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AN]대한장인(大韓匠人) 4: 흑백 사진이 이끈 나폴리 슈트 장인의 꿈, 사르토 임동민

[한경 머니 = 이헌 작가·패션 칼럼니스트·스타일리스트|사진·정리 김창규] 남성 패션 칼럼니스트 이헌이 조명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의 장인들. 네 번째 주인공은 나폴리 사르토리아 챠르디의 작업 책임자 임동민이다.

레나토 챠르디를 본받고 싶은 마음에 콧수염을 똑같이 기른 사르토 임동민
훤칠한 키, 또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독특한 콧수염까지. 바늘과 가위를 들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긴 쉽지 않은 사람, 하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반가운 그를 이탈리아 나폴리 중앙역에서 만났던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흥겨운 음악과 따뜻한 햇살의 항구 도시 나폴리는 서구 세상에 관광과 휴양의 중심지로 오랜 세월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여행자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노후한 각종 교통수단의 바가지 영업은 애교 수준이고, 고급 시계나 가방을 지니면 팔목을 잘라 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 만큼 악명이 높다. 그런 곳에 키 190cm의 건장한 한국 남자가 활짝 웃으며 마중을 나와 주었으니 어찌나 든든하고 안심이 되던지.
수년간 여러 차례 방문했던 나폴리지만 그렇게 친근하고 마음 편한 적이 없었노라고 고백한다. 단 한 사람으로 어떤 곳의 인상이 송두리째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리라. 대한장인의 네 번째 주인공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수많은 편견을 바꾸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 몇 해 전 들려 온 부고에 남성복 관계자들에 눈시울을 적셨던 나폴리의 전설적인 사르토, 레나토 챠르디(Renato Ciardi)가 설립해 두 아들과 함께 운영해 온 사르토리아 챠르디(Sartoria Ciardi)의 작업 책임자 임동민이다.
작업장의 임동민과 빈첸초 챠르디
선택과 집중으로 일궈 낸 키다리의 생존기
나폴리는 전 세계 맞춤복·기성복 시장에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해 온 이탈리안 슈트 메이킹의 중심지이자, 오늘날 흔히 ‘이태리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이탈리안 테일러링의 발원지다. 지중해를 낀 항구도시로 아프리카나 중동으로부터 이주한 값싼 노동력이 풍부해 이탈리아의 생산 공장 같은 역할을 진작부터 해 온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람을 마주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이 낯선 곳에서 그는 어떤 사연으로 터전을 잡고 뿌리 내리고 있을까. 독특한 이력의 대한 남아가 남성복의 격전지 나폴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험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적어 본다.
1984년 또래에겐 조부모에 해당하는 나이 많은 부모에게서 막둥이로 태어난 임동민은 부업으로 재봉틀을 사용해 여러 가지를 만들던 어머님을 떠올리며 재봉과의 첫 인연을 추억했다. 유소년 축구선수로 방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합숙 훈련을 받으며 자란 그에겐 오직 축구만이 살 길이었다. 동일한 특기로 진학한 중학교 시절엔 고등학교 진학 준비를 하던 2학년,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1년간 휴학을 했다. 훈련으로 인해 미진했던 학업을 보충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운동에 몰두해 온 그에게 책상머리에서 보내는 시간은 고문에 가까웠다. 그래서 우연히 접한 춤의 매력에 사로잡혀 특유의 집중력으로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다고 한다.
14세 ‘국내 최연소’라는 이른 나이에 사회인으로 유명 가수들의 방송 프로그램 백댄서로서 일을 시작했다. 예정된 휴학 기간인 1년이 지나 다시 학교로 돌아갔으나 격렬한 움직임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그에게 학업이란 전혀 매력 없는 일이 됐다. 하지만 확신을 얻게 된 댄서로서의 삶도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너무 자란 큰 키 탓에 어떤 가수 뒤에도 설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챠르디의 더블브레스티드 슈트, 피크드 라펠이 아름답다.
임동민의 섬세한 손길
옷 사랑이 남달랐던 그는 송충이가 솔잎에 이끌리듯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을 드나들며 빈티지 옷을 구입할 용돈을 벌기 위해 의류 도매시장 점원으로서 일을 시작했다. 옷을 사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지만 큰 키 덕분에 업체 사장들의 피팅모델로 눈에 들면서 여기저기서 제공되는 샘플 옷이 생겨났다. 덕분에 옷을 사 입을 일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인터넷 쇼핑몰 사장들에게 이 훤칠한 키의 청년은 저비용의 좋은 모델이었으니, 모델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렇게 패션모델로 자연스럽게 직업을 바꾼 그는 댄서 시절 쌓아 둔 기획사와 방송국 인맥을 통해 메이저급 모델로 빠른 성장을 하게 됐다. 촬영이 이어지면서 더 잘 만든 옷을 접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옷을 향한 호기심은 점점 더 성장했다. 그러나 직접 만드는 옷을 향해 깊어지는 관심에 필적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은 풀 도리가 없었다. 당시 업계의 유명한 디자이너들에게 옷에 대한 관심을 표현해 봤으나, 직접 봉제나 재단을 하지 않는 디자이너들이 그의 호기심을 채워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들을 배출한 교육시설들이 주로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니 그의 관심사를 채워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권유받은 유학도 당시 상황에서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렇게 옷 만들기를 향한 관심의 깊은 공간을 채워 줄 방법을 고민하던 중 국제복장학원에 취미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과 바늘로 만들고 싶은 것을 다 만들어 볼 수 있는 그곳에서 그는 화려한 모델업계를 떠나 옷을 만들고 성취욕을 경험하는 새로운 세계로 접어든다.
나폴리의 전설적인 사르토 중 한 명이었던 레나토 챠르디의 초상 사진과 임동민의 실루엣
나폴리를 향한 꿈
시작은 양장점의 심부름꾼이자 미싱사로 잡다한 일을 배워 가면서 봉제의 기본적인 기초를 쌓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변환을 일으킨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우연히 접한 한 장의 사진이 훗날 현재의 그를 있게 한 집중의 원동력이 됐다. 이탈리아 스타일 혹은 나폴리 스타일이라는 장르 자체를 설계한 장본인이자 세계적인 브랜드 아톨리니의 설립자 겸 사르토 빈첸초 아톨리니의 흑백 사진을 우연히 본 것이다. 아톨리니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옷의 실루엣에 매료되면서 임동민은 본인이 걷고자 하는 길이 양장이 아닌 슈트 메이킹임을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이후 그는 다시금 특유의 집중력으로 확고해진 길을 향해 나폴리와의 거리를 하나씩 좁혀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 맞춤양복협회장이었던 김영태 선생을 만나 실력을 키울 기회를 얻었다. 선생의 소개로 그는 국내 유수의 양복점들을 거치며 실력자들의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앞선 우리 기술에 관심이 많은 중국의 대규모 기성복 공장 기술 고문직까지 거쳐 남성복 제조의 다양한 면을 두루 경험했다.
드디어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될 즈음 그는 런던과 나폴리라는 두 슈트 메이킹의 성지를 저울질하다 나폴리행을 결심했다. 아름다운 옷을 짓는 사람으로서 꿈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선택, 그리고 특유의 집중력을 발휘할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임동민의 손길을 기다리는 맞춤복들
그런데 이탈리아어라고는 “안녕”과 “배고파?”라는 말밖에는 모르는 대한민국 청년에게 나폴리의 저명한 사르토리아가 마음의 문을 열고 생산 관리를 책임지는 공방관리자의 역할을 부여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나폴리에 위치한 사르토리아 챠르디의 지하 공방에 가보면 임동민의 존재감을 확인하게 된다. 설립자 레나토 챠르디의 맏아들이자 모든 옷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재단사(cutter) 빈첸초 챠르디가 가장 안쪽에서 모든 메이킹을 진두지휘하고, 바로 그의 앞자리에 임동민의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하나의 작업대 사이로 위치한 임동민은 고개만 돌리면 바로 빈첸초와 마주한 상태로 작업을 할 수 있게 돼 있는데, 빈첸초는 수시로 그에게 의견을 묻고 대화를 나누면서 옷의 제작 방향성을 다듬는다. 50년 이상 봉제를 맡아 온 기술자는 물론, 비교적 젊은 나폴리 출신 남녀 기술자들에게도 일감을 나눠 주며 사르토리아의 생산 전반에 관여하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가슴 뭉클했다. 그가 전설적인 나폴리탄 테일러링의 주요 사르토리아인 챠르디의 진정한 일원이 됐음을 확인하는 것은 국내 남성복 문화의 비약적인 성장을 지켜봐 온 필자에게 남다른 감회를 선사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존재감은 해외에서 진행되는 모든 트렁크 쇼에 빈첸초와 동행하는 것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보통 해외 원정 트렁크 쇼에서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원만 출장에 동행하는 것이 상식. 임동민을 늘 주요한 임무를 맡아 행사를 리드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에서 갈고 닦은 꼼꼼한 기술적 측면에, 그가 가진 특유의 적응력을 높게 산 게 아니었을까. 임동민 특유의 친화력과 선택한 그 무엇이든 집중해서 일궈 내는 에너지를 챠르디의 앞날을 위해 십분 활용하고 싶었으리라. 나폴리 방문에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내내 챠르디의 두 형제 빈첸초와 로베르토는 임동민을 가족의 일원, 아니 정말 친형제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임동민이 나폴리에 잘 적응하고 있는 모습은 공방 밖에서도 잘 드러났다. 일을 마무리하고 숙소까지 함께 걷던 시간들, 식사를 위해 걷던 거리 곳곳에서 임동민의 친화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리의 거의 모든 상점에 일하는 이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이미 나폴리 현지 사회의 일원이 돼 있는 그 덕분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나폴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칼럼의 사진과 정리를 위해 수고하는 김창규 프리랜서 에디터 역시 악명 높은 나폴리에 큰 애정이 생겼다고 말할 정도로 임동민과 함께한 나폴리는 우리에게 친근한 곳이 됐다.
필자와 함께한 챠르디 형제와 임동민. 차르디 형제가 “너는 아직 우리만큼 위대하지 않으니 키가 작게 나오도록 다리를 굽혀라”라고 농담을 한 직후의 사진이다.
전문적인 재단과 재봉 기술을 꿈꾸는 미래
그는 앞으로의 목표를 묻는 필자에게 소박하지만 웅대한 답을 들려준다. 당분간 기술 향상에 힘을 쓰되 목표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시점이 오면 한국에서 수십 년간 일본어로 점철된 슈트 메이킹의 용어들을 이탈리아어와 한국어로 정리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일단 선택하면 반드시 이뤄 내는 그의 지난 행보를 보면서 그가 앞으로 이뤄 갈 기술적 완성은 물론 일본식 봉제 용어가 학문적으로 정리돼 초보자와 숙련공들이 불필요한 오류 없이 일을 하게 될 날을 꿈꿔 본다.
어떤 분야나 선구자적인 한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세상의 모든 편리와 위대한 발견은 그렇게 누군가 한 사람에 의해서 달라진다. 필자에게 나폴리가 임동민 한 사람 때문에 완전히 다른 곳으로 느껴졌듯이 말이다. 그를 필두로 이제 더 많은 아시안들이 나폴리 사르토리아들의 작업장 깊숙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 슈트 메이킹에 대한의 청년들이 미칠 영향, 그 영향의 위대한 시작에 의미 있는 느낌표를 찍어 줄 임동민의 활약을 기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만든 슈트를 고대하고 있다. 조만간 임동민의 섬세한 손길로 멋지게 완성된 필자의 슈트를 공개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아름다운 나폴리, 그리고 그곳에 둥지를 튼 대한장인 임동민이 만들어 갈 미래를 기대한다.
체촌 중인 필자와 빈첸초 차르디, 그리고 임동민
+ 작가이자 패션 칼럼니스트, 스타일리스트 이헌은 홍익대를 졸업하고 미국뉴욕주립대(SUNY),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패션 머천다이징(Fashion Merchandising Management)을 공부했다. 국내외 패션 브랜드의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으며, 네이버 블로그 ‘IL GUSTO DEL SIGNORE(일 구스또 델 씨뇨레)’에서 ‘한국신사’라는 필명으로 클래식한 남성 취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신문과 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더 패션 아이콘즈(THE FASHION ICONS)>의 감수자로 <맨즈웨어 도그>의 번역자로 참여했다. 저서로는 <신사용품>, <오빠와 아저씨는 한 끗 차이>가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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