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if in Art] 가스등(gaslight), 진실은 희미한 등불 아래

[한경 머니 = 글·사진 박은영 서울하우스 편집장·미술사가] 18세기 말 영국에서 발명한 가스등은 기존의 촛불이나 유등을 대체할 획기적 조명기구였다. 파이프로 석탄가스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대규모 조명이 가능해졌다. 19세기 초에는 가정과 공장은 물론 도시의 밤거리도 밝히게 됐다.

런던 팰맬가의 가스등 캐리커처, 1809년, 토머스 로울랜슨의 동판화(우드워드 드로잉)
영화 <가스등>의 불안한 불빛
어스름한 도시의 거리, 한 남자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장대로 가로등에 불을 붙인다. 가스등이 하나씩 켜지면서 바야흐로 런던의 밤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지 큐커 감독의 1944년 영화 <가스등>의 첫 장면이다. 탐욕과 사랑과 폭력에 얽힌 인간의 심리를 파헤친 스릴러물이다.
런던의 한 저택에서 유명 오페라 가수 앨리스 앨퀴스트가 살해당한다. 범인은 알 수 없고, 피해자의 상속자는 함께 살던 조카 폴라(잉그리드 버그만)뿐이다. 폴라는 실의에 젖어 그 집을 비워 둔 채 음악 공부를 하러 이탈리아로 떠난다. 거기서 피아노를 치던 그레고리(샤를 부아이에)와 사랑에 빠져 음악을 포기하고 결혼한다. 두 사람은 런던으로 돌아와 상속받은 저택에서 살게 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폴라에게 까닭 모를 건망증과 착각 증세가 자주 일어난다. 처음에 폴라는 자기 기억이 옳다고 항변하지만, 그녀가 정신이상이라는 남편의 주장을 계속 들으면서 본인도 점점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다. 특히 남편이 외출하는 밤이면 폴라는 집 안의 가스등 불빛이 작아지고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느낀다. 다시 가스등 불빛이 커지면 소리도 멈추고 잠시 후 그가 돌아온다. 매일 작아졌다 커지기를 반복하는 가스등, 그것은 그레고리의 말대로 정말 폴라의 환상일까.
이때 경찰관 브라이언(조셉 코튼)이 등장해 반전이 시작된다. 예전에 앨퀴스트의 열렬한 팬이었던 브라이언은 우연히 폴라를 보고 잊었던 살인사건을 떠올린다. 브라이언이 폴라를 방문했을 때 마침 가스등 불빛이 작아지고 위에서 소리가 들린다. 브라이언의 확인으로 폴라는 그것이 환상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다락방에 앨퀴스트의 유품이 있었는데 밤마다 그레고리가 다른 집 지붕을 통해 숨어들어와 그것을 뒤지곤 한 것이다. 아래층의 가스등 불빛이 작아진 것은 다락방의 가스등을 켰기 때문이다. 그는 앨퀴스트가 가진 보석이 탐나서 그녀를 죽이고 폴라를 속여 그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폴라를 정신병자로 몰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레고리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가스등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반면 폴라는 밑에서 등불이 작아지는 것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빛을 다루는 자가 권력을 쥐고 군림하며 상대의 심리까지도 장악한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자는 불안한 불빛 속에서 판단력도 흐려진다. 그러나 그레고리의 집요한 계획은 바로 그 가스등 때문에 덜미가 잡힌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스등의 불규칙한 조명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확실한 등불이 됐다.

조르주 쇠라, 서커스 사이드쇼, 1887~1888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가스등이 비추는 쇠라의 그림
런던 거리에 처음 등장한 가스등은 곧 유럽의 도시들로 퍼져 나갔다. 19세기 후반 새로 정비한 파리의 대로에는 1만 개가 넘는 가로등이 설치됐다. 가스등이 켜진 밤거리는 신세계였다. 늦게까지 불을 밝힌 상가에서 산책이나 쇼핑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도시의 밤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가스등이 파리의 거리를 점령하던 때, 급변하는 도시의 풍광은 화가에게도 새로움을 모색할 좋은 소재였다. 인상파 화가들은 주로 야외에서 풍경이나 일상을 재빨리 포착하곤 했다. 햇빛에 따라 물체의 색과 형태가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젊은 화가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즉흥적인 감각으로 그려내는 그림에 만족할 수 없었다. 쇠라는 빛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물체의 색을 원색에 가까운 여러 색으로 분할했다. 그리고 순색의 작은 점들을 무수히 찍는 점묘법으로 대상을 묘사했다. 물감은 섞을수록 탁해지므로 섞지 않고 병치함으로써 보는 사람의 눈에서 색의 혼합이 일어나도록 한 것이다. 색점들이 섞여 있으면 우리 눈은 색의 경계를 뚜렷이 인식하지 못하고 혼동하기 때문이다. 시각의 불완전함을 이용해 쇠라는 빛의 작용에 의한 색채 효과를 보다 선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럼 햇빛이 없는 밤이나 실내의 등불 밑에서는 색이 어떻게 달라질까.
쇠라는 <서커스 사이드쇼>를 그려 인공조명에 의한 색조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표현했다. ‘사이드쇼’란 본 공연에 앞서 관객을 끌기 위해 펼치는 일종의 맛보기 공연을 말한다. 쇠라는 가스등이 비추는 밤의 무대와 객석을 특유의 점묘법으로 묘사했다. 그림 맨 위에 불꽃 모양 가스등 9개가 나란히 빛나고 있다. 그 밑의 긴 가로선은 가스를 공급하는 파이프다. 맨 아래 전경에도 다양한 관중이 수평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중앙의 단상에 트롬본 연주자가 서 있어 화면의 중심축을 이룬다. 왼쪽에는 난간 뒤에서 악사들이 연주하고 있다. 뒷벽에 타원형 홍보물들이 붙어 있고 관람료를 알리는 숫자도 보인다. 오른쪽에는 한 광대가 나와서 뭔가 설명을 하는 듯하고 배가 불룩한 단장이 상황을 감독하고 있다. 그들 뒤 녹색의 매표소 앞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표를 사고 있다. 창구 안쪽에도 5개의 둥근 가스등이 보인다.
조르주 쇠라, 서커스 사이드쇼 세부
그림 <서커스 사이드쇼>는 전체가 수직과 수평의 선들로 구성돼 있다. 그 선들이 황금비에 따라 세심하게 화면을 분할하면서 서로 균형을 맞춘다. 거기에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이 크고 작게 대조와 조화를 이루며 미묘한 톤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공간의 깊이는 전통적인 원근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빛의 강약에 의해 생긴다. 역광을 받은 군중은 어두운 청색의 강한 실루엣으로 표현된 반면 무대에서 조명을 받은 악사들은 밝게 표현됐다. 그런데 가스등이 아주 밝지는 않기 때문에 보색이나 명암 같은 상반된 요소들이 은은한 빛 속에 부드럽게 통합된다.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소비자와 생산자, 고용자와 피고용자, 부르주아와 노동자, 남자와 여자 등 서로 다른 위치에 있지만 뿌연 조명 속에 모두 통합된다. 쇠라는 계층 분화가 점점 뚜렷해지는 도시의 군상을 간결한 구성에 담았다. 빛이 흐린 덕분에 오히려 사람들의 차이를 마음껏 드러내는 한편 조화로운 공존의 느낌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었다.
밤의 조명으로 변하는 색을 쇠라는 얼마나 정확히 표현했을까? 한번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이 그림에 가스등과 비슷한 색의 빛을 비춰보았다. 그랬더니 주황색이던 사람의 얼굴이 자연스런 살색으로 보이고 군중과 트롬본 연주자는 청색이 아니라 검은색으로 보였다. 놀랍도록 치밀한 계산과 엄청난 노력의 결과다. 쇠라에게 가스등이 켜진 밤은 시각 현상의 진실을 규명하고 사회의 진정한 면모를 제시할 수 있는 확실한 기회가 됐다. 빛이 희미할 때 오히려 진실이 슬그머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말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4호(2019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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