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글·사진 양보라 여행전문기자] 봄이 겨울을 뚫고 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봄 분위기가 예전만 못하다.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만들었던 위대한 보물, 팔만대장경을 모신 해인사를 다시 주목한다. 대한민국이 이 위기를 타개하고, 찬란한 봄을 만끽할 날을 고대한다.
전 세계가 전파성이 높은 전염병과 사투 중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마저 바꿔놓았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개인적인 모임까지도 자제하자는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이 한창인 요즘은 마음까지 을씨년스럽다. 이런 시국에 한경 머니 독자들에게 어떤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 고심이 컸다. 아직 코로나19가 급습하지 못한 청정한 국가를 물색해 볼까. 아니면 한국인의 입출국이 아직 자유로운 나라를 골라야 하나 하는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여행을 떠나라고 부추기는 것이 숙명인 여행기자의 처지가 곤욕이었다.고된 역경을 견뎌 온 찬란한 보물
그래서 골랐다. 숙고 끝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 중 한 곳인 경남 합천 해인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창건한 고찰은 면적 18.66㎢에 이르는데, 절 곳곳에 국보와 보물 70점이 산재해 있다. 그중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것이 다름 아닌 팔만대장경(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32호)이다.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불심 하나로 역경 끝에 제작한 찬란한 보물이, 현재 신음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그리고 이 땅의 국민들을 위로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으리라고 본다. 긴 겨울의 터널을 뚫고 봄이 왔듯 어려운 상황이 조속히 종료되고 우리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길 바란다.
팔만대장경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층 설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팔만대장경 관람은 지금보다 제한적이었다. 대장경이 보관된 건물 장경판전(국보 52호)의 창살 틈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전부였다. 2013년부터는 이마저도 제한을 뒀다. 낙산사(2005년), 숭례문(2008년), 화엄사(2012년) 등에 연이어 방화사건이 터지자 해인사 측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장경판전의 중정(中庭) 입구를 통제한다”고 공지했다. 여행객은 하릴없이 장경판전 바깥쪽 창을 통해서만 팔만대장경을 엿봐야 했다.
굳게 닫혔던 장경판전 중정으로 통하는 문이 다시 활짝 열린 것은 2017년 1월 1일에 이르러서였다. 문화재를 국민과 향유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해인사와 문화재청이 함께 결정을 내렸다. 창살 사이로 팔만대장경을 본다는 데는 변함이 없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행객이 해인사로 향해야 하는 이유가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가야산 중턱께 다다르자 해인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절에서 만난 주지 향적 스님은 외부인을 반갑게 맞아줬지만 “경판 한 장 한 장이 부처님과 같은 팔만대장경을 대하는 데 경외심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고려 고종 23년(1236년)부터 16년에 걸쳐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모두 8만1350장입니다. 800년에 가까운 세월을 견딘 셈이지요. 팔만대장경은 단 한 장도 손실·분실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현재 보험을 받아 주는 보험회사가 없어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상태다. 가치를 산정할 수 없다는 게 이유란다. 대신 해인사 내 많은 조직이 팔만대장경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팔만대장경을 보존·보호하는 ‘보존국’, 팔만대장경 연구와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하는 ‘대장경연구원’이 있다. 해인사는 또 팔만대장경을 지키는 장주(藏主)라는 직책도 둔다. 올해로 27년째 장주 소임을 맡고 있는 원산 스님은 장경판전 주변을 순찰하는 감상(鑑狀)을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다. “해인사에 7차례 대화재가 났는데도 팔만대장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는 부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다”는 원산 스님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였다.
팔만대장경을 지켜 온 장경판전
주지 향적 스님, 보존국 일엄 스님, 장주 원산 스님, 그리고 대장경연구원 한홍익 연구원과 함께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으로 향했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비탈면에 들어선 해인사에서도 맨 꼭대기 해발 700m께 지어졌다. 대웅전 뒤편에서 장경판전까지 다다르는 계단이 가팔라 허리를 수그린 채 올라야 했다.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을 하심(下心: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해야만 만날 수 있는 보물이라고 소개한 일엄 스님의 말이 꼭 들어맞았다.
“장경판전은 건너뛰고 팔만대장경만 유심히 본다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지요. 팔만대장경을 보존할 목적으로 건립된 장경판전은 당대 모든 지식과 기술이 결집된 건물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05년)으로 등재되기 앞서 1995년 장경판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장경판전은 수다라장, 법보전, 동·서사간전 4동의 건물이 ‘미음(ㅁ)’자 형으로 둘린 모양새였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장경판전 중정을 개방하기 전에는 수다라장 외벽만 볼 수 있었지만, 중정 문을 열면서 수다라장 안쪽과 법보전을 두루 둘러볼 수 있게 됐다. 외부의 출입을 엄격히 막았던 법보전 중앙의 불당도 개방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장경판전은 보고도 그냥 지나칠 정도로 허름하고 장식이 없는 목조 건축물이었다. 한홍익 연구원은 “장경판전의 단순함 속에 800년간 팔만대장경이 유지돼 온 비밀이 있다”고 말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큼지막한 창문이 뻥뻥 뚫려 있는데, 창살 사이로 볕이 들고 비도 들어온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은 나무로 만들어졌어도 어느 하나 뒤틀리거나 썩은 것이 없다. 장경판전의 공기 순환이 뛰어난 덕분이다.
재밌는 사실은 수다라장과 법보전 벽면 위쪽과 아래쪽, 그리고 앞면과 뒷면의 창 크기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었다. 큰 창은 폭 2.15m, 세로 1m 크기이고 작은 창은 폭 1.22m, 세로 0.44m인데, 통풍을 원활하게 만들 목적이라는 점만 파악했을 뿐 현대 과학으로도 정확한 원리를 알기 어렵다고 한다. 해인사 측은 장경판전이 팔만대장경에 앞서 초조대장경(1011년 제작, 1232년 소실)이 만들어질 당시 지어졌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천년의 시간을 버틴 장경판전 창살 사이로 빽빽이 꽂힌 팔만대장경이 들여다보였다. 층층이 쌓으면 높이 3250m로 백두산(2744m)보다 높으며, 한 줄로 이으면 150리(60㎞) 이어진다는 그 팔만대장경을 확인하는 일은 특별했다. 수령 40년 이상 된 나무를 골라 벌목하고, 바닷물로 쪄내 진을 제거하고, 1년여간 정성스레 말렸다가 각수(刻手)가 한 자 한 자 새길 때마다 절을 올렸다는 목판은 형형한 에너지를 내뿜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탄생한 위대한 문화재
해인사 측의 배려로 장경판전 내부로 들어가 팔만대장경을 가까이서 볼 기회를 얻었다. 지난 세월이 무색할 만큼 목판은 어제 만든 듯 광택이 났다. 고려인이 어떤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제작했는지 자못 궁금했다. 향적 스님은 이 위대한 문화재는 고려의 국운이 융성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절체절명의 순간에 탄생했다고 일렀다.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몽골족과 전쟁을 치르는 중에 제작됐습니다. 13세기 고려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고 추측됩니다. 전 국민이 똘똘 뭉쳐 대장경을 만들면서 위기를 극복한 것이죠. 세대·지역·계층 간 갈등과 반목이 많은 한국 사회에 대장경의 정신이 복원되길 기원합니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중정을 오전 8시 30분~오후 6시까지 개방한다. 해인사 입장료 어른 3000원, 어린이 700원. 해인사 주차비는 4000원이다. 해인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대장경테마파크도 둘러보자. 팔만대장경이 제작된 과정을 재현해 놨다. 입장료 어른 3000원, 어린이 1500원. 4월 벚꽃 시즌에는 해인사부터 대장경테마파크까지 일부러 걸어봄 직하다. 걸어서는 편도 30분이 걸리는데, 왕복 2차선 도로 양옆이 벚나무로 이어져 있어 꽃터널이 조성된다. 흩날리는 벚꽃비를 맞으며 한적한 산길을 내려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양보라 여행전문기자는…
단연코 여행의 재미는 소비에 있으며 온갖 살 것이 넘치는 메트로폴리탄이야말로 궁극의 여행지라고 믿어 왔다. 인생의 분기점을 넘은 것인지, 자연으로 파고드는 여정이 즐거워졌다. 이제 막 걷기 여행의 매력에 눈을 뜬 초보 트레커다. 걸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국내외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를 소개할 예정이다. 중앙일보와 월간지 트래비 여행 기자로 글을 써 왔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
전 세계가 전파성이 높은 전염병과 사투 중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마저 바꿔놓았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개인적인 모임까지도 자제하자는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이 한창인 요즘은 마음까지 을씨년스럽다. 이런 시국에 한경 머니 독자들에게 어떤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 고심이 컸다. 아직 코로나19가 급습하지 못한 청정한 국가를 물색해 볼까. 아니면 한국인의 입출국이 아직 자유로운 나라를 골라야 하나 하는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여행을 떠나라고 부추기는 것이 숙명인 여행기자의 처지가 곤욕이었다.고된 역경을 견뎌 온 찬란한 보물
그래서 골랐다. 숙고 끝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 중 한 곳인 경남 합천 해인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창건한 고찰은 면적 18.66㎢에 이르는데, 절 곳곳에 국보와 보물 70점이 산재해 있다. 그중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것이 다름 아닌 팔만대장경(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32호)이다.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불심 하나로 역경 끝에 제작한 찬란한 보물이, 현재 신음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그리고 이 땅의 국민들을 위로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으리라고 본다. 긴 겨울의 터널을 뚫고 봄이 왔듯 어려운 상황이 조속히 종료되고 우리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길 바란다.
팔만대장경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층 설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팔만대장경 관람은 지금보다 제한적이었다. 대장경이 보관된 건물 장경판전(국보 52호)의 창살 틈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전부였다. 2013년부터는 이마저도 제한을 뒀다. 낙산사(2005년), 숭례문(2008년), 화엄사(2012년) 등에 연이어 방화사건이 터지자 해인사 측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장경판전의 중정(中庭) 입구를 통제한다”고 공지했다. 여행객은 하릴없이 장경판전 바깥쪽 창을 통해서만 팔만대장경을 엿봐야 했다.
굳게 닫혔던 장경판전 중정으로 통하는 문이 다시 활짝 열린 것은 2017년 1월 1일에 이르러서였다. 문화재를 국민과 향유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해인사와 문화재청이 함께 결정을 내렸다. 창살 사이로 팔만대장경을 본다는 데는 변함이 없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행객이 해인사로 향해야 하는 이유가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가야산 중턱께 다다르자 해인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절에서 만난 주지 향적 스님은 외부인을 반갑게 맞아줬지만 “경판 한 장 한 장이 부처님과 같은 팔만대장경을 대하는 데 경외심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고려 고종 23년(1236년)부터 16년에 걸쳐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모두 8만1350장입니다. 800년에 가까운 세월을 견딘 셈이지요. 팔만대장경은 단 한 장도 손실·분실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현재 보험을 받아 주는 보험회사가 없어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상태다. 가치를 산정할 수 없다는 게 이유란다. 대신 해인사 내 많은 조직이 팔만대장경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팔만대장경을 보존·보호하는 ‘보존국’, 팔만대장경 연구와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하는 ‘대장경연구원’이 있다. 해인사는 또 팔만대장경을 지키는 장주(藏主)라는 직책도 둔다. 올해로 27년째 장주 소임을 맡고 있는 원산 스님은 장경판전 주변을 순찰하는 감상(鑑狀)을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다. “해인사에 7차례 대화재가 났는데도 팔만대장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는 부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다”는 원산 스님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였다.
팔만대장경을 지켜 온 장경판전
주지 향적 스님, 보존국 일엄 스님, 장주 원산 스님, 그리고 대장경연구원 한홍익 연구원과 함께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으로 향했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비탈면에 들어선 해인사에서도 맨 꼭대기 해발 700m께 지어졌다. 대웅전 뒤편에서 장경판전까지 다다르는 계단이 가팔라 허리를 수그린 채 올라야 했다.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을 하심(下心: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해야만 만날 수 있는 보물이라고 소개한 일엄 스님의 말이 꼭 들어맞았다.
“장경판전은 건너뛰고 팔만대장경만 유심히 본다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지요. 팔만대장경을 보존할 목적으로 건립된 장경판전은 당대 모든 지식과 기술이 결집된 건물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05년)으로 등재되기 앞서 1995년 장경판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장경판전은 수다라장, 법보전, 동·서사간전 4동의 건물이 ‘미음(ㅁ)’자 형으로 둘린 모양새였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장경판전 중정을 개방하기 전에는 수다라장 외벽만 볼 수 있었지만, 중정 문을 열면서 수다라장 안쪽과 법보전을 두루 둘러볼 수 있게 됐다. 외부의 출입을 엄격히 막았던 법보전 중앙의 불당도 개방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장경판전은 보고도 그냥 지나칠 정도로 허름하고 장식이 없는 목조 건축물이었다. 한홍익 연구원은 “장경판전의 단순함 속에 800년간 팔만대장경이 유지돼 온 비밀이 있다”고 말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큼지막한 창문이 뻥뻥 뚫려 있는데, 창살 사이로 볕이 들고 비도 들어온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은 나무로 만들어졌어도 어느 하나 뒤틀리거나 썩은 것이 없다. 장경판전의 공기 순환이 뛰어난 덕분이다.
재밌는 사실은 수다라장과 법보전 벽면 위쪽과 아래쪽, 그리고 앞면과 뒷면의 창 크기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었다. 큰 창은 폭 2.15m, 세로 1m 크기이고 작은 창은 폭 1.22m, 세로 0.44m인데, 통풍을 원활하게 만들 목적이라는 점만 파악했을 뿐 현대 과학으로도 정확한 원리를 알기 어렵다고 한다. 해인사 측은 장경판전이 팔만대장경에 앞서 초조대장경(1011년 제작, 1232년 소실)이 만들어질 당시 지어졌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천년의 시간을 버틴 장경판전 창살 사이로 빽빽이 꽂힌 팔만대장경이 들여다보였다. 층층이 쌓으면 높이 3250m로 백두산(2744m)보다 높으며, 한 줄로 이으면 150리(60㎞) 이어진다는 그 팔만대장경을 확인하는 일은 특별했다. 수령 40년 이상 된 나무를 골라 벌목하고, 바닷물로 쪄내 진을 제거하고, 1년여간 정성스레 말렸다가 각수(刻手)가 한 자 한 자 새길 때마다 절을 올렸다는 목판은 형형한 에너지를 내뿜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탄생한 위대한 문화재
해인사 측의 배려로 장경판전 내부로 들어가 팔만대장경을 가까이서 볼 기회를 얻었다. 지난 세월이 무색할 만큼 목판은 어제 만든 듯 광택이 났다. 고려인이 어떤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제작했는지 자못 궁금했다. 향적 스님은 이 위대한 문화재는 고려의 국운이 융성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절체절명의 순간에 탄생했다고 일렀다.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몽골족과 전쟁을 치르는 중에 제작됐습니다. 13세기 고려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고 추측됩니다. 전 국민이 똘똘 뭉쳐 대장경을 만들면서 위기를 극복한 것이죠. 세대·지역·계층 간 갈등과 반목이 많은 한국 사회에 대장경의 정신이 복원되길 기원합니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중정을 오전 8시 30분~오후 6시까지 개방한다. 해인사 입장료 어른 3000원, 어린이 700원. 해인사 주차비는 4000원이다. 해인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대장경테마파크도 둘러보자. 팔만대장경이 제작된 과정을 재현해 놨다. 입장료 어른 3000원, 어린이 1500원. 4월 벚꽃 시즌에는 해인사부터 대장경테마파크까지 일부러 걸어봄 직하다. 걸어서는 편도 30분이 걸리는데, 왕복 2차선 도로 양옆이 벚나무로 이어져 있어 꽃터널이 조성된다. 흩날리는 벚꽃비를 맞으며 한적한 산길을 내려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양보라 여행전문기자는…
단연코 여행의 재미는 소비에 있으며 온갖 살 것이 넘치는 메트로폴리탄이야말로 궁극의 여행지라고 믿어 왔다. 인생의 분기점을 넘은 것인지, 자연으로 파고드는 여정이 즐거워졌다. 이제 막 걷기 여행의 매력에 눈을 뜬 초보 트레커다. 걸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국내외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를 소개할 예정이다. 중앙일보와 월간지 트래비 여행 기자로 글을 써 왔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