요.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제가 배웠던 다른 선생님들과는 인품이 달랐어요. 그래서 절대 나가지 말아야겠다, 딱 달라붙어 있어야겠다고 결심했죠.”
이종열 조율사 역시 처음 이정규 조율사를 만났을 당시를 떠올렸다. “일바지에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있었는데, 어찌나 촌티가 흐르던지.(웃음) 그래도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기특했어요. 당시 제자들이 저희 집 2층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가지고 끼리끼리 모여 연습하고, 저는 퇴근하고 돌아와서 얼마나 연습했는지 검사하곤 했습니다.”
이정규 조율사는 그 무리 중 자신이 특출 난 게 없었기 때문에 끈기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종열 조율사를 따라다니면서 보는 눈이 확실히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서른 즈음에 참된 스승을 만난 이정규 조율사는 그때부터 인생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원래 뭐라도 배우고 결혼을 하려고 시작했는데, 선생님을 만나고 1~2년 동안 오히려 마음이 조율로 기울더라고요. 정말 선생님처럼 훌륭한 조율사가 돼 보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이정규 조율사의 직속 제자이자, 이종열 조율사의 3대 제자인 김서원 조율사는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예고에도 진학했다. 열심히 피아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힘에 부치자, 그의 아버지는 놀랍게도 피아노 조율사를 권유했다.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 위치한 피아노 조율 학원을 처음 가 봤어요. 그때까지 피아노만 치다가 조율이라는 낯선 분야를 만나게 된 거죠. 피아노를 분해해서 그 안에 구조들이 다 보이는데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같기도 하고, 그 속에서 소리가 변화하는 게 너무 흥미로웠어요. 그다음 날 바로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고 조율 학원을 등록했죠.”
조율 학원은 일반적으로 6개월 코스, 그랜드 피아노는 1년 코스로 구성된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서원 조율사는 2년 넘게 학원만 다녔다. 학생 신분으로 실제 조율사로 일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교복을 입고 경기대회에 참가한 김서원 조율사는 시험감독관으로 왔던 이정규 조율사를 만나게 된다.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남부터미널역에서 예술의전당으로 가는 차에 동승했는데, 옆에 큰 선생님(이종열 조율사)이 앉아 계신 거예요. 처음엔 웬 할아버지가 탔나 했죠.(웃음) 실제로 따라가서 보니 신세계였어요. 너무 높으신 선생님들이 계시니 좀 무섭기도 했고요. ‘이거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딱 붙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정규 조율사 역시 김서원 조율사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알았죠. 절대로 그만둘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요. 지금은 저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어요.”
가족보다 깊은 사제의 정
실제로 이정규 조율사와 김서원 조율사는 엄마와 딸 같은 친분을 자랑한다. 팔짱을 끼고 다니는 건 물론, 허리춤을 감는 등 감도 높은 스킨십도 서슴없다. 서먹한 스승과 제자 사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이정규 조율사도 이 점에 동의한다. “딸 같은 존재죠. 얘(김서원 조율사)는 어머니가 있지만, 전 딸이 없거든요. 제가 오히려 많이 의존하기도 해요. 가끔은 ‘우리 선생님이 나를 이렇게 생각하셨겠구나’를 느낄 때가 있어요.”
이종열 조율사와 이정규 조율사, 김서원 조율사는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물론 고민 상담도 예외는 아니다. 이종열 조율사는 아들과 딸에게는 상의하지 못한 것을 제자들에게 먼저 물어본다고 고백했다. 김서원 조율사도 마찬가지다.
“저도 부모님보다 선생님들과 의논하는 게 더 빠를 때가 있어요. 일하다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 전화를 드리면 ‘너가 알아서 해’라는 말씀을 두 분 모두 하신 적이 없어요. 한번은 답답하셨는지 제가 있는 곳까지 두 분이 오셔서 해결해 주신 적도 있어요.”
이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한 만큼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대견함 역시 남다르다. 이정규 조율사는 위대한 스승과 센스 있는 제자를 둔 입장으로서 참 좋다고 말한다. “우리 선생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걸 느낀 적이 있어요. 조율 과정에는 음을 맞추는 ‘조율’과 피아노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조정’, 음색을 맞추는 ‘정음’이 모두 포함돼요. 하지만 외국에서는 3가지를 따로 하고, 또 따로 돈을 받는다고 해요. 선배 중 한 분이 이 점을 지적하면서 선생님께도 각각 따로 돈을 받으라고 권유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그 선배에게 ‘나는 오랫동안 조율비만 받고 다 했으니 고객에게 돈을 더 받을 수 없지만 자네는 설명을 드리고 고객이 허락하면 그렇게 하게’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그게 너무 바보 같은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이 저에게는 조율비를 따로따로 받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조율은 계속 해 봐야 실력이 느는 건데 고객이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디서 해 볼 것이냐고 되물으셨죠. 선생님은 늘 돈을 벌려고 하지 말라 하셨어요. 정말 열심히 연마하면 돈은 저절로 들어온다고요.”
이종열 조율사의 신조는 ‘찾아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불려 다니는 사람이 되자’다. “내가 가진 상품이 기술인데, 이 상품이 좋으면 사 달라고 하지 않아도 입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찾기 마련입니다. 그럼 스스로에게 더 당당해지죠.”
이종열 조율사 역시 제자들이 대견스러울 때가 많다. 그가 꼽은 건 이정규 조율사가 세종문화회관 전족 조율을 맡았던 순간이다. 이종열 조율사는 예술의전당 이전에 세종문화회관 전속 조율사였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 때문에 억울하게 쫓겨나듯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예술의전당에 스카우트돼 전속 조율사로 일하고 몇 해가 지날 즈음, 세종문화회관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새로 온 조율사가 연주자들과 트러블이 많아서 다시 저와 일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새로운 관계자가 제가 이전에 세종문화회관 전속이었다는 걸 알고 전화를 한 거죠. 하지만 저는 이미 예술의전당을 맡고 있었고, 연주자가 조율사를 찾는 시간은 대부분 퇴근 시간이라 2곳을 왔다 갔다 할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이정규 조율사를 설득해 소개시켜 줬죠. 그렇게 연주장은 맡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친구가 지금까지도 잘하고 있으니, 아주 대견스러워요.”
올해로 조율에 입문한 지 13년이 되는 김서원 조율사는 금호아트홀 전속 조율사다.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두 선생님들의 눈에서는 대견함이 묻어 나온다. 특히 이정규 조율사는 처음 가르칠 때, 설명도 해 주지 않은 것을 알아서 척척 해 내는 경우도 많았다며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서원 조율사도 일하다가 스승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하는 일을 가치로 매겨서 돈으로 환산 받으려고 하잖아요. 두 분은 오직 피아노 하나만 생각하는 장인정신으로만 오랜 시간을 일해 오셨어요. 최고의 기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청각 조율의 미학
안타깝게도 아날로그적인 방식들이 사양산업으로 접어드는 시대다. 조율 역시 사람의 청각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계들이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이종열 조율사는 사람이 귀로 들으며 하는 조율이 아름답다고 강조한다.
“오직 사람의 귀만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돈시킬 수 있죠. 앞으로 청각 조율은 줄어들 거예요. 요즘 같은 때에 기계를 보고 하면 되는데, 귀에만 의존하는 건 힘들거든. 하지만 공연장에서 피아노 소리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한, 청각 조율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물론 실력이 상위권에 있으면 경기가 불황이고, 조율이 사양산업이 된다 하더라도 살아남는 거죠. 그래서 지금까지도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어요.”
김서원 조율사도 이에 크게 동의한다. “희소가치라는 것이 있잖아요. 지금 스마트폰도 있고, 전자시계도 있지만, 스위스에서 장인들이 만든 기계식 시계를 찾는 이들은 여전히 있어요. 또 그게 명품화가 되고요. 피아노도 디지털이 우세하지만 클래식 시장은 딱 자리 잡고 있어요. 그 규모는 작아질지언정 절대 없어지진 않을 거예요.”
이는 이종열 조율사가 후학을 열심히 양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혼자만 반짝이다 가면 안 돼잖아요. 제가 가진 모든 걸 다 꺼내서 보여 주려고 합니다. 물론 제자들이 얼마나 잘 따라가고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진보가 있겠지만요. 마지막 단계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겁니다. 스스로 마음에 들 때까지 붙잡고 늘어지면 언젠가 자기 것이 되겠죠.”
이종열 조율사는 항상 안달이 난 상태라고 언급했다. 사회에 나가서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공장에서 새 피아노를 조율하는 것이었다. 삼익피아노로 직장을 옮겨 자신의 이름을 달고 조율을 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조금 더 전문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한옥이냐 양옥이냐에 따라 피아노의 상태가 달랐고 집집마다 피아노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동안 알고 있던 기본적인 지식으로는 부족해 더 공부했다. 한국에서 최고의 조율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세종문화회관에 스카우트된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쟁쟁한 피아니스트들을 만나게 됐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스스로도 세계적인 기술을 터득해야겠다 싶어 항상 박차를 가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조율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줘야 합니다. 조율은 매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일반 가정집에서는 1년에 한 번 조율을 해도 잘 관리하는 편에 속합니다. 그런 분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을 부리면 안 되죠.”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스승의 날을 위한 특별한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정규 조율사는 자신의 스승이 일절 대접을 받 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석 달에 한 번, 넉 달에 한 번 일을 하니 수입이 얼마나 있겠어요. 조율은 부업이었고, 뜨개질을 주업으로 삼아 생계를 이어나갔죠. 그러다 선생님을 만났고요. 레슨을 받으려면 돈을 내야 하는데 선생님께선 돈도 받지 않으시고, 그렇다고 제자들이 식사를 대접하려고 하면 선생님께선 밥걱정하지 말고 배우러 오라고 하셨어요. 저희들 모두 돈 못 버는 거 다 안다고요.”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20년을 했어요. 밥 얻어먹는 거를. 선생님께선 명절도 챙기지 말라 하셔서 설날이나 추석 때 인사드린 적도 없어요. 대신 선생님의 생신이나 스승의 날은 꼭 챙겨요. 거창하게 하는 건 아니고, 모여서 같이 식사하는 정도예요. 올해도 그렇게 스승의 날을 보내겠죠.”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0호(2020년 0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