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석 화가, 캔버스라는 대지에 씨앗을 심다

[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l 사진 이승재 기자] 30년 그림 인생, 불투명한 미래가 걸음을 멈추게 할 때마다 하나둘씩 캔버스 위로 씨앗을 올리는 화가가 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을 꿈꾸는 세상 모든 씨앗들에게 바치는 화가 김동석의 위로.



“화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름다운 것은 때로는 지독한 대가가 따른다. 송파미술가협회장 김동석 화가의 30여 년 그림 인생도 그랬다.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이 길이 맞는지 수백 번, 수천 번 반문하는 과정에서 붓을 꺾어야 하나 고민도 여러 차례였다.

그는 많은 동료들이 현실의 벽에 눌려 각자의 꿈을 접고 현실에 순응할 때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상황에서 더듬더듬 화가로서의 삶을 연장했다.

그래서일까. 김 작가는 팍팍한 현실에 부딪쳐 무명으로 사라지는 청춘들이 아픔이었다. 서울송파미술가협회 12대 회장에 나선 것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청춘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 지난 6월 3일 제17회 개인전 ‘우공이산’을 성황리에 마치고 돌아온 그를 만났다.

-지난 5월 말, 제17회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 덕에 개인전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지금은 협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데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이번 ‘우공이산’에도 김 작가님의 오브제인 ‘씨앗’이 등장합니다. 김 작가님의 세계를 관통하는 씨앗은 무엇입니까.

“제가 씨앗이기도 하고, 기자님도 씨앗입니다.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씨앗이고, 또 다른 씨앗을 낳게 될 것입니다. 제게 캔버스는 대지이며, 어머니의 땅(품속)을 의미합니다. 농부들이 대지의 살갗에 상처를 내고 생명을 심듯이, 저 역시 캔버스에 그 숭고한 수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씨앗이 등장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씨알(씨앗)이 각고의 고통을 이겨내고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칠흑 같은 땅속 깊은 곳에서 새싹을 피어내는 여정을 보면서 아, 인간 역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새롭게 반성하고, 진정한 자기만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 작가님에게도 씨앗과 같은 여정이 있었습니까.

“본래 제 꿈은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미술 공모전에 나가고자 했지만 선생님이 신청을 받아주지 않아 도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게 상처로 남았는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미술부에 들어가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전국대회에서 상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미술에 몰두했습니다. 미대 진학을 목표로 했지만 부모님 반대에 무작정 서울에 올라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미대에만 들어가면 화가가 되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낭만주의에만 젖었다가 현실을 깨닫고 이게 내 길이 맞나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도교수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단 몇 초를 뛰는 단거리 선수도 그 스타트 라인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아느냐. 넌 아직 스타트 라인에 설 자격이 없다’는 차가운 말만 들었습니다. 그날로, 화구를 모두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골방에 앉아 생각해보니, 제가 교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노력하지 않은 자는 고민을 하는 것도 사치란 생각에 긴 방황을 마치고, 다시 미술에 몰두했습니다. 실패와 좌절, 방황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서 작고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했다는 회한, 자기반성. 자식으로서 도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졸업 후 3년 뒤에 열린 제 첫 개인전의 주제로 ‘어머니의 사계’를 잡았습니다.”

-첫 개인전 이후는 승승장구였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웃음). 오히려 빚만 떠안았습니다. 개인전을 여는 데 돈이 그렇게 많이 들더군요. 장소 대여, 설치미술, 도록 등 1000만 원을 융자 받아 첫 개인전을 열고, 그걸 3년에 걸쳐 갚았습니다. 분명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사회에 나와보니 ‘내 잘못만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좌절하며 이제 정말 붓을 꺾으려고 했는데,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5년 후에 다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어머니의 땅’이란 주제로. 씨앗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이후 제3회 개인전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에서 제 작품을 매입했습니다. 붓대를 꺾으면 내 그림을 소장한 분들에 대한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거란 생각에 그림을 계속 해야 할 원동력이 생겼습니다.”

-작품 생활을 줄곧 하다가 2017년에는 제12대 송파미술가협회장에 당선됐습니다.

“사실 제10대에도 도전했는데, 재수에 성공했습니다. 제가 재수까지 하며 협회장직에 욕심을 낸 것은 그래야만 시스템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원으로서는 지원 요청에 힘을 실을 수 없는 일들을 해내고 싶었습니다.”

-재임 2년 차. 이제 1년을 남겨 두고 있는데 어떤 게 변했습니까.

“한성백제문화제라고 가장 큰 행사가 있는데 전국 각지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을 섭외해 당락이 있는 공모전을 없애고 초대전 형식으로 바꿔 모두가 함께하는 축제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제도 개편을 하게 됐습니다. 공모전은 당락이 있어 누군가는 붙고 누군가는 떨어집니다. 전 어릴 때부터 수없이 떨어져봐선지 그런 게 싫었습니다. 창작 활동도 스트레스인데, 당락에서 오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정된 작가에게는 전시회 작품 반입·반출비와 도록제작비를 지원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작가들이 창작 활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젊은 화가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와 함께 낭만을 꿈꾸던 동료들이 버티지 못하고 미술을 포기했습니다. 학부시절 약 55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숫자만 작품 활동을 하고 나머지 학우들은 무엇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보다 능력도 있던 친구들이 미술을 포기하는 걸 보며 ‘아, 이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뛰어난 예술성과 열정으로 창작 활동을 숙명처럼 품고 사는 작가들이 무명으로 사라지는 아픈 현실이 되지 않도록 선배로서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리석은 직업이라고 등 돌리는 현실 앞에서 작가로서의 삶의 의지를 다시금 재정립하고 우공이산을 묵묵히 실천해 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남은 회장직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는 12월 5일에 예술의전당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회 때부터 17회까지의 대표작을 선정해 관람자로 하여금 한 작가의 작품 변천 과정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제 작품 과정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새로운 창작 활동을 모색해볼 생각입니다.”

김동석 작가는…
전남 순천 출신으로 추계예술대 서양화과, 동국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사)한국미술협회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공무원미술대전, 호국미술대전 등 각종 공모전의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을 지냈다. 삼육대, 추계예술대, 전남대 강사로 활동했다. 현재 (사)한국미술협회 송파지부장, 송파미술가협회 12대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0호(2019년 07월) 기사입니다.]
상단 바로가기