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윤한
[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 윤한은 피아노만 치진 않는다. 작곡도 하고 디렉팅도 하며, 심지어 노래도 한다. 스스로 ‘원맨쇼’라고 할 만큼 그가 발매했던 앨범들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 윤한이 유럽의 감성을 한껏 담은 <유러피언 판타지(European Fantasy)>로 돌아왔다. 유럽 도시들의 다양한 매력을 담기 위해 거의 처음으로 아티스트들과 협업했다고 한다. 새삼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졌다.윤한과의 만남은 이번이 세 번째다. 하지만 이렇게 눈을 보고 마주앉아 오랜 시간 깊은 이야기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몸짓은 여유가 있었고, 말투는 느긋하지만 신중했다. 물론 이것도 처음 안 사실이다. 방송을 통해 비춰진 그의 이미지만 보고 별다른 고생 없이 순탄한 삶을 살았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버클리 음대에 입학한 것이 아니었다. 혹은 집안이 좋아 매스컴을 타고, 교수가 된 것이 아니었다. 부족한 자신의 재능을 보완하기 위해 근면성실함을 택했던 노력파이자 결과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걸 도전하는 개척자였다. 이 역시, 인터뷰를 하며 처음 안 사실이다. 새삼 앞선 두 번의 만남이 무색해졌다. 동시에 겉모습으로만 판단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는 조곤조곤하지만 강단 있는 말투로 새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6월 21일, 정규 5집 앨범 <유러피언 판타지>를 발매했죠.
“제가 올 초에 유럽 여행을 다녀왔는데,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느꼈던 감성들을 곡으로 표현한 앨범이에요. 여행했던 도시들을 떠올리며 여행자의 시선으로, 마치 음악을 듣는 동안은 그 도시를 직접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타이틀곡인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는 피렌체의 명소인 베키오 다리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앨범에 수록된 15곡은 제목에 드러난 각각의 도시나 특징들을 담아냈죠.”
여행을 다니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텍스트 중에 이번 앨범에 수록된 곡 제목들이 꽤 있던데요.
“지난해에 <지극히 사적인>이라는 피아노 소품집을 발매했었는데, 저 스스로도 힐링이 되는 느낌이고 또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올해 5월이나 6월쯤 앨범 발매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었어요. 마침 여행하는 동안 틈틈이 도시를 다니면서 제가 느꼈던 것들을 노트하고 멜로디를 녹취하기도 했는데 양이 꽤 많아지더라고요. 한국에 오자마자 집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거의 수감생활 하듯이 3일 동안 15곡을 스케치했어요. 어떻게 보면 즉흥적으로 시작된 거죠.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들은 제가 이번 앨범을 염두에 두고 올린 건 아니에요. 다만 그 당시 여행의 콘셉트들이 지금 앨범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을 뿐이죠.”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이번에 좀 이례적으로 많은 아티스트들과 협업했어요. 원래 제 음악은 원맨쇼라고 할 정도로 기획부터 앨범 디자인까지 제가 혼자 다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심지어 이전 앨범에서는 제가 노래까지 다 했어요. 그래서 누군가와 같이 작업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이번에는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5명의 아티스트들과 의견을 듣고 조율했는데, 이런 협업 과정이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발견했죠.”
실제로 타이틀곡을 비롯해 많은 곡들이 최정상급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한 것이더라고요.
“이번 앨범에서 같이 작업했던 분들 모두 친분이 있거나 같이 연주를 했었던 아티스트들이에요.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씨는 저랑 동갑내기 친구로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고, 베이스 바리톤 권서경 씨도 같은 회사 소속으로 잘 알고 있었죠. 더블 베이시스트 성민제 씨도 평소 친분이 있던 사이고요. 기타리스트 조영덕 씨 같은 경우는 예전에 연주를 같이 했던 적이 있어요. 2012년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콩쿠르에서 대상을 탈 정도로 실력 있는 재즈 기타리스트죠. 첼리스트 송민제 씨는 소개를 받아 이번에 처음 작업했어요. 수록된 15곡을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장르가 굉장히 다양해요. 힙합도 있고 재즈, 라운지도 있고, 클래식도 있고 영화음악 같은 장르도 있어요. 다양한 악기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고 그 악기들을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 이분들을 세션으로만 섭외하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왕 하는 거 작곡이나 편곡도 같이 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이름도 같이 올렸으면 좋겠고, 그러다 보니 컬래버레이션으로 진행하게 됐죠.”
도시별로 악기가 떠올랐던 건가요.
“그보단 제가 쓴 그 곡에 맞춰 악기를 떠올렸다는 표현이 맞는 거 같아요. 첼로를 썼던 ‘베니스의 눈물’은 스토리에 인간의 양면성이라든지 현대인들의 고충을 담았어요. 모든 사람들이 포커페이스를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잖아요. 저도 교수로서 4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하고 싶은 말 다 했다면 지금은 10%도 못하고 있죠.(웃음) 그런 것들이 고음역대와 저음역대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첼로가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더 돌더 그랜드 호텔’은 취리히에 있는 동명의 호텔에 관한 곡이에요. 그 호텔은 오래된 고성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었는데, 비밀스러운 공간들이 많지만 또 현대적이면서도 복합적인 매력이 있는 곳이죠. 그런 것들을 보면서 웅장하면서도 음역대가 낮은 콘트라베이스가 딱 떠올랐어요.”
‘알프스와 신라면’, ‘김치찌개’와 같은 곡들도 흥미로웠어요.
“알프스에는 봉우리가 엄청 많은데, 어딜 가나 신라면을 팔더라고요. 추운 알프스에서 신라면을 먹는 걸 곡으로 표현한 거예요. 알프스의 신비로운 정서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신라면, 여기에 약간의 유머를 더했죠. ‘김치찌개’라는 곡은 제가 유학생활 당시 제일 먹고 싶었던, 어머니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반영했어요. 이번 여행에서도 마지막 날 밤에 아내랑 가장 먹고 싶은 게 뭔지 이야기하다가 김치찌개, 된장찌개와 같은 한식이 나왔거든요. 문득 타지에서 오래 유학하거나 혹은 이민 간 사람들이 가족에 대한 기다림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지 않을까, 이런 걸 곡으로 표현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처음엔 곡 제목을 ‘향수’, ‘그리움’ 같은 거로 하려다가 뭔가 직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김치찌개’라고 짓게 됐어요.”
음식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사실 음식 시리즈를 예전부터 하고 싶었어요. 그 음식을 먹을 때 들으면 좋은 음악을 만드는 거죠. 나라별로 카테고리화해서 이탈리아 음식이면 피자·파스타, 일식이면 스시·나베, 한식이면 김치찌개·곱창전골. 아예 제목도 ‘곱창전골’처럼 음식으로 하는 거죠. 음식을 먹을 때 소믈리에가 와인을 페어링해주는 서비스도 있는데 음악을 페어링해주면 안 될 것도 없잖아요. 뮤직 페어링이라는 주제로 음식에 관한 곡을 쓰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한동안 저를 따라다니던 수식어가 ‘로맨틱 피아니스트’여서 곱창전골이라는 곡은 안 맞는 거 같았죠.
(웃음) 이제 하고 싶은 걸 해도 되는 때니, 조만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윤한 씨를 보면 ‘저 남자 부족한 게 뭘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좋게 봐주시는데, 저도 부족한 면이 많아요. 참을성도 부족하고. 저는 음악성이 뛰어나서 음악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고, 열아홉 살에 버클리 음대를 갔는데 그 당시 모여 있던 전 세계의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꼴등이었거든요. 절대음감도 아니고 박자 감각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요. 드럼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데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친구, 빗소리가 다 멜로디로 들려서 피곤하다고 말하는 친구 등 실력이 엄청난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제가 살아남으려면 지구력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런 숨은 노력이 있는지 몰랐어요.
“저와 친분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런 노력들은 잘 모르죠. 교수로 임용될 때도 국내 27개의 실용음악과 학과장님들을 다 찾아다녔어요. 시간강사라도 좋으니 한 과목이라도 맡게 해달라고요.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더라도 시도하는 편이에요. 제가 데뷔하기 전에 TV 드라마에 나와서 유명해진 제주도의 한 호텔에 갔었는데 인테리어도, 산책로도 다 멋있더라고요. 다만 음악이 너무 별로였어요. 사람은 청각과 후각이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에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아도 음악과 향이 매출에 영향을 주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돌아와서 레스토랑·로비·수영장·산책로·복도·객실별로 아침·낮·저녁·밤 시간대에 어울리는 음악 리스트를 300곡 정도 추려서 보낸 적이 있어요. 답장은 없었고, 반영됐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작업들을 좋아해요. 이런 게 쌓여서 지금은 신세계 분더샵이라든지, JW 메리어트 호텔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어요.”
이렇게 끈기를 가진 건 음악이 좋아서겠죠.
“음악에 국한되기보다는 예술이라는 변주 안에서 다양한 작업을 해보고 싶은 거 같아요. 음악과 미술, 영화 등 문화예술이 다 하나이자 융합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면에서 피아노도 치고, 영화음악도 하고, 음악감독도 하고 있거든요. 사진 찍는 거도 좋아하고. 사실 어제 팍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는데 조만간 소속사 대표님이랑 상의하기로 했어요. 국내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던 건데, 재밌을 거 같아요.(웃음) 아까 말씀드렸던 뮤직 페어링 같은, 그런 흥미로운 것들을 연구하는 게 좋아요. ‘음악을 너무 사랑해요’,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할 거예요’ 이런 거보다는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저만의 방식을 계속 갈구하고 찾아 나가는 거죠.”
음악적 취향이 있나요.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가 있다거나.
“음악에 대해선 편식이 없어요. 물론 제가 재즈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재즈의 뿌리인 클래식을 동경하고 재즈에서 파생된 팝이나 알앤비, 힙합 다 좋아해요.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은 예를 들어 ‘쇼팽만 들어요’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람이 어떻게 쇼팽만 들어요. 해변으로 놀러 가면 EDM도 듣고 그래야죠. 재즈나 클래식에 심취한 사람들이 가요를 쉽게 보고 ‘이지 리스닝’이라는 단어까지 만들면서 음악의 등급을 나누려고 하는데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에요. 대중가요를 작곡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소위 말하는 ‘뽕삘’이라든지 후크 한 구절 만드는 게 정말 어렵거든요. 인디 뮤지션들이 직접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거, 그것도 쉬운 거 아니에요. EDM도 킥 드럼 하나 만드는 데도 몇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죠. 화성학적으로 어려운 조성이나 복잡한 코드를 쓴다고 해서 깊은 음악, 좋은 음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피아니스트, 교수, 남편, 이젠 또 아버지. 어떤 모습이 가장 나답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친한 형들이 결혼하면 남자가 된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실제로 경험해보니, 어른이 되거나 철이 든다는 느낌보다는 ‘남편’, ‘사위’, ‘아버지’ 등 새로운 타이틀과 그와 관련된 책임의식이 생기는 거 같아요. 저라는 사람이 바뀌진 않죠. 아직 남편이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얻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저답다고 말하기는 이른 거 같아요. 또 제가 이제 4년 차 된 신임교수라서 사회생활을 하는 것도 적응 단계고요. 아무래도 피아노를 가장 오래 했고, 무대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연주할 때 편하기 때문에 피아니스트로서의 윤한이 가장 나다운 거 같아요. 앞으로 정년퇴임을 앞두거나 결혼 40주년을 맞이하면 달라질 순 있겠지만, 지금은 그래요.”
향후 활동 방향도 궁금해요. 음악을 넘어 다른 해보고 싶은 것도 있는지.
“음악만 하기도 힘들어요. 또 뭘 해요. 음악만 하더라도 너무 바쁜데. (웃음)”
피아니스트 윤한은…
1983년 10월 14일생. 버클리 음악대학 영화음악작곡학 학사, 상명대 대학원 뉴미디어음악학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경희대 예술디자인대학 포스트모던음악학과 및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전임교수다. 1집 <언터치트(Untouched)>를 시작으로 현재 정규 5집 <유러피언 판타지(European Fantasy)>를 발매했으며 피아니스트뿐만 아니라 영화나 광고의 음악감독으로서도 활약 중이다.
사진 이승재 기자 | 장소 협조 gmu한남 카페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1호(2019년 0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