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Teaching] 2개의 색깔, 욕망의 계급전쟁

스탕달

[한경 머니 = 박숙자 서강대 전인교육원 조교수] 스탕달의 <적과 흑>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객관적 조망이 어려운 혼탁한 현실을 쥘리엥이라는 3인칭 인물을 통해 그리고 있다. 미천한 신분인 쥘리엥이 사제복을 의미하는 검은 옷과 군복을 상징하는 붉은 옷을 번갈아 입으며 그들의 욕망을 모방하거나 배반하면서 벌인 전쟁은 계급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쥘리엥의 상승 욕망은 이 역사의 심연이었다.
19세기 전후의 서구 유럽을 두고 누군가는 ‘혁명’의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또 누군가는 격변의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 같은 평가는 대개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들의 말이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등장, 그리고 왕정복고를 거쳐 다시 7월 혁명에 이르는 이 격변의 세계 속에서 불안과 증오, 권태와 불안이 용틀임을 했다.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관통하며 근대 시민사회가 가능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근대’, ‘시민’을 위해 격변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은 작은 위로조차 되지 않았다.
작가 스탕달(Stendhal)의 삶이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여섯 살 때 프랑스대혁명이 발생했으며 그 이후 나폴레옹 제정과 왕정복고, 7월 혁명에 이르는 시기를 경험했다. 그리고 ‘스탕달’이라는 필명으로 근대 리얼리즘 소설의 효시로 평가되는 <적과 흑>을 발표했다. 이 소설에서 ‘적’은 군복을 상징하는 붉은 옷을, ‘흑’은 사제복을 상징하는 검은 옷을 뜻한다. 또 전자가 나폴레옹 시대를 뜻하기도 하고 후자가 왕정복고 시대를 우회하는 표현하기도 하다. 그만큼 2개의 색깔은 두 시대가 요동치며 충돌하는 것을 상징한다. ‘1830년의 연대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소설에서 옷차림은 ‘계급’의 표식이자 정체성이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따라 그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러나 2개의 색깔 바깥에 놓인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쥘리엥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 베리에르에서 제재소를 하는 소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일 책을 끼고 살면서 육체노동을 꺼려하는 쥘리엥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공공연하게 학대했다. 형들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다. 쥘리엥이 레날 시장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신분 상승을 뜻하는 ‘검은 옷’을 입고 지나가자 형들은 동생에 대한 질투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두들겨 팼다. 쥘리엥은 이런 아버지와 형들을 외면하면서 스스로를 ‘고아’라고 생각했다. 많은 책들을 제 것으로 읽어 나가면서 이미 다른 세상에서 자기 세상을 꿈꿨다.
베리에르시에 처음 발을 디디는 여행자들은 누구나 거대한 기계소리를 듣게 되는데, 바로 레날 시장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시장은 공장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또 ‘왕당파’를 지지하는 그는 ‘비굴한 하인’ 같은 인간들을 원했고, 돈이 어디에서 나오지는 짐작하는 패들은 자기 셈법을 가지고 레날 시장 옆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려 했다. 레날 시장 역시 예전 궁정 귀족의 습관을 모방하면서 자기 위신을 세우려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흥 부르주아들은 돈으로 ‘미덕’을 사려고 했다. 이들은 종종 “그처럼 가문이 좋은”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변화하는 시대를 붙잡으려 했다.
때는 바야흐로 1830년대가 아닌가. 대혁명 이후에 찾아온 ‘왕정복고’의 시대는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1830년의 프랑스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로 일체의 다정다감한 면모는 지방의 풍속”에서 사라졌고 사람들은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마저 빼앗길까 봐 불안해하며 비굴해졌다. 쥘리엥조차 공식석상에서는 ‘나폴레옹’을 혐오하는 말로 제 뜻을 가렸다. 남녀 간의 자유로운 연애조차 ‘천한 방종’으로 추방됐고, 집안의 부인들은 남편의 뜻에 따라 순식간에 여직공의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나는 생각’과 ‘다정다감한 태도’를 숨긴 채로 시대의 변화를 추수하려고 했다.
쥘리엥조차 필요에 따라 그러했지만 그들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곳곳에서 표현했다. 하층 계급의 쥘리엥이 가진 것은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야망과 지식뿐이었다. 쥘리엥은 근대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잠영하며 자기 세상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 과정에서 검은색 옷을 입어보기도 했고, 붉은색 옷을 꿈꾸기도 했다.
쥘리엥이 라틴어를 잘 가르칠 수 있는 가정교사로 레날 시장의 집에 들어갔을 때 ‘훌륭한 옷차림을 한 부인이 말을 걸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날 부인은 오히려 쥘리엥을 보고 안심했다. 라틴어를 가르치는 사제란 “아이들을 꾸짖고 매질하러 올 더럽고 형편없는 매무새의 사제”라고 생각했으나 ‘젊은 농부’의 얼굴에서 희고 맑은 얼굴빛을 확인하면서 안심했다. ‘적과 흑’ 사이에 흐르고 있는 또 다른 흐름이었고 이 뜨거움은 사랑이 됐다. 이 사랑이 ‘불륜’으로 심판되기 직전에 쥘리엥은 탈출했다.
쥘리엥은 또 다른 곳에서도 여성의 마음을 얻어서 귀족으로 등극할 수 있었으나 바로 그 순간에 레날 부인의 편지가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들었다. 쥘리엥은 레날 부인을 찾아가 총을 겨누었고 그 범죄로 재판을 기다리는 수인이 됐다.
그는 이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며 “여태까지 입어오던 것과는 판이한 옷”을 입을 수 있다고 믿었다. 기존 계급을 뒤흔드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도도하게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나폴레옹’을 그런 존재로 상상했다. ‘100년 뒤’쯤에는 이 시대의 사건을 ‘적과 흑’으로 요약하거나 근대 시민 계급의 등장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으나 쥘리엥이 검은 옷과 붉은 옷을 번갈아 입으면서 그들의 욕망을 모방하거나 배반하면서 벌인 전쟁은 ‘계급’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쥘리엥의 상승 욕망은 이 역사의 심연이었다.
마지막 재판을 남겨 두고 쥘리엥은 판사와 변호사 사이에서 “여하튼 나는 용감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을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나를 통해 나와 같은 부류의 젊은이들을 징벌”하면서 자신의 도구로 쓸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을 동정하거나 징벌하면서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재판에서 자기 죄를 스스로 말하기로 한다. “하층 계급에서 태어나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다행히 좋은 교육을 받았고 부유한 사람들의 사교계에 대담하게 끼어들려” 한 죄라고 말이다. 그리고 쥘리엥은 한마디를 더 한다. 바로 자신이 “나와 같은 계급의 동료들에게 판결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배심원석에는 부유한 농민 하나 보이지 않고 오직 분개한 부르주아들만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적과 흑’의 역사 속에서 쥘리엥은 그들과는 다른 싸움을 한 것이다.
베리에르시를 가득 메운 시끄러운 기계소리와 ‘돈이 되는’ 것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고성 속에서 쥘리엥은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들을 비춰냈다. “소설이란 길을 따라 들고 다니며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말이 쓰인 <적과 흑>은 객관적 조망이 어려운 혼탁한 현실을 3인칭으로 조망해내며 ‘거울’처럼 한 시대의 삶을 비춰낸다. 그 중심에 하층 계급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쥘리엥이 있었다.
일러스트 전희성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4호(2019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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