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바꾼 트로트 열풍…“내 나이가 어때서”

[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사추기(思秋期)’라고도 불리는 중년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많은 이들이 조직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가정에서는 자리를 찾지 못하며, 인간관계가 예전만 못하다고 고백한다. 해법은 없을까. 위기의 중년을 구원할 그 무언가가 있다면.



“유방암 투병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스 트롯>에서 송가인 씨를 알게 된 후 노래를 즐겨 들으며 많이 완쾌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50·60·70세대 요즘 꼰대세대라고 밀려나 세상에 지쳐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외로움에 취해 비틀거릴 때 송가인 씨가 우리네 곁에 와 주셨네요.”

“수술 후 앓아 왔던 우울증과 불면증을 한 많은 노랫가락에 실어 모두 날려 버렸습니다.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네요. 나의 은인이여, 부디 건강하세요.”

가수 송가인의 공식 팬클럽 커뮤니티 ‘어게인’에는 이 같은 ‘간증(본래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을 뜻함)’ 글이 하루에도 몇 개씩 줄줄이 올라온다. 대개 송 씨를 좋아한 이후 달라진 자신을 마주했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말한다. “배우자도, 자식도, 의사도 아닌 가수 송가인 씨가 나의 구세주”라고.
덕후가 된 이후 달라진 일상

충남 천안에서 요식업을 운영하는 김 모(57, 남) 씨의 하루는 분주하다. 가게에 출근하자마자 음원사이트 멜론부터 들어가 송가인의 노래를 스트리밍(실시간 재생)한다. 팬클럽에서 알려 준 대로 순위에 반영되는 노래들만 쏙쏙 골라 재생을 하고, 팬클럽 카페 스트리밍 게시판에 이를 인증하는 게 오전의 주요 일과다.

“처음에는 뭐 이런 걸 하나 싶었는데 번개(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난 다른 팬들이 모두 하는 걸 보고 시작했어요. 음원사이트 가입부터 노래를 재생하는 것까지 다 난관이었는데 자식들보다 더 친절하게 알려 주니까 이제는 뭐 하루라도 안 하면 양치 안 한 것처럼 개운하지 않을 정도예요.”

스트리밍 인증 후에는 가수의 일정을 확인한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공연과 각종 행사가 취소되면서 김 씨의 일정도 자연스레 한가해졌다. “가인님 공연 따라가고, 행사 끝난 뒤에는 마음 맞는 팬들끼리 모여 정모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전부 취소예요. 너무 아쉬워요.” 그는 예정된 행사가 취소된 게 연신 아쉽다고 말했다. 오프라인 모임을 찾으며 관심사가 동일한 이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최근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고.

그는 퇴근 후 유튜브에서 지난해 공연 실황들을 돌려보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바쁘다.
김 씨의 일상이 달라진 것은 지난 5월 TV조선의 쇼 프로그램 <미스 트롯>이 종영된 이후다.

출연자이자 경연의 우승자인 송가인의 노래에 빠져든 이후 팬클럽 ‘어게인’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그저 가수의 정보를 제공받기 위해 가입했던 커뮤니티였는데, 지금은 하루에도 수십 번 이 공간을 찾는다.

“가수만 좋아진 게 아니에요. 올라오는 글들마다 다 제 이야기 같고, 올리는 글에도 댓글이 달리니까 마음 맞는 친구를 사귀는 것 같아요. 어게인이 제 인생의 낙이 됐어요.”

이 같은 변화가 어디 김 씨뿐일까. 어게인의 카페 회원 수는 5만5526명. 2019년 3월 18일 개설된 이 카페는 1년도 채 안 돼 네이버 대표 카페로 성장했을 만큼 성장세가 가파르다. 팬클럽 회원들의 연령대는 50대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음원사이트 멜론에서 만든 팬들의 소통 채널인 아지톡에 따르면 아지톡의 채널 랭킹 1위는 송가인이다. 이 중 50대가 31%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40대(26%), 30대(15%), 20대(13%), 기타(10%), 10대(5%) 순이다.



중장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다 보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송가인의 선한 영향력’이란 유행어도 생겼다. 송가인이 팬클럽 회원들에게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를 강조해 어르신들의 코로나19 감염 위험을 줄이는 데 앞장서는 정도는 이제 예삿일이다.

“경상도 분들도 사랑을 해 주고 있구나. 제가 고향이 전라도라서 행사 오기가 무섭기도 했다(중략)…정말 감동 받았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는 중장년층에게 뿌리 깊게 녹아 있는 전라도와 경상도 간 해묵은 지역 갈등 인식 변화에도 큰 영향을 줬다.

더 큰 변화는 정신적 변화다. 김 씨의 인터뷰를 옆에서 지켜보던 딸은 아버지의 변화가 그저 놀랍다고 말했다. “자식들과도 대화가 별로 없었어요. 퇴근 후에는 늘 스포츠 TV 프로그램만 보다가 잠드셨는데 송가인 등장 이후 말수도 많아지고, 무엇보다 저렇게 행복해 하는 표정을 처음 봐요.”

흔히 55~65세 시기를 ‘마(魔)의 10년’이라고 부른다. 55세를 전후해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노화가 본격화하면서 건강관리가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인생 100세 시대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시기이건만, 중년의 정신건강 관련 주요 지표들은 적색 경고등을 켠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2018년 1~9월까지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은 연령대는 60대(13만3712명), 50대(12만9255명), 70대(12만1193명) 순이었다. 우울증이 깊어지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생겼다.

보건복지부의 2019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지난 2017년 자살자 수는 50대가 2568명으로 가장 많았다. 윗세대를 책임지고 아랫 세대에 도전받는 ‘낀 세대’의 부담이 적용된 탓이다. 백서는 연령대별 주요 자살 동기로 31~50세는 경제적 문제, 51~60세 정신적 문제라고 밝혔다. 부모와 자녀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제적 부담과 불안한 앞날에 대한 정신적 문제가 공존한 것이다.

중년을 구원하는 위로와 치유의 덕질

그도 그럴 것이 마흔 무렵부터 자식들과 배우자는 멀어지고, 연로하신 부모님은 아프시거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한다. 직장에서의 책임감은 커지고,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행동과 감정은 절제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소위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하는 중년의 외로움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쇠락과 상실로 위로와 치유가 절실한 ‘사추기’가 되면 힐링과 위로의 수단들을 찾는다.

그 수단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무언가에 빠진 이른바 덕후(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중년의 외로움을 해결하는 적절한 수단이 바로 ‘덕후 문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추기의 가장 큰 문제인 고독함, 허망함, 끊긴 인간관계 등을 단번에 해결하는 게 바로 덕후 문화라는 것이다.

송가인 팬클럽 ‘어게인’의 송윤호 서인경 지역 대표는 “가수님 덕분에 우울증을 이겨낸 이야기, 암 투병에 유일한 힘이 된다는 이야기 등 곡절 많은 사연들이 가득하다”며 “가수님을 알게 된 이후 힘들고 괴로운 지금을 견디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중년 덕후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모범답안은 아닐지라도, 중년의 무거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위안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극본을 쓴 작가 임선경은 신간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에서 중년을 “사춘기처럼 예민하게 느끼고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왕성하게 배우고 무한히 감동하고 그러면서 훌쩍 자랄 수도 있는 시기”라고 정의한다. 비록 생리가 멈추고, 신체 기능이 떨어지고, 건망증은 중증에 치닫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시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내일을 기대하고 분주히 꿈꾸는 시기,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중년이여.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 진정한 당신이 되라는 내면의 신호다”라는 카를 융의 조언처럼 지금은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열어 볼 때다. 나는 지금 무엇을 좋아하는가.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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