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경 머니 = 박숙자 서강대 전인교육원 조교수] 1960년대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고(姑) 이윤복의 일기를 기반으로 한 수필이다. 거리에서도, 학교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가난이라는 냄새는 극악한 상황과 생존하기 위한 투쟁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던 건, 이웃의 사랑이라는 희망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요즘 영화 <기생충>이 단연 화제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가난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생의 기억 저편에 놓인 ‘반지하’의 경험이 그것이다. 유리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냄새와 먼지, 그리고 창밖의 오물을 올려 보았던 기억의 불쾌함까지, 그 묘사 역시 구체적이다. 이 기억의 내용은 마치 가난한 집의 계보학 같기도 하다.
‘반지하’를 말하다가 ‘달동네’ 이야기가 끼어들기도 하고, 그렇게 ‘달동네’ 이야기로 시작된 연상이 8월 땡볕의 ‘옥탑방’으로 연결되자마자 비좁은 방의 답답함은 긴긴 장마철 햇볕 안 드는 ‘고시원’의 눅눅함으로 연결된다. ‘지상의 방 한 칸’이 어려웠던 사정들은 한국의 근대화 속에서 일반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실은 식민, 저개발의 역사 속에서 ‘가난’은 민족의 가난이자 늘 국가의 ‘빈곤’이었다. 다들 가난했고 궁핍했다. 그래서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어려움을 같이 나눌 이웃과 공동체가 있었고, 그래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지하’의 경험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반지하의 ‘냄새’로 차별받은 기억을 고백하기는 쉽지 않다. 반지하의 ‘냄새’란 차별과 혐오의 ‘구별 짓기’로 이는 개인적 수치심과 연결된다. ‘반지하의 냄새’는 신체에 새겨진 가난의 흔적이다. 이렇게 ‘가난’에 대해 얘기하노라면 ‘가난의 작품’이라 할 만한 작품이 선연히 떠오른다. 1964년 발간된 <저 하늘에도 슬픔이>다. 이 책은 발간되자마자 몇 개월 만에 5만 부 이상 팔린 것뿐만 아니라 출판 이듬해에 영화로 제작되는 등 당대를 들썩이게 했다. 10여 년 이상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왔으며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 일기의 주인공은 열한 살 소년 이윤복이다. 소년은 엄마 없이 병든 아버지와 동생들과 살아간다.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방법은 껌을 팔아 국수를 사서 먹는 것 정도이고, 대개는 구걸로 살아간다. 어느 날인가는 이틀을 내리 굶어 힘이 없어 학교에 가기 힘들다고 쓰고 있기도 하다. 윤복은 원래 염소를 기르는 움집에서 살았는데 주인에게 말해서 집을 옮기게 되자 ‘사람이 사는 집’에 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집조차 비가 오면 아랫목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극한 가난을 이미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책을 두고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눈물겨운 생존 투쟁을 하는 어린 가장의 기록”이라는 언급은 이런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모진 가난에 결국 껌팔이를 같이 하던 첫째 동생 순이 역시 가출한다. 윤복의 집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1960년대 거리에는 가난한 소년들이 많았다. 한국전쟁 이후 가족과 공동체의 근간이 무너지면서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아와 고아가 많았기 때문이다. 윤복은 껌팔이로 겨우 생계를 이었지만 그것마저 할 수 없어 전전긍긍해야 했다. 시내에 나가 껌팔이 장사를 하노라면, 고아들을 붙들어 격리시키는 시 공무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희망원에 소년소녀들을 집어넣었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부랑아’, ‘불량소년’ 단속이 많았다. 이들은 집에 부모가 있건 없건 무차별적 격리에 가까운 방식으로 거리에서 ‘정화’됐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가는 곳은 ‘희망원’, ‘선감원’ 등 격리 수용소였다.
열한 살 윤복이 역시 그곳에 수용됐다가 도망쳐서 집에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어느 날인가는 며칠 동안 찾았던 첫째 동생을 그곳에서 만나기도 했다. 열한 살 윤복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거리에서 자신이 지워지는 것은 ‘가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랑아를 단속한다고 하지만 윤복이처럼 껌팔이 소년들이 거리에서 ‘정화 대상’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이윤복은 시내에 나갈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 소년에게 가난의 ‘냄새’는 ‘표적’이었다.
학교에서도 방식은 달랐지만 가난의 ‘냄새’로 사람을 구별하는 말과 시선은 있었다. 가지런하지 않은 머리와 깨끗하지 않은 가난의 복장은 매번 “아버지 안 계시냐” 하는 물음으로 돌아왔다. 사정은 다르지만 도시락이 없거나 공책이 없을 때 소년이 호명되는 방식은 ‘불쌍한 윤복이’였다. 열한 살 소년은 학교에서 내쳐지지 않았지만 동정과 연민의 이름으로 불렸고 이는 구별에 다름 아니었다.
부랑아로 격리되든 불쌍한 소년으로 동정되든 소년은 부끄러웠다. 그래서 구걸만은 하고 싶지 않다고 종종 생각했다. ‘구걸’할 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껌팔이로 끼니를 잇겠다고 하지만 어느 것도 쉽지 않아 며칠을 내리 굶는 일이 많았다. 이런 윤복의 일기는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가난의 설움’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알았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일기가 극악한 가난으로만 도배됐다면, 독자들 역시 쉽게 책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수많은 독자들이 이 일기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차별과 혐오와 동정을 넘어서는 또 다른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윤복의 일기를 보고 나서 윤복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5학년 학생’으로 이름을 불러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소년 이윤복 자신이다. 윤복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격리되고 배제되는지 알고 있지만, 이 소년이 거리에서 그 비슷한 존재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달랐다. 이를테면, 밤늦게 거리에서 울고 있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겠거니 하면서 눈길도 주지 않고 돌아가 버리지만 윤복은 할아버지가 이 밤에 어디에서 주무실까를 생각하며 껌팔이로 얻은 돈의 일부를 할아버지의 손에 쥐어준다. 나이 어린 소년이지만 윤복에게는 그 혐오와 차별의 ‘선’과 ‘냄새’를 훌쩍 넘을 수 있는 마음이 있었다.
1960년대 이 책이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가난의 설움을 비밀처럼 공모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지만, 또 누군가는 이를 뛰어넘는 이웃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린 윤복의 모습 속에서 분명하게 보였다. 이 책이 발간되자마자 독자들은 윤복의 동생 순이와 어머니를 찾아주자는 캠페인을 실시하기도 했다.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는 사실을 그대로 전염시킨 것이다. 때때로 이 작은 ‘사랑’이 ‘가난의 냄새’를 넘어서서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는 듯하다.
일러스트 전희성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0호(2019년 0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