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뮤지컬 배우 김경수 “무대는 나의 뮤즈, 초심 지킬래요”
입력 2019-11-28 13:02:54
수정 2019-11-28 13:02:54
[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흔히 좋은 배우를 흰 도화지로 빗대곤 한다. 뮤지컬 배우 김경수(38)가 그렇다. 종이 도화지보다는 면천 캔버스에 가깝다. 수백 번, 수천 번 덧칠해도 찢기지 않고, 견고하게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그려 가는 그의 행보가 면천 캔버스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만 해도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팬레터>를 포함, 6편의 작품에서 열연을 펼치며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했다. 이제는 명실공히 ‘믿보배(믿고 보는 배우)’로 거듭난 김경수를 만나 배우로서의 희로애락, 아내와 팬들을 향한 속 깊은 이야기들을 엿들어봤다. 사진 이승재 기자 인터뷰 내내 동그란 안경 너머 눈동자가 반짝인다. 어쩌면 수십 번 이상 받았을 법한 질문이 나와도 꾹꾹 진심을 담아 대답하고, 공연장 내 전시된 피아노에 앉자 가요와 클래식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즉흥 연주를 선보이는 이 사람. 뮤지컬 배우 김경수다.
2007년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로 데뷔한 그는 연극·뮤지컬 공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 명성이 자자하다. 실제로 그가 출연하는 공연들 상당수가 매진 사례를 기록할 정도로 평단과 팬들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뮤지컬 배우를 꿈꾼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시작은 음악이었다. 매력적인 음색과 가창력, 뛰어난 연주와 작곡 실력까지 겸비한 그는 2002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은상’과 '네티즌 인기상’을 수상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던 청년이었다. 음악을 향한 꿈이 커져 가면서 그는 좀 더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우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실용음악을 전공하면서 우연히 뮤지컬을 접하게 된 그는 그 매력에 빠져 뮤지컬 배우의 길을 내딛기 시작했다.
배우들 대부분이 그렇듯 김경수 역시 그간 마냥 꽃길만을 걸은 건 아니라고. 거의 확정됐던 캐스팅에서 좌절을 맛보기도 했고, 애초에 연기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연기를 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적잖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 대신 끈기를, 평범한 화단의 꽃이 되기보다는 미지의 들판에서 자신만의 꽃씨를 뿌렸다. 그 결과 김경수의 필모그래피엔 뮤지컬 <파가니니>·<1446>·<스모크>·<라흐마니노프>·<사의 찬미>·<인터뷰>·<빈센트 반 고흐>, 연극 <프라이드>·<히스토리 보이즈> 등 형형색색의 매력적인 작품들로 심어졌다. 매 작품마다 집요한 캐릭터 분석과 섬세한 연기,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이는 그는 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배우로 주목받고 있다.
이런 그가 올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작품은 뮤지컬 <팬레터>다. 뮤지컬 <팬레터>는 1930년대 자유를 억압하던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 이상과 김유정의 에피소드를 모티브 삼아 상상을 더해 만든 모던 팩션(faction) 뮤지컬이다.
작품은 문학을 동경하는 작가 지망생 소년 정세훈이 당대의 인기 소설가 김해진에게 팬레터를 보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폐결핵을 앓으며 외로운 삶을 이어가던 김해진은 정세훈의 팬레터에 큰 위안을 받고, 정세훈과의 편지 왕래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김해진’ 역을 맡은 김경수는 편지의 주인이자 사랑하는 여인 ‘히카루’에 대한 순애보와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글을 쓰고자 했던 천재 소설가의 처절한 집념을 온몸으로 연기한다. 김경수가 바라본 김해진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 봤다.
올해 유독 뮤지컬과 연극을 오가면서 다른 해보다 더 바쁜 한 해를 보낸 것 같습니다.
“네. 올해는 제가 비교적 도전을 많이 한 시기예요. 물론, 작품 수로 따지면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아니지만 유독 올해는 다양한 캐릭터를 만났죠. 주로 초연 작품들을 많이 했고, 초연이 아니더라도 제가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작품들에 참여하게 됐어요. 지금 하고 있는 뮤지컬 <팬레터>도 그렇고요. 그래서인지 매 공연마다 새롭고, 더 많이 공부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평소 제가 연극에 대한 동경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올해 연극을 2편이나 참여하게 돼 굉장히 기쁘고 행복하게 임했던 것 같습니다.”
연극과 뮤지컬 중 어느 쪽에 좀 더 에너지를 쏟나요.
“사실 둘 다 힘들어요(웃음). 뭐가 더 힘든지 구분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연극과 뮤지컬 각각의 철학도 다르고요. 다만, 이런 느낌은 있어요. 연극이 극을 꾸려 가기 좀 더 시원하달까요. 결코 더 쉽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령, 뮤지컬은 독백 형식 때문에 노래해야 하는 구간이 생기잖아요. 연극은 그걸 텍스트(대본)의 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적으로) 관객들에게 대화 형태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어서 시원한 느낌이에요.”
올해 TV 드라마 <빅이슈>에도 출연하셨는데 소감이 궁금해요.
“좋았어요. 제 시작이 노래였기 때문에 (초반에는) 배우라는 직업을 약간 조심스러워했어요. 그전에도 (드라마 출연 등) 비슷한 기회들이 찾아왔는데 겁이 나서 고사한 경우가 더러 있었거든요. 그런데 연기를 하면 할수록 그 깊이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고, 한계에도 부딪치며 배워 가는 과정 속에 연기가 점점 더 재밌어지더라고요. 제 경계를 뮤지컬에만 국한하지 말고 더 넓혀봐야겠다 싶었어요. ‘언젠가는 배역의 크기를 떠나서 기회가 되면 꼭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마침 제 공연을 보신 감독님께서 저한테 출연 제의를 하셨어요. 제겐 정말 좋은 기회였고,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다음에도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도전해보려고요.”
올해 무대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나 혹은 그동안 무대에서 일어난 일 중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특별한 에피소드를 꼽기보다 올해 초연했던 뮤지컬 <파가니니>를 준비할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사실 초연을 안 해본 건 아닌데 그 작품에서는 원 캐스팅이라 걱정이 많았어요. 대개 그전에는 같은 배역을 더블 캐스팅이나 트리플 캐스팅으로 했기 때문에 동료들과 의견 조율도 하고, 모니터도 해주면서 의지가 됐거든요. 그런데 이걸 오롯이 혼자하려니 ‘이러다가 정말 공연을 못 올릴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두려웠죠. 그러나 그 과정을 잘 겪고 결과물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니 그동안 제가 스스로에게 품었던 의문들이 상당 부분 해결된 것 같아요.”
오랫동안 무대에 오르면서 수많은 상대 배역을 만났는데, 함께할 때 가장 편한 배우가 있다면요.
“음, 많은데.(웃음) 그래도 그중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를 했을 때 만난 동료들을 유독 잊을 수 없죠. 그때 제가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거든요.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 면도 있는데, 당시 원래 캐스팅이 진행됐던 작품들이 취소되면서 제가 할 수 있었던 기회들을 많이 놓치게 됐어요. 상당히 우울했죠. 사실 배우가 작품을 할 때 가장 주력해야 하는 건 연기와 노래지만 어쩔 수 없이 티켓 파워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거든요. 일종의 배우의 영향력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 당시 그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좀 더 힘이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스스로를 더 다지는 계기가 됐어요. 그리고 벼랑 끝에 선 듯한 그 당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났어요. 완전히 그 작품에 올인했죠. 그래선지 그때 함께했던 배우들을 참 좋아하고,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작곡도 즐겨 한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소위 퇴근길에서 ‘1일 1작곡’을 외쳤다는 제보가 있는데, 여전히 작곡을 즐겨 하나요.
“기억나지 않습니다.(웃음) 제가 실용음악을 전공해서 곡을 만들 줄 알아요. 곡 만드는 걸 굉장히 좋아하고요. 그래서 간혹 제가 초연 작품을 할 때는 음악 작업에 제 의견을 많이 제시하는 편이에요. 그만큼 곡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거든요. 계속 놓치고 싶지 않은 작업이기도 하고요.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음악 작업을 많이 못했는데, 언제든 여유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이에요. 물론, ‘1일 1작곡’ 하면 참 좋죠.”
현재 <팬레터> 공연 중인데, 본인이 바라보는 김해진은 어떤 사람인가요.
“일단 글에 미쳐 있는 사람이에요. 극 중간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세상에 쓸 만한 작품은커녕 결핵균만 남기고 죽는 건 아닐지’라는 대사인데, 사실 김해진은 극중에서 이미 인정받는 작가거든요. 그런데도 그 이상으로 글을 집착적으로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죠. 동시에 결핵이라는 병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요. 그러나 팬레터를 통해 삶의 의지와 힘을 다시 얻고, 그이(팬)의 글을 존경하고, 그 덕에 숨을 쉬는 사람 같았어요.
사실 이것도 정말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극중 ‘해진의 편지’라는 노래가 있어요. 이 노래 한 곡에 김해진의 서사가 함축돼 있죠. 그런데 제가 공연할 때는 그 노래의 대사 한 부분을 수정했어요. 노래에서는 원래 ‘그녀’라고 표기돼 있어요. (김해진도) 팬레터를 받았을 때 상대가 당연히 여성이라고 생각했죠. 농으로 결혼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요.
하지만 저는 히카루를 일종의 ‘뮤즈’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로 국한시키기보다는 나를 정말 살아가게 만들어주고, 다시 글을 쓰게 만드는 사람. 그 존재를 더 드높이고자 ‘그이’라고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녀’를 ‘그이’로 바꾸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제 견해를 연출가가 허용해주셨어요. 저는 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은데, 관객들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특히,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한번 손대기 시작하면 그것이 어색해지거나 불편하고 낯설 수 있어서 굉장히 조심스럽거든요. 그래도 이 생각만큼은 밀고 나가고 싶었어요.”
<팬레터> ‘이래서 봐야 한다’ 한마디 해주신다면.
“<팬레터>는 조금씩 서늘해지는 이 계절에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에요. 공연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 따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넘버가 너무 좋아요. 저는 그중 ‘해진의 편지’를 접하고 이 작품을 선택했다 싶을 정도로 이 넘버를 좋아합니다.”
벌써 데뷔 13년 차예요. 예전 한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노래 좀 부를 줄 알던 실용음악과 학생이라고 표현했는데, 지금의 배우 김경수는 어떤가요.
“시간이 지났다고 제가 뭔가 변했다는 생각을 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죠. 제가 계속 한다고 꼭 실력이 느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더 항상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에 있자는 생각을 해요. 가령, ‘내가 13년 차니까’라는 식의 생각들을 대입하면 제가 상대배우나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히 바뀌더라고요.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김경수가 되고 싶어요.”
더 해보고 싶은 역이 있나요.
“딱히 ‘뭘 해보고 싶다’ 이런 건 없어요. 하고 싶은 역할보다는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역할을 잘 만들고 싶어요. 무엇보다 창작을 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어요.”
연말에 <팬레터> 외에도 콘서트 등 특별한 공연 계획은 없나요.
“특별히 계획된 콘서트는 없어요. 앞으로 개인 콘서트는 좀 더 의미 있는 날, 제 창작물도 실어서 하고 싶어요. 남은 2019년은 뮤지컬 <팬레터>와 함께할 것 같네요.”
소문난 멋쟁이라고 들었어요. 본인만의 스타일링 원칙과 몸·목소리 관리 노하우가 있다면.
“목 관리를 특별히 한다기보다는 목에 좋은 캔디, 배를 챙겨 먹는 편이고요. 하루도 빠짐없이 반신욕을 해요. 반신욕을 안 하면 뭔가 하루를 애매하게 보낸 느낌이랄까요. 이게 하다 보니 심신이 평온해지고, 성대와 피부 미용에도 좋더라고요. 그리고 평소 옷 스타일링은 아내가 늘 코디해줘요.(미소)”
아내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것 같아요.
“아내랑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해요. 8년을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제게 큰 힘이 되는 사람이죠. 작품 상의도 많이 해요. 아내가 제 공연을 많이 보다 보니까 작품을 보는 안목이 넓어요. 아이디어도 많이 주고요. 종종 대본도 같이 읽자고 제가 부탁하는데, 그렇게 하면 대사 외우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고마운 팬들에게도 한마디 하자면.
“원래 예전에는 뮤지컬 <팬레터> 커튼콜 때 매회 관객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이벤트가 있었어요. 추첨을 통해 관객 한 분에게 배우가 쓴 편지를 전달하는 거였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사정상 하지 않게 됐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걸 뒤늦게 알아서 일단 연습할 당시 제 첫 공연 때 드릴 편지를 이미 써 놨거든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제 SNS에 사진을 찍어서 첫 공연 날 올렸어요. 제가 글 솜씨가 좋지 않아서 김해진의 편지를 인용해서 썼어요.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에게 표현하기 딱 좋은 가사가 있었거든요. ‘그대의 한 줄로 내가 나날을 버티었소.’ 어쩌면 제가 늘 팬들에게 가장 하고픈 말이었어요. 정말 관객들과 팬들이 보내주시는 편지들과 응원 덕분에 제가 (지난) 나날들을 버텼습니다. 감사해요.”
앞으로 꿈과 목표가 있다면요.
“작품을 할 때는 욕심을 부리는 편인데 꿈을 말하라고 하면 되레 소박한 것들을 꿈꿔요. 어떻게 보면 엄청난 일일 수도 있는데 지금처럼 꾸준히 저를 무대로 불러주실 수 있도록 건강하게 배우 일을 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내게 ‘무대는 000’이다. 한 마디 해주신다면.
“뮤즈예요. 저는 무대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고, 무대를 위해서 존재하니까요.”
뮤지컬 배우 김경수는…
1982년 9월 6일생. 2007년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로 데뷔해
<사랑은 비를 타고>, <그리스>, <글루미데이>, <빈센트 반 고흐>,
<라흐마니노프>, <인터뷰>, <스모크>, <사의 찬미>, <1446>, <파가니니>와 연극 <프라이드>, <히스토리 보이즈> 등에 출연하며 뛰어난 가창력과 섬세한 연기로 평단과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5호(2019년 12월) 기사입니다.]
2007년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로 데뷔한 그는 연극·뮤지컬 공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 명성이 자자하다. 실제로 그가 출연하는 공연들 상당수가 매진 사례를 기록할 정도로 평단과 팬들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뮤지컬 배우를 꿈꾼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시작은 음악이었다. 매력적인 음색과 가창력, 뛰어난 연주와 작곡 실력까지 겸비한 그는 2002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은상’과 '네티즌 인기상’을 수상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던 청년이었다. 음악을 향한 꿈이 커져 가면서 그는 좀 더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우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실용음악을 전공하면서 우연히 뮤지컬을 접하게 된 그는 그 매력에 빠져 뮤지컬 배우의 길을 내딛기 시작했다.
배우들 대부분이 그렇듯 김경수 역시 그간 마냥 꽃길만을 걸은 건 아니라고. 거의 확정됐던 캐스팅에서 좌절을 맛보기도 했고, 애초에 연기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연기를 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적잖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 대신 끈기를, 평범한 화단의 꽃이 되기보다는 미지의 들판에서 자신만의 꽃씨를 뿌렸다. 그 결과 김경수의 필모그래피엔 뮤지컬 <파가니니>·<1446>·<스모크>·<라흐마니노프>·<사의 찬미>·<인터뷰>·<빈센트 반 고흐>, 연극 <프라이드>·<히스토리 보이즈> 등 형형색색의 매력적인 작품들로 심어졌다. 매 작품마다 집요한 캐릭터 분석과 섬세한 연기,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이는 그는 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배우로 주목받고 있다.
이런 그가 올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작품은 뮤지컬 <팬레터>다. 뮤지컬 <팬레터>는 1930년대 자유를 억압하던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 이상과 김유정의 에피소드를 모티브 삼아 상상을 더해 만든 모던 팩션(faction) 뮤지컬이다.
작품은 문학을 동경하는 작가 지망생 소년 정세훈이 당대의 인기 소설가 김해진에게 팬레터를 보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폐결핵을 앓으며 외로운 삶을 이어가던 김해진은 정세훈의 팬레터에 큰 위안을 받고, 정세훈과의 편지 왕래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김해진’ 역을 맡은 김경수는 편지의 주인이자 사랑하는 여인 ‘히카루’에 대한 순애보와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글을 쓰고자 했던 천재 소설가의 처절한 집념을 온몸으로 연기한다. 김경수가 바라본 김해진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 봤다.
올해 유독 뮤지컬과 연극을 오가면서 다른 해보다 더 바쁜 한 해를 보낸 것 같습니다.
“네. 올해는 제가 비교적 도전을 많이 한 시기예요. 물론, 작품 수로 따지면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아니지만 유독 올해는 다양한 캐릭터를 만났죠. 주로 초연 작품들을 많이 했고, 초연이 아니더라도 제가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작품들에 참여하게 됐어요. 지금 하고 있는 뮤지컬 <팬레터>도 그렇고요. 그래서인지 매 공연마다 새롭고, 더 많이 공부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평소 제가 연극에 대한 동경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올해 연극을 2편이나 참여하게 돼 굉장히 기쁘고 행복하게 임했던 것 같습니다.”
연극과 뮤지컬 중 어느 쪽에 좀 더 에너지를 쏟나요.
“사실 둘 다 힘들어요(웃음). 뭐가 더 힘든지 구분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연극과 뮤지컬 각각의 철학도 다르고요. 다만, 이런 느낌은 있어요. 연극이 극을 꾸려 가기 좀 더 시원하달까요. 결코 더 쉽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령, 뮤지컬은 독백 형식 때문에 노래해야 하는 구간이 생기잖아요. 연극은 그걸 텍스트(대본)의 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적으로) 관객들에게 대화 형태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어서 시원한 느낌이에요.”
올해 TV 드라마 <빅이슈>에도 출연하셨는데 소감이 궁금해요.
“좋았어요. 제 시작이 노래였기 때문에 (초반에는) 배우라는 직업을 약간 조심스러워했어요. 그전에도 (드라마 출연 등) 비슷한 기회들이 찾아왔는데 겁이 나서 고사한 경우가 더러 있었거든요. 그런데 연기를 하면 할수록 그 깊이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고, 한계에도 부딪치며 배워 가는 과정 속에 연기가 점점 더 재밌어지더라고요. 제 경계를 뮤지컬에만 국한하지 말고 더 넓혀봐야겠다 싶었어요. ‘언젠가는 배역의 크기를 떠나서 기회가 되면 꼭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마침 제 공연을 보신 감독님께서 저한테 출연 제의를 하셨어요. 제겐 정말 좋은 기회였고,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다음에도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도전해보려고요.”
올해 무대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나 혹은 그동안 무대에서 일어난 일 중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특별한 에피소드를 꼽기보다 올해 초연했던 뮤지컬 <파가니니>를 준비할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사실 초연을 안 해본 건 아닌데 그 작품에서는 원 캐스팅이라 걱정이 많았어요. 대개 그전에는 같은 배역을 더블 캐스팅이나 트리플 캐스팅으로 했기 때문에 동료들과 의견 조율도 하고, 모니터도 해주면서 의지가 됐거든요. 그런데 이걸 오롯이 혼자하려니 ‘이러다가 정말 공연을 못 올릴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두려웠죠. 그러나 그 과정을 잘 겪고 결과물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니 그동안 제가 스스로에게 품었던 의문들이 상당 부분 해결된 것 같아요.”
오랫동안 무대에 오르면서 수많은 상대 배역을 만났는데, 함께할 때 가장 편한 배우가 있다면요.
“음, 많은데.(웃음) 그래도 그중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를 했을 때 만난 동료들을 유독 잊을 수 없죠. 그때 제가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거든요.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 면도 있는데, 당시 원래 캐스팅이 진행됐던 작품들이 취소되면서 제가 할 수 있었던 기회들을 많이 놓치게 됐어요. 상당히 우울했죠. 사실 배우가 작품을 할 때 가장 주력해야 하는 건 연기와 노래지만 어쩔 수 없이 티켓 파워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거든요. 일종의 배우의 영향력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 당시 그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좀 더 힘이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스스로를 더 다지는 계기가 됐어요. 그리고 벼랑 끝에 선 듯한 그 당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났어요. 완전히 그 작품에 올인했죠. 그래선지 그때 함께했던 배우들을 참 좋아하고,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작곡도 즐겨 한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소위 퇴근길에서 ‘1일 1작곡’을 외쳤다는 제보가 있는데, 여전히 작곡을 즐겨 하나요.
“기억나지 않습니다.(웃음) 제가 실용음악을 전공해서 곡을 만들 줄 알아요. 곡 만드는 걸 굉장히 좋아하고요. 그래서 간혹 제가 초연 작품을 할 때는 음악 작업에 제 의견을 많이 제시하는 편이에요. 그만큼 곡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거든요. 계속 놓치고 싶지 않은 작업이기도 하고요.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음악 작업을 많이 못했는데, 언제든 여유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이에요. 물론, ‘1일 1작곡’ 하면 참 좋죠.”
현재 <팬레터> 공연 중인데, 본인이 바라보는 김해진은 어떤 사람인가요.
“일단 글에 미쳐 있는 사람이에요. 극 중간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세상에 쓸 만한 작품은커녕 결핵균만 남기고 죽는 건 아닐지’라는 대사인데, 사실 김해진은 극중에서 이미 인정받는 작가거든요. 그런데도 그 이상으로 글을 집착적으로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죠. 동시에 결핵이라는 병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요. 그러나 팬레터를 통해 삶의 의지와 힘을 다시 얻고, 그이(팬)의 글을 존경하고, 그 덕에 숨을 쉬는 사람 같았어요.
사실 이것도 정말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극중 ‘해진의 편지’라는 노래가 있어요. 이 노래 한 곡에 김해진의 서사가 함축돼 있죠. 그런데 제가 공연할 때는 그 노래의 대사 한 부분을 수정했어요. 노래에서는 원래 ‘그녀’라고 표기돼 있어요. (김해진도) 팬레터를 받았을 때 상대가 당연히 여성이라고 생각했죠. 농으로 결혼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요.
하지만 저는 히카루를 일종의 ‘뮤즈’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로 국한시키기보다는 나를 정말 살아가게 만들어주고, 다시 글을 쓰게 만드는 사람. 그 존재를 더 드높이고자 ‘그이’라고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녀’를 ‘그이’로 바꾸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제 견해를 연출가가 허용해주셨어요. 저는 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은데, 관객들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특히,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한번 손대기 시작하면 그것이 어색해지거나 불편하고 낯설 수 있어서 굉장히 조심스럽거든요. 그래도 이 생각만큼은 밀고 나가고 싶었어요.”
<팬레터> ‘이래서 봐야 한다’ 한마디 해주신다면.
“<팬레터>는 조금씩 서늘해지는 이 계절에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에요. 공연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 따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넘버가 너무 좋아요. 저는 그중 ‘해진의 편지’를 접하고 이 작품을 선택했다 싶을 정도로 이 넘버를 좋아합니다.”
벌써 데뷔 13년 차예요. 예전 한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노래 좀 부를 줄 알던 실용음악과 학생이라고 표현했는데, 지금의 배우 김경수는 어떤가요.
“시간이 지났다고 제가 뭔가 변했다는 생각을 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죠. 제가 계속 한다고 꼭 실력이 느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더 항상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에 있자는 생각을 해요. 가령, ‘내가 13년 차니까’라는 식의 생각들을 대입하면 제가 상대배우나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히 바뀌더라고요.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김경수가 되고 싶어요.”
더 해보고 싶은 역이 있나요.
“딱히 ‘뭘 해보고 싶다’ 이런 건 없어요. 하고 싶은 역할보다는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역할을 잘 만들고 싶어요. 무엇보다 창작을 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어요.”
연말에 <팬레터> 외에도 콘서트 등 특별한 공연 계획은 없나요.
“특별히 계획된 콘서트는 없어요. 앞으로 개인 콘서트는 좀 더 의미 있는 날, 제 창작물도 실어서 하고 싶어요. 남은 2019년은 뮤지컬 <팬레터>와 함께할 것 같네요.”
소문난 멋쟁이라고 들었어요. 본인만의 스타일링 원칙과 몸·목소리 관리 노하우가 있다면.
“목 관리를 특별히 한다기보다는 목에 좋은 캔디, 배를 챙겨 먹는 편이고요. 하루도 빠짐없이 반신욕을 해요. 반신욕을 안 하면 뭔가 하루를 애매하게 보낸 느낌이랄까요. 이게 하다 보니 심신이 평온해지고, 성대와 피부 미용에도 좋더라고요. 그리고 평소 옷 스타일링은 아내가 늘 코디해줘요.(미소)”
아내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것 같아요.
“아내랑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해요. 8년을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제게 큰 힘이 되는 사람이죠. 작품 상의도 많이 해요. 아내가 제 공연을 많이 보다 보니까 작품을 보는 안목이 넓어요. 아이디어도 많이 주고요. 종종 대본도 같이 읽자고 제가 부탁하는데, 그렇게 하면 대사 외우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고마운 팬들에게도 한마디 하자면.
“원래 예전에는 뮤지컬 <팬레터> 커튼콜 때 매회 관객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이벤트가 있었어요. 추첨을 통해 관객 한 분에게 배우가 쓴 편지를 전달하는 거였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사정상 하지 않게 됐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걸 뒤늦게 알아서 일단 연습할 당시 제 첫 공연 때 드릴 편지를 이미 써 놨거든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제 SNS에 사진을 찍어서 첫 공연 날 올렸어요. 제가 글 솜씨가 좋지 않아서 김해진의 편지를 인용해서 썼어요.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에게 표현하기 딱 좋은 가사가 있었거든요. ‘그대의 한 줄로 내가 나날을 버티었소.’ 어쩌면 제가 늘 팬들에게 가장 하고픈 말이었어요. 정말 관객들과 팬들이 보내주시는 편지들과 응원 덕분에 제가 (지난) 나날들을 버텼습니다. 감사해요.”
앞으로 꿈과 목표가 있다면요.
“작품을 할 때는 욕심을 부리는 편인데 꿈을 말하라고 하면 되레 소박한 것들을 꿈꿔요. 어떻게 보면 엄청난 일일 수도 있는데 지금처럼 꾸준히 저를 무대로 불러주실 수 있도록 건강하게 배우 일을 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내게 ‘무대는 000’이다. 한 마디 해주신다면.
“뮤즈예요. 저는 무대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고, 무대를 위해서 존재하니까요.”
뮤지컬 배우 김경수는…
1982년 9월 6일생. 2007년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로 데뷔해
<사랑은 비를 타고>, <그리스>, <글루미데이>, <빈센트 반 고흐>,
<라흐마니노프>, <인터뷰>, <스모크>, <사의 찬미>, <1446>, <파가니니>와 연극 <프라이드>, <히스토리 보이즈> 등에 출연하며 뛰어난 가창력과 섬세한 연기로 평단과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5호(2019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