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보카치오
[한경 머니 = 박숙자 서강대 전인교육원 조교수] 1350년경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은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혐오와 공포가 난무하는 가운데 등장인물들은 가족, 이웃과 동료의 건강을 묻고, 생명의 소리를 들어가며 일상의 건강한 리듬을 지키고자 한다. <데카메론>은 이 힘이야말로 ‘재난’을 넘어갈 수 있는 방책 가운데 하나임을 강조한다.지난 3월, 이른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첫 주의 질서가 정지된 새로운 질서를 살아갔다. 각 급 학교의 개학 일정이 미뤄졌고,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새로운 조어가 등장했으며, ‘마스크 대란’이라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대학 강의를 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개강이 연기된 것은 처음이었다. 2월 초에 이런 결정을 들었을 때에는 조금 낯설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신속하게 이루어진 필요한 결정이었다.
‘재난’은 기존 질서를 대체하며 새로운 선택을 순간순간 요구하기 때문에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짐작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지금 그 혼란과 위기 속에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서로서로의 일상을 챙기며 예년과 같은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재난을 경험하는 인류의 지혜는 수많은 문헌들로 남았다. 전염병은 인류 역사 속에서 흥망성쇠와 공동체의 부침을 극명하게 좌우하는 사건인 동시에 사회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였다.
‘전염’은 개인의 신체에 ‘세균’과 ‘바이러스’가 침투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한 사회의 면역과 건강 정도를 진단할 수 있는 지침이 되기도 한다. 전염병을 지혜롭게 극복한 여러 고전이 있지만, 가장 오래된 고전인 <데카메론>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1350년경에 쓰인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의 소설이다. 배경은 14세기 유럽 인구의 30%가 목숨을 잃은 흑사병이 창궐한 시대다. 흑사병은 피부가 검게 변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치사율이 높아 사람들의 공포가 극에 달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끔찍한 재앙에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탓’을 돌렸고 그만큼 마음의 질서가 붕괴됐다. <데카메론>은 바로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데카메론의 어원은 ‘10일’간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흑사병이 창궐한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모인 여자 7명이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기로 하는 이야기다. 이때 젊은 남자 3명도 같이 참여한다. 이들은 한적한 교외에 내려가 10일을 같이 보내는데,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이야기하기’다. 10명의 인물이 하루에 한 가지씩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날의 주제는 일종의 사회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 정한다. 즉, 이야기의 주제가 미리 정해지고, 이 주제에 맞게 이야기를 각자 한 개씩 하면 된다. 주제 제한 없이 자신이 원하는 주제로 이야기해도 되는 날도 있다.
<데카메론>이 쓰인 시대와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책을 읽게 되면 이야기꾼의 의도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일단, ‘이야기하기’의 힘을 분명하게 체감하게 된다. 피렌체의 중심가에는 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렬한 혐오와 공포가 가득한 채로 기존 질서가 붕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없는 약자와 외부인의 배척은 악랄할 정도로 거칠었고, 흑사병에 걸린 자들은 ‘악마’와 다를 바 없이 취급당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세상을 뜬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기는커녕 시신의 부패가 혹시 해를 주지 않을까 두려워 냉정한 태도를 취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런데 교외로 나가 10명의 인물들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가며 즐거워하고 칭찬하면서 지냈다는 것이다. 이들 역시 피렌체의 시민들처럼 걱정과 공포가 있었겠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며 지내는 동안 그 마음의 질서가 회복됐다. 한 사람이 하는 재밌고 유쾌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누군가는 “고맙다”고 덕담을 하는 식이다. 사회적 고립 속에서 흔히 빠질 수 있는 부정적 기운을 지워 내고 유쾌하게 마음의 질서를 회복한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에 사로잡힌 부인들이 이것을 읽으신다면, 그 속에 포함된 웃음거리의 즐거움뿐 아니라 유익한 충고 같은 것도 얻게 되실 것입니다”라는 서두의 말이 간곡하게 들리기도 한다. 물론 이 서두의 문장은 중의적인 뜻을 담고 있다.
<데카메론>은 흑사병으로 촉발된 공동체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질문의 초점을 바꾼다. ‘무엇이 공동체를 아프게 하는가’라고 말이다. 이들은 흑사병 자체도 문제적이지만, 이를 관리하고 통제하고 치유할 능력을 잃어버린 중세 사회를 지목한다. 사실 <데카메론>이 쓰인 14세기 중엽은 흑사병이 창궐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타락과 부패로 신음하던 시절이다.
<데카메론>의 이야기 속에서 유쾌·상쾌·통쾌하게 말해지는 것은 타락한 교회가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오랫동안 지배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10명의 인물들이 흑사병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지만, 교회와 사제에 대한 이야기는 단골 소재다. 후대에 알려진 성자가 알고 보면 사기꾼이었으며, 앞뒤가 다른 사제가 음흉한 계략을 꾸미는 등의 이야기다. 강력한 권력으로 중세 인간의 욕망의 중심에 자리 잡았던 교회의 이중성을 노골적으로 풍자한다.
또 비판 이면에 그간 억눌렸던 성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는 교회의 권위를 지워진 자리에 오롯이 드러난 인간의 욕망이다. 낡은 질서가 무너지자 새로운 질서인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남’, 재생이라는 뜻이다. 후대의 관점에서 보니 <데카메론>은 새로운 시대의 전주곡이었다.
우리는 현재 ‘재난’과 대면하며 오직 ‘생명’의 움직임에 귀 기울이며 살고 있다. 혐오와 공포가 난무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족과 이웃과 동료의 건강을 묻고, 생명의 소리를 들어가며 일상의 건강한 리듬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힘이야말로 ‘재난’을 넘어갈 수 있는 방책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울리히 벡은 ‘위험 사회’라는 말로 근대 위기를 진단한 바 있다. 현대 사회가 무한 성장의 기획 속에서 인간이 관리할 수 없는 ‘위험’을 동시에 생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위험은 문명의 전환을 지시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기후 위기와 전염병의 창궐은 아마 그 위험 신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문명의 전환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재난의 원인을 과학기술로만 치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시계는 ‘코로나19’를 가리키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봄은 생명이 기지개를 펴는 시간이다. 서로의 ‘봄’을 챙기는 생명 충만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재난’을 둘러싼 인문학적 사유가 더 긴요해질 것이다.
일러스트 전희성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