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장식, 집 안 꾸미기의 시작

[한경 머니=백정림 갤러리 이고 대표·<앤티크의 발견> 저자 | 사진 서범세 기자] 따사로운 봄 햇살과 함께 피어나기 시작한 진달래, 개나리가 연초록과 어울려 봄 풍경이 화사하기 그지없다. 화사한 봄 날씨와 대조적으로 겨우내 손보지 않은 집 안 구석구석은 오히려 우중충하게 보인다. 집 안 분위기에 조금은 산뜻한 변화를 줄 필요가 있는 시기다.


(사진_티포트부터 시계 방향으로) 흑단 손잡이의 스털링 티포트(아르데코), 스털링 2단 티어드 디시(빅토리안) 화기로 쓰인 스털링 오버레이 티포트(아르누보), 스털링 캡의 크리스털
카메오 티캐디(빅토리안), 크랜베리 크리스털 저그(아르누보), 스털링 티 스트레이너(아르누보), 디너접시와 하이 손잡이 티 잔(빅토리안).

집 안을 꾸미는 일은 사실 중산층이 생겨나기 시작한 19세기 전까지 오랫동안 상류층만의 일이었다. 유럽 상류층의 집 안 꾸미기는 수백 년 동안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기에 우리가 유럽을 여행하면서 관람하는 대저택은 거의 비슷한 형식으로 꾸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을 맞춰 잘 가꾸어진 정원을 지나면 집 안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계단이 위용을 자랑하고, 벽을 장식하는 타피스트리, 크고 작은 그림들, 공 들여 만든 창들을 있다. 비교적 층고가 높았던 서양의 주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벽으로, 그들에게 있어 벽 장식은 집 안 꾸미기의 가장 핵심적인 일이었다.

특히 그들이 전통적으로 벽 장식에 즐겨 사용했던 타피스트리는 벽을 장식하는 효과와 함께 난방까지도 겸해 오랫동안 유럽의 상류층에게 친숙한 일상의 용품이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많은 타피스트리 작품들은 유럽의 상류층이 얼마나 많이 벽 장식으로 타피스트리를 애용했는지 보여 준다.

(사진) 타일 벽장식(아르누보).
타피스트리, 벽 장식의 역사

이러한 유럽 상류층의 벽 장식이 크게 바뀌기 시작하는 시점은 중산층이 급증했던 19세기였다. 손님 초대와 접대가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졌던 이 시기에 만남의 장소는 다름 아닌 집이었다. 왕족, 귀족, 평민, 하층민의 계급 간 이동이 힘들었던 이전 시대에 비해 빅토리안 시대에는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일구고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한 시기였다.

주로 상업, 무역업, 제조업, 법조인, 회계사, 의사 등의 직업을 가졌던 영국의 중산층은 산업혁명 전까지는 보잘 것 없었으나, 19세기에 영국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눈에 띄게 성장했다. 부를 단순히 세습하는 귀족들과 달리 스스로 부를 일구는 건전한 경제인구가 늘어나면서 사회와 문화 또한 이들 위주로 발전과 번영을 거듭했다.

그들은 개인의 독립과 사회적 상승 욕구에 대한 의지가 매우 컸고, 가정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생각했다. 소망하던 집을 마련하고 만국박람회에서 아름다운 공예품을 접하면서 점차 집 꾸미기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늘리는 재미와 함께 이들이 추구했던 것은 바로 ‘귀족 따라 하기’였다. 귀족들이 누렸던 가구와 식기로 집 안을 장식했고 정원 가꾸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벽 장식 또한 이들의 중요한 관심사였기에 많은 그림들로 집 안의 벽을 장식했다.

(사진) 비단 보자기 액자(조선시대).

이러한 새로운 문화 주체들의 열망에 맞추기라도 하듯이, 19세기 중엽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을 주창한 윌리엄 모리스가 건축을 넘어선 새로운 인테리어를 제안한다. 지금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모리스는 풍경 위주였던 칙칙한 타피스리를 중세 신화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밝은 톤의 타피스트리로 바꾸었다.

모리스는 공예가 건축공간에서 장식적 기능을 가지며 예술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까닭에 주택은 그에게 있어 종합예술이었다. 그는 실내장식과 모든 생활용품을 조화된 디자인으로 일치시키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주택을 빈 공간과 채워진 공간 2개가 어우러진 인간 친화적인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사진) 수베개 액자(조선시대).

그는 특히 벽 장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의 신혼집이었던 레드하우스의 벽은 아름다운 창틀이 돋보이고 파스텔 톤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중세풍의 고혹적인 타피스트리로 장식돼 있다. 그는 자연 속 식물과 꽃, 그리고 새를 모티브로 한 많은 아름다운 패턴으로 벽지와 패브릭을 만들어 벽을 장식했다. 요즘 유럽풍 수입벽지라고 불리며 비싼 값에 우리의 집 안을 장식하는 고급스러운 패턴의 벽지들은 모리스의 아름다운 텍스타일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사진) 다양한 용도의 스털링 소품(빅토리안~아르데코).

벽면 가꾸기로 찾는 일상의 소중함

유례없이 얄미운 유행병이 일상을 뒤흔들어 우리 모두 저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시간은 어여쁜 봄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양지바른 곳에서는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피어나 지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이제껏 겪어 보지 못했던 요즘의 일상은 나와 가족을 흔들림 없이 지켜 주는 곳은 다름 아닌 안락한 집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 준 듯하다. 집 안에서의 공간은 사용할 사람을 위해 잘 정돈되고 배려됐을 때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집 안을 가족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제껏 우리는 집 안의 공간을 꾸미는 일을 이사할 때나 하는 거창한 일로 생각해 왔다. 인테리어라는 이름을 붙여서 해 왔던 집 안 꾸미기는 나와 가족의 취향이 반영되기보다는 트렌드를 좇아서 일률적으로 행해진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꿔 보면 집 안 꾸미기야말로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생활의 발견이자 가족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표현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던함이 흑백의 단순함으로 귀결되고 있는 요즘 모든 집의 벽 장식은 회백색 위주의 단색으로 칠해지고 획일적인 단순함으로 이어지는 추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파트라는 공간에 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심플함이 실용적인 모던함이고, 그것이 집 안 꾸미기의 기본이 돼야 하는 것은 수긍이 가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집 안에 들어서면 늘 대하는 것이 벽면이기에 가족사진이나 평범한 풍경사진만으로 특색 없이 꾸며 놓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모리스가 강조했던 벽 장식은 집 안 꾸미기에서 가장 어렵고 정성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취향이 담긴 소품이나 추억이 깃든 사진, 그리고 천재 디자이너 모리스가 남긴 아름다운 패턴의 벽지로 벽 하나쯤은 개성 있게 꾸밀 여유와 안목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번 봄에는 스토리가 있는 벽면과 얘기 나눌 수 있는 온화한 집 안 공간을 기대해 본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의 백정림 대표는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 문화의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 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그램 yigo_gallery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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