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양보라 여행전문기자]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 북서부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이다. 보통 길을 걷는 순례자는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부로 진입하는 코스를 선택한다. 그리고 길을 걸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의 아름다운 소도시를 지나쳐 간다. 프랑스 미디피레네주 순례자의 도시에 머물며 산티아고 순례길 일부를 걷고 왔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수만 갈래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 그가 묻힌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 수도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에 이르는 모든 길이 순례길이다.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 산티아고이며 영어로는 세인트 제임스(Saint James), 프랑스어로는 생 자크(Saint Jacques)라고 한다.프랑스에서 만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야고보는 예수 사후 이스라엘에서 참수를 당했는데 신도들은 성자의 억울한 죽음을 맞고도 그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유해를 싣고 스페인으로 향하던 배가 난파된 것. 9세기 들어서야 발견된 그의 시체는 그간의 험난한 여정을 증명하듯 노란색 가리비가 다닥다닥 붙은 채였다. 기독교인은 뒤늦게 야고보의 묘지 위에 성당을 짓고 증축을 거듭해 산티아고를 조성했다.
그들이 성지를 세우는 것만으로 미안한 감정을 달랬다면 오늘날 순례길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다. 성직자와 신자들은 단지 그의 묘를 참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가리비를 머리에 달고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성 야고보처럼 길을 나섰다. 파울로 코엘료가 <순례자>를 집필하면서 전 세계적인 열풍을 낳은 산티아고 순례길은 제주올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현재 유럽에는 12갈래의 대표적인 순례길이 있는데 순례자 10명 중 8명은 일부러 프랑스 남부에서부터 일정을 시작해 피레네산맥을 넘는 험준한 길을 택한다.
모든 순례길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로 통칭되는데 프랑스 남부 도시 생장 피드 포르에서 출발해 스페인 북부를 횡단하는 루트가 가장 유서 깊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걸은 길은 프랑스 남부 도시 르 퓌(Le Puy)에서 출발해 프랑스 남부 미디피레네(Midi-Pyrenees)주의 유명 순례 도시를 관통하는 구간의 일부였다.
나를 포함해 미국, 라트비아, 중국, 크로아티아, 캐나다 등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을 이끌 가이드는 러시아계 프랑스인인 엘리나. 말 그대로 다국적 ‘순례단’인 우리는 미디피레네주 주도 툴루즈(Toulouse)에서 그녀를 보자마자 속사포같이 질문을 쏟아냈다. “예순이 넘은 내가 걸을 수 있는 길이냐”, “하루에 몇 시간을 걷는 것이냐”, “너무 힘들면 도중에 포기해도 되냐”라는 질문에 엘리나는 빙긋 웃으면서 답했다. “마음을 먹은 성직자들은 이 길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간답니다.” 차분한 한마디였지만 ‘엄살떨지 마시오’라는 엄포가 분명했다.
우선 툴루즈에서 첫 목적지 콩크(Conques)까지 3시간가량 차로 이동했다. 언덕 위 석회석을 이용해 튼튼히 쌓아 올린 건물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 앞에 일행을 태운 차가 멈췄다. 콩크는 프랑스어로 조개를 뜻하는데 마을 전체가 조개껍데기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겨우내 잠잠했던 콩크는 4월 부활절과 함께 모여드는 순례자들로 다시금 활기를 찾는다. 중세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산티아고를 찾아가는 길목 길목에는 순례자를 위한 마을이 조성됐고 콩크도 그 마을 중 하나다.
각 순례 도시는 종교적인 기능과 생활적인 기능을 모두 담당했다. 전망이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교회나 수도원이 들어서 있다. 매일 평균 8시간 동안 길을 걷는 순례자가 안락한 밤을 지새울 수 있도록 숙박업소가 등장했고 그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갖춰졌다. 90가구가 전부인 이 작은 마을에 한 해 3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기사들도 말 위에서 내려와 걸어야 했을 만큼 좁은 골목길, 손으로 일일이 쪼개 얹은 기왓장은 천년 동안 고단한 순례자를 반겨 왔다. 느린 걸음으로 1시간이면 돌아보는 마을이지만 세계 각국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에게 콩크는 없는 것 빼고 다 갖춘 마을일 거다. 작디작은 마을에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켜켜이 앉은 시간이 스쳐 갔다.척박한 땅에서 드리는 기도
순백의 도시가 언덕 끄트머리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한계령 뺨을 칠 정도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나니 로카마도르(Rocamadour)가 드라마틱하게 등장했다. 촉박한 일정이었지만 잠깐 머무는 시간을 갖는 데 일행이 모두 동의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덕에 자꾸 발걸음이 늦춰졌다. 이 마을은 석회질이 다량 포함된 토질 덕분인지 유난히 흰빛을 뽐냈다. 석회바위산 꼭대기에 이 같은 마을을 만들려면 평지보다 몇 배 노동력이 투입됐을 텐데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입지였다. 듣자 하니 이 ‘석회’가 바로 순례 마을의 비밀을 푸는 열쇠였다.
6만 년 전 이 일대가 바다 밑에서 융기하며 바다생물이 퇴적된 땅이 드러났다. 토양의 주성분은 석회석과 같은 탄산칼슘. 하지만 물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토질 탓에 나무를 심어도 과실이 나지 않고 곡식을 심어도 추수할 수 없는 척박한 땅이 돼 버렸다. 성직자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땅, 조용히 명상할 수 있는 이곳에 주목했다. 12세기부터 도시를 일궈 한때는 8000명 가까이 머무는 ‘기도하는 마을’을 만든 것이다. 지금은 800명 규모로 축소됐지만 한 해 방문객만 100만 명에 이르는 순례자의 마을이 됐다.
한때 로카마도르는 악명 높은 곳이기도 했다. 범죄자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어떤 이들은 기적을 갈구하기 위해 마을의 맨 꼭대기 성당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찾는 구원을 얻고자 반드시 223개의 계단을 오르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어떤 성직자는 구불구불한 14개의 고갯길을 택해 무릎으로 오르기도 했다. 모든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건 성당 내 위치한 ‘검은 성모상’을 알현하기 위함이었다. 검은 성모상은 시간이 흐르며 자연적으로 검게 변했다고 하는데 프랑스 내 많은 검은 성모가 있지만 로카마도르 것을 제외하고는 일부러 페인트를 칠한 것도 많다고 한다. 가끔 아무도 치지 않는 종이 울리는 건 이 성모의 힘이라고 로카마도르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다.
두런두런 얽힌 로카마도르 이야기를 들으며 223개의 계단을 올랐다. 로카마도르 터가 먼 옛날 바다 아래 잠겼던 땅임을 증명하듯 계단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화석이 박혀 있다. 아름다운 길이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악명은 여전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펌프질을 해댔을 무렵, 검은 성모의 성당 앞에 겨우 발을 디뎠다.
언덕 꼭대기에는 대성당 외에도 자연 동굴을 활용해 만든 예배당이 있었는데 건조한 기후 탓인지 외벽에는 13세기에 그려진 벽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 럭비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미디피레네 사람들을 위한 럭비의 신 예배당도 갖추고 있었다. 엄숙하게만 보인 순례 마을의 귀여운 재치라고나 할까.다시 떠나는 길
마지막 행선지 오슈(Auch)에 도착하기 전 프랑스에서 가장 작은 마을이라 알려진 라르상글(Larressingle)에 들렀다. 목적은 라르상글에 있는 교회에서 순례자들에게 찍어주는 도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는데 각 순례 마을은 이들 여권에 방문자임을 증명해주는 도장을 찍어준다.
그러나 한때 주교가 거주할 정도로 큰 마을이었던 라르상글에는 을씨년스런 바람이 불었다. 교회 역시 군데군데 파손된 흔적이 역력했다. 왠지 교회 내부에 바깥보다 더 추운 공기가 도는 것 같다. 별 기대 없이 여권을 대고 한편에 마련된 도장을 꾹 눌러보는데 선명한 글씨가 찍혀 나온다. 한동안 이용하지 않았다면 잉크가 말랐을 게 분명하지만 도장은 아직 촉촉했다. 분명 바로 얼마 전 순례자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반가운 마음에 길을 재촉했다. 순례자의 행선지가 우리와 같다면 길 위에서 마주칠 것이다.
한걸음에 달려 오솔길 위를 걷고 있는 2명의 사내를 발견했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걷는 길 위의 동지였으므로 실례를 무릅쓰고 둘을 잡아 세웠다. 순례에 나선 지 한 달이 넘었다는 미국인 칼과 브라이언트는 40년 지기 친구. 군에서 제대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먼저 걸었던 칼이 브라이언트를 끈질기게 설득해 성사된 여행이라고 한다.
“부인과 자녀 모두 미쳤다고 했지만 친구 녀석 믿고 한번 와보기로 했지.” 결국 브라이언트는 ‘해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스에게 장기 휴가를 얻는 데 성공해 길에 나섰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가장 오래된 도장을 찍었다는 그는 여정이 빼곡히 담긴 여권을 자랑한다. 남이 보지 않을 땐 꼭 붙어 걷던 두 사람에게 어깨동무를 요청하니 쑥스럽다며 발을 뺀다. 나머지 여정도 건강하게 마무리하길 바라며 손을 흔들었다.우리는 오슈에 다다랐다. 오슈라는 도시명은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했는데 이곳은 중세에 유명한 종교 도시였다. 도시 어디에서나 고딕 양식의 오슈 대성당(Auch Cathedral)이 시선에 걸렸다. 성당 내부는 26m 높이로 프랑스에서 가장 큰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돼 있다.
오늘날 프랑스의 순례 마을과 관련된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많은데 단지 시간이 오래 돼서라거나 보존이 잘 됐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다시 성찰의 기회를 물색하던 현대인에게 조용히 길을 내준 사람들 덕분에 순례 마을은 박제된 박물관이 아닌 삶과 역사의 교차점에 서 있었다.
양보라 여행전문기자는…
단연코 여행의 재미는 소비에 있으며 온갖 살 것이 넘치는 메트로폴리탄이야말로 궁극의 여행지라고 믿어 왔다. 인생의 분기점을 넘은 것인지, 자연으로 파고드는 여정이 즐거워졌다. 이제 막 걷기 여행의 매력에 눈을 뜬 초보 트레커다. 걸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국내외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를 소개할 예정이다. 중앙일보와 월간지 트래비 여행 기자로 글을 써 왔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5호(2019년 12월) 기사입니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수만 갈래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 그가 묻힌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 수도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에 이르는 모든 길이 순례길이다.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 산티아고이며 영어로는 세인트 제임스(Saint James), 프랑스어로는 생 자크(Saint Jacques)라고 한다.프랑스에서 만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야고보는 예수 사후 이스라엘에서 참수를 당했는데 신도들은 성자의 억울한 죽음을 맞고도 그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유해를 싣고 스페인으로 향하던 배가 난파된 것. 9세기 들어서야 발견된 그의 시체는 그간의 험난한 여정을 증명하듯 노란색 가리비가 다닥다닥 붙은 채였다. 기독교인은 뒤늦게 야고보의 묘지 위에 성당을 짓고 증축을 거듭해 산티아고를 조성했다.
그들이 성지를 세우는 것만으로 미안한 감정을 달랬다면 오늘날 순례길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다. 성직자와 신자들은 단지 그의 묘를 참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가리비를 머리에 달고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성 야고보처럼 길을 나섰다. 파울로 코엘료가 <순례자>를 집필하면서 전 세계적인 열풍을 낳은 산티아고 순례길은 제주올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현재 유럽에는 12갈래의 대표적인 순례길이 있는데 순례자 10명 중 8명은 일부러 프랑스 남부에서부터 일정을 시작해 피레네산맥을 넘는 험준한 길을 택한다.
모든 순례길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로 통칭되는데 프랑스 남부 도시 생장 피드 포르에서 출발해 스페인 북부를 횡단하는 루트가 가장 유서 깊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걸은 길은 프랑스 남부 도시 르 퓌(Le Puy)에서 출발해 프랑스 남부 미디피레네(Midi-Pyrenees)주의 유명 순례 도시를 관통하는 구간의 일부였다.
나를 포함해 미국, 라트비아, 중국, 크로아티아, 캐나다 등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을 이끌 가이드는 러시아계 프랑스인인 엘리나. 말 그대로 다국적 ‘순례단’인 우리는 미디피레네주 주도 툴루즈(Toulouse)에서 그녀를 보자마자 속사포같이 질문을 쏟아냈다. “예순이 넘은 내가 걸을 수 있는 길이냐”, “하루에 몇 시간을 걷는 것이냐”, “너무 힘들면 도중에 포기해도 되냐”라는 질문에 엘리나는 빙긋 웃으면서 답했다. “마음을 먹은 성직자들은 이 길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간답니다.” 차분한 한마디였지만 ‘엄살떨지 마시오’라는 엄포가 분명했다.
우선 툴루즈에서 첫 목적지 콩크(Conques)까지 3시간가량 차로 이동했다. 언덕 위 석회석을 이용해 튼튼히 쌓아 올린 건물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 앞에 일행을 태운 차가 멈췄다. 콩크는 프랑스어로 조개를 뜻하는데 마을 전체가 조개껍데기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겨우내 잠잠했던 콩크는 4월 부활절과 함께 모여드는 순례자들로 다시금 활기를 찾는다. 중세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산티아고를 찾아가는 길목 길목에는 순례자를 위한 마을이 조성됐고 콩크도 그 마을 중 하나다.
각 순례 도시는 종교적인 기능과 생활적인 기능을 모두 담당했다. 전망이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교회나 수도원이 들어서 있다. 매일 평균 8시간 동안 길을 걷는 순례자가 안락한 밤을 지새울 수 있도록 숙박업소가 등장했고 그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갖춰졌다. 90가구가 전부인 이 작은 마을에 한 해 3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기사들도 말 위에서 내려와 걸어야 했을 만큼 좁은 골목길, 손으로 일일이 쪼개 얹은 기왓장은 천년 동안 고단한 순례자를 반겨 왔다. 느린 걸음으로 1시간이면 돌아보는 마을이지만 세계 각국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에게 콩크는 없는 것 빼고 다 갖춘 마을일 거다. 작디작은 마을에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켜켜이 앉은 시간이 스쳐 갔다.척박한 땅에서 드리는 기도
순백의 도시가 언덕 끄트머리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한계령 뺨을 칠 정도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나니 로카마도르(Rocamadour)가 드라마틱하게 등장했다. 촉박한 일정이었지만 잠깐 머무는 시간을 갖는 데 일행이 모두 동의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덕에 자꾸 발걸음이 늦춰졌다. 이 마을은 석회질이 다량 포함된 토질 덕분인지 유난히 흰빛을 뽐냈다. 석회바위산 꼭대기에 이 같은 마을을 만들려면 평지보다 몇 배 노동력이 투입됐을 텐데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입지였다. 듣자 하니 이 ‘석회’가 바로 순례 마을의 비밀을 푸는 열쇠였다.
6만 년 전 이 일대가 바다 밑에서 융기하며 바다생물이 퇴적된 땅이 드러났다. 토양의 주성분은 석회석과 같은 탄산칼슘. 하지만 물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토질 탓에 나무를 심어도 과실이 나지 않고 곡식을 심어도 추수할 수 없는 척박한 땅이 돼 버렸다. 성직자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땅, 조용히 명상할 수 있는 이곳에 주목했다. 12세기부터 도시를 일궈 한때는 8000명 가까이 머무는 ‘기도하는 마을’을 만든 것이다. 지금은 800명 규모로 축소됐지만 한 해 방문객만 100만 명에 이르는 순례자의 마을이 됐다.
한때 로카마도르는 악명 높은 곳이기도 했다. 범죄자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어떤 이들은 기적을 갈구하기 위해 마을의 맨 꼭대기 성당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찾는 구원을 얻고자 반드시 223개의 계단을 오르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어떤 성직자는 구불구불한 14개의 고갯길을 택해 무릎으로 오르기도 했다. 모든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건 성당 내 위치한 ‘검은 성모상’을 알현하기 위함이었다. 검은 성모상은 시간이 흐르며 자연적으로 검게 변했다고 하는데 프랑스 내 많은 검은 성모가 있지만 로카마도르 것을 제외하고는 일부러 페인트를 칠한 것도 많다고 한다. 가끔 아무도 치지 않는 종이 울리는 건 이 성모의 힘이라고 로카마도르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다.
두런두런 얽힌 로카마도르 이야기를 들으며 223개의 계단을 올랐다. 로카마도르 터가 먼 옛날 바다 아래 잠겼던 땅임을 증명하듯 계단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화석이 박혀 있다. 아름다운 길이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악명은 여전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펌프질을 해댔을 무렵, 검은 성모의 성당 앞에 겨우 발을 디뎠다.
언덕 꼭대기에는 대성당 외에도 자연 동굴을 활용해 만든 예배당이 있었는데 건조한 기후 탓인지 외벽에는 13세기에 그려진 벽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 럭비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미디피레네 사람들을 위한 럭비의 신 예배당도 갖추고 있었다. 엄숙하게만 보인 순례 마을의 귀여운 재치라고나 할까.다시 떠나는 길
마지막 행선지 오슈(Auch)에 도착하기 전 프랑스에서 가장 작은 마을이라 알려진 라르상글(Larressingle)에 들렀다. 목적은 라르상글에 있는 교회에서 순례자들에게 찍어주는 도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는데 각 순례 마을은 이들 여권에 방문자임을 증명해주는 도장을 찍어준다.
그러나 한때 주교가 거주할 정도로 큰 마을이었던 라르상글에는 을씨년스런 바람이 불었다. 교회 역시 군데군데 파손된 흔적이 역력했다. 왠지 교회 내부에 바깥보다 더 추운 공기가 도는 것 같다. 별 기대 없이 여권을 대고 한편에 마련된 도장을 꾹 눌러보는데 선명한 글씨가 찍혀 나온다. 한동안 이용하지 않았다면 잉크가 말랐을 게 분명하지만 도장은 아직 촉촉했다. 분명 바로 얼마 전 순례자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반가운 마음에 길을 재촉했다. 순례자의 행선지가 우리와 같다면 길 위에서 마주칠 것이다.
한걸음에 달려 오솔길 위를 걷고 있는 2명의 사내를 발견했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걷는 길 위의 동지였으므로 실례를 무릅쓰고 둘을 잡아 세웠다. 순례에 나선 지 한 달이 넘었다는 미국인 칼과 브라이언트는 40년 지기 친구. 군에서 제대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먼저 걸었던 칼이 브라이언트를 끈질기게 설득해 성사된 여행이라고 한다.
“부인과 자녀 모두 미쳤다고 했지만 친구 녀석 믿고 한번 와보기로 했지.” 결국 브라이언트는 ‘해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스에게 장기 휴가를 얻는 데 성공해 길에 나섰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가장 오래된 도장을 찍었다는 그는 여정이 빼곡히 담긴 여권을 자랑한다. 남이 보지 않을 땐 꼭 붙어 걷던 두 사람에게 어깨동무를 요청하니 쑥스럽다며 발을 뺀다. 나머지 여정도 건강하게 마무리하길 바라며 손을 흔들었다.우리는 오슈에 다다랐다. 오슈라는 도시명은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했는데 이곳은 중세에 유명한 종교 도시였다. 도시 어디에서나 고딕 양식의 오슈 대성당(Auch Cathedral)이 시선에 걸렸다. 성당 내부는 26m 높이로 프랑스에서 가장 큰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돼 있다.
오늘날 프랑스의 순례 마을과 관련된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많은데 단지 시간이 오래 돼서라거나 보존이 잘 됐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다시 성찰의 기회를 물색하던 현대인에게 조용히 길을 내준 사람들 덕분에 순례 마을은 박제된 박물관이 아닌 삶과 역사의 교차점에 서 있었다.
양보라 여행전문기자는…
단연코 여행의 재미는 소비에 있으며 온갖 살 것이 넘치는 메트로폴리탄이야말로 궁극의 여행지라고 믿어 왔다. 인생의 분기점을 넘은 것인지, 자연으로 파고드는 여정이 즐거워졌다. 이제 막 걷기 여행의 매력에 눈을 뜬 초보 트레커다. 걸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국내외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를 소개할 예정이다. 중앙일보와 월간지 트래비 여행 기자로 글을 써 왔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5호(2019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