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글·사진 양보라 여행전문기자]제주올레는 여행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꾼 ‘발명품’이라 할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의 곳곳이 제주올레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비로소 점을 찍는 게 아니라 선으로 이어지는 여행을 경험하게 됐다. 남녘의 섬을 걷기여행의 성지로 만든 사단법인제주올레가 만든 또 하나의 길이 서귀포 구도심 구석구석을 누비는 ‘어슬렁 코스’다. 제주 속살로 파고드는 어슬렁 코스를 따라 꼬닥꼬닥(느릿느릿) 걸었다.
사단법인제주올레(이사장 서명숙)가 다시 길을 냈다. 제주 서귀포시 구석구석을 어슬렁 걷는다 해서 이름이 붙은 ‘어슬렁 코스’다. 어슬렁 코스는 공식적으로 2017년 10월 개장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2016년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와 함께 탄생했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는 서귀포 구도심, 서귀포시 서귀동에 있는 올레꾼의 베이스캠프다. 걷기여행에 나선 이들이 이곳에서 정보를 얻고 식사를 하고 잠을 청하기도 한다. 주변에 걸을 만한 길을 추천해달라는 올레꾼의 요청을 받으면 사단법인제주올레는 서귀포 골목길을 소개해 왔다. 올레꾼이 부지런히 거닐었던 골목길이 어슬렁 코스로 명명됐다.
제주올레가 섬을 크게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라면, 어슬렁 코스는 서귀포 시내의 작은 골목을 파고든다는 점이 다르다. 자연의 쉼표, 문화의 향기, 시간의 흔적, 한라산 물길이라는 4가지 테마로 나뉜 어슬렁 코스는 테마마다 A·B 두 코스를 둬 모두 8개 코스로 구성된다. 바다와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른 제주의 가을날, 제주올레와 더불어 걷기 좋은 길이다. 동네 사람처럼 살아보기
해마다 11월 첫째 주에는 사단법인제주올레가 개최하는 제주올레 걷기축제(올레축제)가 열린다. 2010년부터 시작된 축제에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 모인 올레꾼 수천 명이 참가한다. 작은 마을에 모여 일제히 올레길을 걷는 장관이 빚어지곤 한다. 올해 올레축제는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사흘간 진행되며 제주올레 8·9·10코스를 하루에 한 코스씩 걷는 일정으로 치러진다.
2012년 11월 21코스까지 개장하면서 제주올레는 마침내 제주도 둘레길을 완성했다. 올레길을 내면서 사단법인제주올레는 마을의 여행 문화를 가꾸는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마을 민박이나 마을의 체험 거리를 올레꾼에게 소개했고, 마을과 공생하는 축제도 열었다. 올레축제는 올레길이 지나는 마을의 주민이 음식을 마련하고 공연을 준비한다.
‘어슬렁 코스’ 역시 사단법인제주올레의 마을 사랑이 빚어낸 작품이다. 제주올레를 걸으러 온 사람들이 마을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을 소개하자는 취지로 만든 길이다. 어슬렁 코스를 개장하자 반응은 뜨거웠다. 어슬렁 코스 지도를 제작해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비치하면 지도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여행자들이 그림 같은 제주의 자연을 뒤로하고 서귀포 구석구석의 골목길에 매료된 까닭이 궁금했다. 어슬렁 코스 지도 한 장을 얻어 여행자센터를 출발했다. 길에 따로 표식이 없으니 지도를 잘 보고 걸으라는 조언을 들었다. 한라산 품은 미술관
맛보기 코스로 어슬렁 코스 ‘문화의 향기’ 테마 A코스를 골랐다.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시작해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끝나는 길은 2.7㎞로 비교적 짧았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역으로 코스를 거슬러 가니 가장 먼저 서귀포칠십리시공원이 나타났다. 서귀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담은 시비가 띄엄띄엄 서 있는 것 말고는 평범한 공원으로 보였다. 그런데 공원 한가운데서 천지연폭포가 내려다보였다. 폭포 위쪽으로는 한라산이 훤히 드러났다. 천지연폭포를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있어도 폭포의 정수리를 내려다본 적은 처음이었다.
공원이 여행객 사이에 무명인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서귀포칠십리시공원은 서귀포 시민들이 아침, 밤 가볍게 산책하는 장소라는데, 동네 공원이 무지막지한 절경을 품고 있는 꼴이었다.
길은 공원 옆 야트막한 오름 삼매봉(153m) 방향으로 이어졌다. 제주올레 7코스는 삼매봉 정상에 있는 정자까지 닿지만, 어슬렁 코스 지도는 정상으로 향하기 전 옆길로 빠지라고 안내했다. 삼매봉으로 가는 둔덕에는 서귀포예술의전당과 기당미술관, 삼매봉도서관이 쪼르륵 서 있었다.
건물 벽면을 현무암으로 장식한 기당미술관을 건물이 멋있다는 이유로 들어가 봤다. 기당미술관은 서귀포 법환동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사업가 기당 강구범(1909~1994년) 선생의 지원으로 1987년 개장한 국내 최초의 시립 미술관이다. 미술관에는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생을 마감한 변시지(1926~2013년) 화백의 그림이 빼곡했다.
고준휘 큐레이터가 아트 라운지로 안내했다. 관람객이 쉬어 가는 장소에 커다란 창이 뚫려 있었다. 창 너머로 한라산 풍경이 그림처럼 걸렸다. 마침 날이 맑아 한라산 능선이 또렷이 드러났다. 당장 인스타그램에 기당미술관을 검색했다. 미술관의 큰 창을 찍은 사진이 몇 컷 나왔지만, 아직 이 스폿이 인스타그래머에게 점령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올레길 너머 깊숙한 곳에 숨은 보물 같은 장소다”라고 미술관을 소개한 고 큐레이터의 말에 수긍했다.
삼매봉도서관도 한라산의 절경이 아무렇지 않게 펼쳐지는 장소였다. 자연광이 쏟아지는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누구나 출입할 수 있고 누구나 책을 빌릴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정순임 사서가 “삼매봉도서관에 왔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 구내식당이다”라고 귀띔했다.
도서관 구내식당은 서귀포 사람들도 일부러 찾아와서 먹는 맛집이었다. 인기 메뉴는 한라산처럼 불쑥 솟은 계란볶음을 얹은 한라산 오므라이스(5000원). 대구 인터불고호텔 출신 주방장의 노하우가 녹아들어서인지 가격 대비 맛이 훌륭하다. 창밖의 한라산을 바라보며 오므라이스를 꿀떡 삼켰다.
물을 좇으면 제주가 보인다
서귀포에서 나고 자란 문화해설사 강치균(75) 씨가 어슬렁 코스 걷기여행에 동행했다. 강 해설사가 추천한 길은 한라산 물길 테마의 B코스였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출발해 조선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서귀진성까지 3㎞가 이어진다. 강 해설사가 “서귀포 사람의 생명수이자 휴식처인 서귀포 물줄기를 좇으면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귀포 중심가인 동문로터리를 지나 서귀포중학교를 오른편에 두고 골목으로 들어서니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대신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제주의 파도 소리는 익숙했어도 제주의 시냇물 소리는 생경했다. 제주는 폭우가 와도 삽시간에 땅 속으로 빗물이 스며든다. 제주가 화산섬이고 암석지대 대부분이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이뤄져 그렇다. 지하수는 해안에 다다라 용천수로 솟아난다.
“제주는 한강이나 낙동강 같은 큰 ‘강’이 없어요. 그런데 이곳 동홍천만큼은 물이 풍부해요. 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서귀포 사람들은 마음이 넉넉하지요.”
강 해설사가 어릴 적 멱을 감기도 하고, 식수를 떠가기도 했다는 동홍천은 제주에서 보기 드문 ‘강’다운 모습이었다. 동홍천 하류에 샘물이 퐁퐁 뿜어져 나오는 용천이 있는 덕분이었다. 서귀포 시민들의 휴식 장소 정모시쉼터는 바로 그 용천 주변에 만든 수변공원이다.
정모시쉼터에서 10여 분 걸어가니 시냇물 소리는 우렛소리로 바뀌었다. 동홍천이 바다로 흘러드는 그 지점에 낙차 23m를 자랑하는 정방폭포가 있었다. 곤두박질 친 폭포수가 그대로 서귀포 앞바다로 합류되는 장면은 절경이었다. 제주올레 6코스가 정방폭포를 지나기에 올레길을 걸을 때도 마주했던 폭포지만, 어슬렁 코스를 걸으며 정방폭포의 상수원을 보고 온 터라 감동이 남달랐다.
정방폭포를 빠져나와 서귀포와 연결된 새섬을 바라보며 걷자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제빙공장을 만들기 위해 터를 닦은 소남머리에 도착했다. 해안 절벽을 곁에 둔 소남머리에서 일본인은 물의 낙차를 이용해 터빈을 돌려 전기를 얻으려고 했다. 지금 소남머리에는 공장 대신 서귀포시 송정동 주민이 드나드는 목욕탕이 있다. 1급수 용천이 흘러드는 냉탕인데 한여름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선풍기를 틀지 않고 잠을 청할 수 있단다. 해안공원이 조성된 자구리해안을 거쳐 서귀진성에 닿았다.
어슬렁 코스는 대단한 명소나 유일무이한 절경을 만끽하는 길은 아니었다. 대단한 명소를 찾아가 인증샷을 찍고 다니는 것만이 꼭 여행의 목적이 될 필요는 없었다. 한량처럼 현지 주민들의 일상적인 공간을 천천히 누볐다. 물길 따라 쉬엄쉬엄 걸었더니 어느덧 서귀포 앞바다에 뉘엿뉘엿 해가 잠기고 있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4호(2019년 11월) 기사입니다.]
사단법인제주올레(이사장 서명숙)가 다시 길을 냈다. 제주 서귀포시 구석구석을 어슬렁 걷는다 해서 이름이 붙은 ‘어슬렁 코스’다. 어슬렁 코스는 공식적으로 2017년 10월 개장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2016년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와 함께 탄생했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는 서귀포 구도심, 서귀포시 서귀동에 있는 올레꾼의 베이스캠프다. 걷기여행에 나선 이들이 이곳에서 정보를 얻고 식사를 하고 잠을 청하기도 한다. 주변에 걸을 만한 길을 추천해달라는 올레꾼의 요청을 받으면 사단법인제주올레는 서귀포 골목길을 소개해 왔다. 올레꾼이 부지런히 거닐었던 골목길이 어슬렁 코스로 명명됐다.
제주올레가 섬을 크게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라면, 어슬렁 코스는 서귀포 시내의 작은 골목을 파고든다는 점이 다르다. 자연의 쉼표, 문화의 향기, 시간의 흔적, 한라산 물길이라는 4가지 테마로 나뉜 어슬렁 코스는 테마마다 A·B 두 코스를 둬 모두 8개 코스로 구성된다. 바다와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른 제주의 가을날, 제주올레와 더불어 걷기 좋은 길이다. 동네 사람처럼 살아보기
해마다 11월 첫째 주에는 사단법인제주올레가 개최하는 제주올레 걷기축제(올레축제)가 열린다. 2010년부터 시작된 축제에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 모인 올레꾼 수천 명이 참가한다. 작은 마을에 모여 일제히 올레길을 걷는 장관이 빚어지곤 한다. 올해 올레축제는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사흘간 진행되며 제주올레 8·9·10코스를 하루에 한 코스씩 걷는 일정으로 치러진다.
2012년 11월 21코스까지 개장하면서 제주올레는 마침내 제주도 둘레길을 완성했다. 올레길을 내면서 사단법인제주올레는 마을의 여행 문화를 가꾸는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마을 민박이나 마을의 체험 거리를 올레꾼에게 소개했고, 마을과 공생하는 축제도 열었다. 올레축제는 올레길이 지나는 마을의 주민이 음식을 마련하고 공연을 준비한다.
‘어슬렁 코스’ 역시 사단법인제주올레의 마을 사랑이 빚어낸 작품이다. 제주올레를 걸으러 온 사람들이 마을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을 소개하자는 취지로 만든 길이다. 어슬렁 코스를 개장하자 반응은 뜨거웠다. 어슬렁 코스 지도를 제작해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비치하면 지도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여행자들이 그림 같은 제주의 자연을 뒤로하고 서귀포 구석구석의 골목길에 매료된 까닭이 궁금했다. 어슬렁 코스 지도 한 장을 얻어 여행자센터를 출발했다. 길에 따로 표식이 없으니 지도를 잘 보고 걸으라는 조언을 들었다. 한라산 품은 미술관
맛보기 코스로 어슬렁 코스 ‘문화의 향기’ 테마 A코스를 골랐다.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시작해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끝나는 길은 2.7㎞로 비교적 짧았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역으로 코스를 거슬러 가니 가장 먼저 서귀포칠십리시공원이 나타났다. 서귀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담은 시비가 띄엄띄엄 서 있는 것 말고는 평범한 공원으로 보였다. 그런데 공원 한가운데서 천지연폭포가 내려다보였다. 폭포 위쪽으로는 한라산이 훤히 드러났다. 천지연폭포를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있어도 폭포의 정수리를 내려다본 적은 처음이었다.
공원이 여행객 사이에 무명인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서귀포칠십리시공원은 서귀포 시민들이 아침, 밤 가볍게 산책하는 장소라는데, 동네 공원이 무지막지한 절경을 품고 있는 꼴이었다.
길은 공원 옆 야트막한 오름 삼매봉(153m) 방향으로 이어졌다. 제주올레 7코스는 삼매봉 정상에 있는 정자까지 닿지만, 어슬렁 코스 지도는 정상으로 향하기 전 옆길로 빠지라고 안내했다. 삼매봉으로 가는 둔덕에는 서귀포예술의전당과 기당미술관, 삼매봉도서관이 쪼르륵 서 있었다.
건물 벽면을 현무암으로 장식한 기당미술관을 건물이 멋있다는 이유로 들어가 봤다. 기당미술관은 서귀포 법환동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사업가 기당 강구범(1909~1994년) 선생의 지원으로 1987년 개장한 국내 최초의 시립 미술관이다. 미술관에는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생을 마감한 변시지(1926~2013년) 화백의 그림이 빼곡했다.
고준휘 큐레이터가 아트 라운지로 안내했다. 관람객이 쉬어 가는 장소에 커다란 창이 뚫려 있었다. 창 너머로 한라산 풍경이 그림처럼 걸렸다. 마침 날이 맑아 한라산 능선이 또렷이 드러났다. 당장 인스타그램에 기당미술관을 검색했다. 미술관의 큰 창을 찍은 사진이 몇 컷 나왔지만, 아직 이 스폿이 인스타그래머에게 점령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올레길 너머 깊숙한 곳에 숨은 보물 같은 장소다”라고 미술관을 소개한 고 큐레이터의 말에 수긍했다.
삼매봉도서관도 한라산의 절경이 아무렇지 않게 펼쳐지는 장소였다. 자연광이 쏟아지는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누구나 출입할 수 있고 누구나 책을 빌릴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정순임 사서가 “삼매봉도서관에 왔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 구내식당이다”라고 귀띔했다.
도서관 구내식당은 서귀포 사람들도 일부러 찾아와서 먹는 맛집이었다. 인기 메뉴는 한라산처럼 불쑥 솟은 계란볶음을 얹은 한라산 오므라이스(5000원). 대구 인터불고호텔 출신 주방장의 노하우가 녹아들어서인지 가격 대비 맛이 훌륭하다. 창밖의 한라산을 바라보며 오므라이스를 꿀떡 삼켰다.
물을 좇으면 제주가 보인다
서귀포에서 나고 자란 문화해설사 강치균(75) 씨가 어슬렁 코스 걷기여행에 동행했다. 강 해설사가 추천한 길은 한라산 물길 테마의 B코스였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출발해 조선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서귀진성까지 3㎞가 이어진다. 강 해설사가 “서귀포 사람의 생명수이자 휴식처인 서귀포 물줄기를 좇으면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귀포 중심가인 동문로터리를 지나 서귀포중학교를 오른편에 두고 골목으로 들어서니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대신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제주의 파도 소리는 익숙했어도 제주의 시냇물 소리는 생경했다. 제주는 폭우가 와도 삽시간에 땅 속으로 빗물이 스며든다. 제주가 화산섬이고 암석지대 대부분이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이뤄져 그렇다. 지하수는 해안에 다다라 용천수로 솟아난다.
“제주는 한강이나 낙동강 같은 큰 ‘강’이 없어요. 그런데 이곳 동홍천만큼은 물이 풍부해요. 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서귀포 사람들은 마음이 넉넉하지요.”
강 해설사가 어릴 적 멱을 감기도 하고, 식수를 떠가기도 했다는 동홍천은 제주에서 보기 드문 ‘강’다운 모습이었다. 동홍천 하류에 샘물이 퐁퐁 뿜어져 나오는 용천이 있는 덕분이었다. 서귀포 시민들의 휴식 장소 정모시쉼터는 바로 그 용천 주변에 만든 수변공원이다.
정모시쉼터에서 10여 분 걸어가니 시냇물 소리는 우렛소리로 바뀌었다. 동홍천이 바다로 흘러드는 그 지점에 낙차 23m를 자랑하는 정방폭포가 있었다. 곤두박질 친 폭포수가 그대로 서귀포 앞바다로 합류되는 장면은 절경이었다. 제주올레 6코스가 정방폭포를 지나기에 올레길을 걸을 때도 마주했던 폭포지만, 어슬렁 코스를 걸으며 정방폭포의 상수원을 보고 온 터라 감동이 남달랐다.
정방폭포를 빠져나와 서귀포와 연결된 새섬을 바라보며 걷자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제빙공장을 만들기 위해 터를 닦은 소남머리에 도착했다. 해안 절벽을 곁에 둔 소남머리에서 일본인은 물의 낙차를 이용해 터빈을 돌려 전기를 얻으려고 했다. 지금 소남머리에는 공장 대신 서귀포시 송정동 주민이 드나드는 목욕탕이 있다. 1급수 용천이 흘러드는 냉탕인데 한여름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선풍기를 틀지 않고 잠을 청할 수 있단다. 해안공원이 조성된 자구리해안을 거쳐 서귀진성에 닿았다.
어슬렁 코스는 대단한 명소나 유일무이한 절경을 만끽하는 길은 아니었다. 대단한 명소를 찾아가 인증샷을 찍고 다니는 것만이 꼭 여행의 목적이 될 필요는 없었다. 한량처럼 현지 주민들의 일상적인 공간을 천천히 누볐다. 물길 따라 쉬엄쉬엄 걸었더니 어느덧 서귀포 앞바다에 뉘엿뉘엿 해가 잠기고 있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4호(2019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